"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오마이뉴스 | 이희훈,김경년 | 입력 2015.05.27. 21:10 | 수정 2015.05.27. 21:14    


"출퇴근길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읽게 돼요. 매일 똑같은 싯구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려고 노력하게 됩니다."(김경수, 45,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다가도 한번 눈을 주면 누구나 잠깐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교보생명 빌딩에 걸려있는 '글판'이다.


멀리서 보면 잘 모르지만 이 글판은 가로 20m×세로 8m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안에 쓰여진 글씨는 겨우 30자 안팎.

  '광화문글판 25년을 맞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 봄을 알리는 문구가 적힌 글판이 걸려 있다.
ⓒ 이희훈


이 간단한 글이 작게는 서울 시민의 마음, 크게는 대한민국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가 미소 짓게 한지 벌써 25년이 지났다.

 1998년 여름편. 고은 창작.
ⓒ 교보생명

25년 전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


처음부터 지금처럼 운치 있고 멋들어진 문장이 아니었다. 1991년 1월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처음 제안한 문안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 / 경제활력 다시 찾자'였고, 이후에도 '훌륭한 결과는 /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 '개미처럼 모아라 / 여름은 길지 않다'같은 '임직원 훈화용 멘트'였다.


지금까지 광화문 광장에 그 같은 구호가 걸려있다면 얼마나 숨 막힐까. IMF 외환위기가 터진 다음 해인 98년 봄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글을 올리자'며 고은 시인의 시 <낯선 곳>에서 따온 '떠나라 낯선 곳으로 / 그대 하루 하루의 / 낡은 반복으로부터'를 건 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서 구호는 시로 바뀌게 된다. IMF가 광화문 글판을 살린 셈이다.


광화문 글판이 본격적으로 시민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는 게 교보생명 측의 설명이다.


이후 광화문 글판의 주인공은 도종환, 김용택 등 국내 시인부터 공자,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같은 현인들이 차지했다. 심지어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사가 채택되기도 했다. 고은 시인은 무려 7번이나 올려 가장 많이 등장한 작가가 됐고, 광화문 글판만을 위해 지은 시도 두 편이나 된다.


광화문 글판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자, 광화문 가로수와 같이 계절에 맞춰 1년에 4번 옷을 갈아입게 됐다. 문구 선정도 시인, 소설가, 카피라이터, 언론인 등이 참여하는 '문안 선정 위원회'가 꾸려져 시민의 공모작과 선정 위원들의 추천작이 열띤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경쟁하게 됐다.

▲ 시에 맞춰 몸을 욱직이는 연극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광화문글판 25년 맞이 공감콘서트'에서 글판에 쓰였던 문구에 맞춰 연극을 선 보이고 있다.

ⓒ 이희훈


 2011년 겨울편. 정호승 <고래를 위하여>
ⓒ 교보생명

시민 가슴에 남긴 수 많은 명작들


이후 광화문 글판에 오른 72편의 글 가운데 최고의 명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은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에서 발췌한 2011년 여름편이다. 당시 광화문 글판 20주년을 맞아 시민 1600명이 참가한 온라인 투표에서 '베스트 문안'으로 꼽혔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교보생명은 "스마트폰 등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발달할수록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 어려운 요즘 진지한 만남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 해 겨울 시민 공모로 선정된 정호승 시인의 시 <고래를 위하여>에서 발췌한 글은 불안한 미래로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꿈과 용기를 북돋아주며 열정적으로 도전하라고 말을 건네 인기를 끌었다.


2005년 봄편에는 손글씨를 활용해 서체에도 예술적인 감각을 불어넣게 됐으며, 2009년 봄편은 <뉴욕타임스>가 2002년 '올해의 우수 그림책'으로 선정한 류재수 동화작가의 <노란우산> 그림을 배경으로 넣기도 했다.


2010년 여름편에는 힙합 뮤지션 '키비'의 노래 <자취일기>에서 뽑은 문구에 그래피티 아트를 접목한 글판을 선보여 젊은 감각을 반영했다.


 2005년 봄편.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교보생명


 2009년 봄편. 류재수 <노란우산>

ⓒ 교보생명


 2010 여름편. 키비 <자취일기>
ⓒ 교보생명

"글귀 보고 자살할 마음 접은 사람도 있을 것"
▲ 글판 25주년 맞아 열린 심포지엄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광화문글판 25년 맞이 공감콘서트'에서 김봉현 동국대 교수가 발표를 하고 있다.

ⓒ 이희훈


▲ 광화문 글판의 25년 역사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린 '광화문글판 25년 맞이 공감콘서트' 행사장에 설치된 '글판 연대기'를 한 시민이 관람하고 있다.
ⓒ 이희훈

광화문글판의 이 같은 '성공'에 대해 김봉현 동국대학교 교수(광고홍보학과)는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건물 2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광화문 글판 25주년 기념 공감콘서트에서 "진정성을 기반으로 한 공감적 가치를 선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광화문 글판은 도심에 내걸려 많은 시민의 사랑 속에 25년간이나 이어온 독특한 소통 매체"라며 "상업성을 배제하고 공익적 가치를 내용으로 정치·사회적 중립성을 지켜온 것이 오랜 세월동안 시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 참가한 전성태 소설가는 "광화문 글판에는 시만 올라가는데 앞으로는 소설도 올라갈 수 있도록 문장을 써야겠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그는 이어 "광화문 글판을 형용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잔잔하다'일 것"이라며 "보는 순간 파문에 휩싸여, 다른 차원 즉 자기 내면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광화문 글판을) 서서 본 사람, 버스타고 가다 본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그로 인해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화해한 사람, 심지어 자살할 마음을 접은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정희 시인은 "한국의 언어는 흙탕물처럼 파괴되고 폭력적인 '무기의 언어'가 됐다"며 "상징적인 장소인 광화문에 이같이 보석 같은 글들이 걸림으로써 언어가 다시 절제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