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14 19:12수정 : 2013.10.14 20:44

국무총리실 소속 제주4·3위원회에서 13년 동안 활동한 김종민 전 전문위원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안 행방불명인 표지석 앞에서 25년 동안 4·3 취재기자와 전문위원으로서 오롯이 4·3 진상규명에 매달렸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4·3위원회 김종민 전 전문위원

국무총리실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에서 13년 동안 활동한 김종민(53) 전 전문위원은 지난 6월 말로 계약 해지됐다. 그가 타의에 의해 그만둠으로써 ‘4·3 문제’의 해결을 약속한 박근혜 정부에서 4·3 전문가라 할 만한 이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 제주4·3특별법 제정 13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10년이 지났지만 제주도내 대학에조차 4·3 전문가는 한명도 없다.

김 전 전문위원은 4·3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988년 초부터 제주지역 일간지에서 4·3 취재기자로 활동한 이래 4·3위원회 활동까지 25년 동안 오로지 4·3 문제에만 매달렸다. 제주4·3특별법 제정과 대통령의 사과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이를 음해하려는 세력의 시도에 맞서온 그의 노력은 치열했고 진지했다. 4·3 취재와 진상조사를 위해 7000여명을 만났다고 한다. 지난달 17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제주4·3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

“김대중 대통령 때 4·3특별법을 공약했고, 추미애 의원의 노력 등에 힘입어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4·3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회 산하에 ‘보고서 작성 기획단’(단장 박원순)이 꾸려졌다. 난 처음엔 보고서 작성 기획단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2003년 10월 보고서가 채택됐고, 같은 달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에 직접 찾아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사과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제주도민들에게 큰 위안이었다. 보고서 채택 뒤 희생자 심사 업무를 맡았다. 2009년 초 6건의 소송이 4·3위원회와 국가를 상대로 잇따라 제기된 뒤에는 소송 수행자로 지정돼 소송 업무를 처리했다.”

-전문위원을 그만두게 된 경위는?

“할 일이 마무리됐다면 미련없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희생자·유족 심사를 마무리하는 일과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4·3 추념일 지정을 위해 대통령령을 개정하는 일이 남아 있다. 희생자 심사 같은 경우는 유족들이 매우 민감하게 여기는 문제지만, 심사 업무를 해본 직원이 한명도 없는 상태다. 시행령 개정도 관련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전임 간부 공무원으로부터 모욕을 들으면서까지도 유족들이 절실히 원하는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6월 말로 계약이 종료될 예정이었고, 절차가 끝난 상태였다.”

-이명박 정부 때의 ‘4·3 정책’을 평가한다면?

“인수위원회 때부터 4·3위원회와 4·3특별법 폐지가 거론되지 않았나.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는데 3년 동안 4·3위원회 전체회의가 한차례도 열리지 않다가 2011년 1월26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다. 위원회는 ‘희생자 심사가 잘못됐다는 이유로 소송이 들어왔는데 소송을 마무리하기 전에 심사를 계속할 수는 없지 않으냐’며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해 회의를 미뤄왔다. 그래서 3건의 소송이 끝나자 전체회의가 열리게 됐다. 전체적으로는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은 시기였다.”

-현 정부의 4·3 정책을 어떻게 보나?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4·3 추념일 지정’과 ‘4·3 관련 예산 지원 확대’를 공약했다. 공약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4·3 관련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나?

“교학사 교과서는 학살 주체가 군경 토벌대임을 밝히지 않았다. 1948년 4월3일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살해한 점만 강조했고, 뒤이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됐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표현을 썼다. 이런 서술의 맥락과 표현은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군경이 아니라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에 의한 것인 양 오해하도록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런 식의 서술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4·3과의 만남이 운명적인 것 같다.

“운명적이라기보다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1987년 초 대학(고려대 사학과)을 졸업하자마자 귀향해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다가 그해 8월 제주지역 신문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3월 신문사에 4·3 특별취재반이 구성됐다. 취재반원은 16명이었는데 나중엔 취재반장(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과 함께 둘만 남게 됐다. 취재반장이 신문사 임원이 된 뒤엔 후배인 김애자 기자와 둘이서, 후배가 서울로 간 뒤엔 혼자 취재했다. 2000년까지는 4·3 취재기자로, 2000년부터 올해 6월까지는 4·3위원회 전문위원으로 25년 동안 4·3사건을 공부한 셈이다.”

 

4·3 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위해
25년간 오로지 한길 걸어왔지만
지난 6월 ‘타의’에 의해 물러나

교학사 교과서 4·3 사건 왜곡
학살주체 군경 토벌대 안밝히고
무장대 살해만 강조 오해 불러

생존자와 유족 등 7000여명 만나
눈앞에서 가족 잃은 고통 느껴
그들 위한 트라우마 치유센터 필요

-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전문위원으로 가게 된 이유는?

“당시 서울의 4·3범국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강력하게 권고했다. 제주에서도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며 버티다가, 결국 선배와 지인들의 강력한 권고로 가게 됐다. 3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13년으로 늘어날 줄 누가 알았겠나.(웃음)”

-<제민일보> 연재 ‘4·3은 말한다’는 국내 신문에서 드문 장기 연재였다.

“1988년 특별취재반이 구성돼 1년 동안 취재했다. 그 결과물이 1989년 4월3일 1회 연재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456회에 걸쳐 10년 넘게 연재했다. 신문사 사정으로 중간에 6개월쯤 쉬었을 뿐이다. 4·3 당시 초토화작전을 취재할 때는 사나흘 고민하다 제주도 모든 마을을 취재하겠다고 결심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증언을 들어야 했기에 바로 증언 채록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이 빠질 정도로 취재했고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분들 대부분은 돌아가셨다.”

-1980년대 후반에는 4·3 취재가 쉬운 때가 아니었을 텐데.

“취재 초기에는 4·3 경험자나 유족들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좌제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는 식이었다. 1992~93년부터 증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거부했던 이들 가운데 신문 연재를 보고는 증언하겠다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4·3을 취재하면서 수난도 겪었을 것 같다.

“연재물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실명을 쓰지 않았는데도 신문사에 찾아와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연재할 때마다 항의 전화든 감사 전화든 전화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팩트가 틀렸다는 전화는 없었다. 기사를 책으로 내기 전에 독자들로부터 검증받았다는 것은 신문 연재의 장점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4·3 경험자는?

“지금도 생존해 계신데 당시 8살이었던 분이다. 이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 3명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일곱살과 다섯살 난 동생들에게 총 쏘는 장면을 문 뒤에 숨어 지켜봤다. 경찰이 돌아가자 불길을 뚫고 집안에 들어가 구덕(요람) 안에 있던 한살 동생을 꺼냈으나 굶은 끝에 숨이 멎었다. 증언을 옆에서 듣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입버릇처럼 ‘내가 15살 정도만 됐더라도 힘이 있어 시신이 불에 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수시로 중얼거린다고 하더라. 이런 증언을 들은 날엔 몸살을 앓았다. 이런 분들의 아픔을 치유해줄 트라우마 치유센터가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진상조사 보고서와 희생자 심사 등과 관련해 우익세력의 소송이 많았다.

“2009년 3월부터 두 달 사이 보수세력이 4·3위원회 위원장인 총리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헌법소원 심판 2건, 행정소송 2건, 국가소송 2건 등 6건의 소송을 한꺼번에 제기했다. 다행히 지난해 3월15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끝으로 6건의 소송 모두 승소했다.”

-소송 대응은 어떤 식으로 했나?

“첫 소송 답변서는 13시간 동안 썼는데 생각이 흩어질까봐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이용훈 대법원장 때부터 본격화된 ‘공판중심주의’를 적극 활용했다. 법정에서 상대쪽 변호사와 날선 공방이 오갔는데 오랜 세월 4·3사건을 공부해온 내가 유리했다.”

-보수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진상조사 보고서가 잘못됐으니 파기하고, 희생자 결정을 무효로 하라는 것이다. 보수정권 출범을 틈타 4·3특별법이 제정된 뒤로 이룬 성과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겠다는 의도였다. 단 한명의 희생자라도 결정이 무효화될 경우 유족들이 겪을 상처를 생각하니 3년 동안 밤마다 전전반측했다.”

-4·3 취재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람있었던 일을 든다면?

“4·3위원회에서 <제주4·3사건 자료집> 11권을 편찬한 일이다. 그런데 자료집 편찬 과정에서 고위 공무원과 두 번 크게 다퉜다. 그는 ‘4·3특별법에 진상조사 보고서를 쓰라고만 명시돼 있지, 어느 곳에 자료집을 편찬하라는 말이 있느냐’며 반대했다. 영인본 문제로 또다시 다퉜다. 나는 자료집마다 뒷부분에 해당 자료의 원문을 그대로 영인해 수록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야 4·3 연구가 깊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의견을 관철시켰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군경이든 우익단체원이든 어느 누구도 4·3과 관련해 사과한 사람은 없는데.

“4·3 때 군경 토벌대가 저지른 학살극의 잔인함과 참혹성은 상상력을 압도한다. 증언에 응한 군경 출신들은 대개 모진 짓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학살극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잔인해 아마도 직접 학살한 당사자가 반성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역사적 책임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24일 맺어진 한-미군사협정에 따라 1949년 6월 말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과 경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에 있다.”

-4·3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뭐라고 보나?

“4·3 당시 한 언론은 제주4·3사건에 대해 한반도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강제 분할점령, 6·25 전쟁과 분단 고착화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배어든 상징적 사건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비록 4·3 관련 조직을 떠났으나, 앞으로도 4·3과의 끈을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