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입력2013.02.24 14:10|수정2013.02.24 14:20

 

[한겨레]⑤ 저항과 비극의 서사, 스코페프티리오


그리스 빨치산들 처형소 있던 케사리아니


해방 이후엔 영국군과 정부군 주둔


4·3 사건 이후 버림받은 제주도와 유사

■ 저항과 비극의 상징, 스코페프티리오

1944년 4월30일 아테네 근교 하이다리(Haidari)수용소에 수감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다. 독일군 수용소장 카를 피셔(Karl Fischer)는 수감자들에게 다른 수용소로 옮길 것이라며 소지품을 챙기도록 명령했다.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수용소 안에 퍼져 이미 있었다. 독일군 장군 프란츠 크레흐(Franz Krech)와 3명의 장교가 펠로폰네스 라코니아 몰라오이에서 민족인민해방군 빨치산들에게 살해된 데 대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인 5월1일 오전, 아침식사가 끝나자 피셔는 보복 조처로 처형될 200명의 수감자 명단을 읽어내려갔다. 이들은 기타와 바이올린을 켜며 눈시울을 붉히는 수감자들과 생애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트럭에 실리기 직전 그들은 나치 앞에서 그리스 국가 '자유를 향한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장자들이 먼저 부르자 젊은이들이 뒤따랐다. 수감자들이 흐느꼈다. 독일군은 이들의 노래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이윽고 이들은 트럭에 실려 케사리아니(Kessariani)의 '스코페프티리오'(Skopeftirio·사격장)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스러져갔다.

1944년 6월16일에는 10명의 빨치산들이 친독협력부대와 독일군에 체포돼 이곳에서 처형됐다.

또 한사람의 희생자, 니콜라스 글레조스(Nikolas Glezos).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이 세상 마지막 글을 적은 모자를 처형장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떨어뜨렸다. 나중에 혹시라도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도 스코페프티리오에서 총살됐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돼 제주 모슬포의 절간고구마창고에 수감됐다가 트럭에 실려 섯알오름으로 끌려가던 주민이 신발을 떨어뜨려 자신의 죽음 소식을 알렸던 것처럼…. 모자를 떨어뜨렸던 그는 아크로폴리스 위에 나부끼는 나치 독일기를 몰래 끌어내렸던 마놀리스 글레조스의 형이다. 스코페프티리오에서는 1942년 13명의 빨치산들이 총살된 것을 시작으로 1943년에는 147명이, 1944년에는 440명이 총살됐다.

나치는 독일군 병사 1명이 죽으면 그리스인 50명을, 1명이 부상을 입으면 10명을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릴 정도로 그리스인들의 저항활동에 가혹하게 대응했다. 그만큼 그리스인들의 저항활동을 두려워했으리라.

■ 드미트리, 비극의 현장으로 안내하다

스코페프티리오 공원은 케사리아니시에 있다. 그리스 문화부는 1984년 저항과 비극의 역사가 담긴 스코페프티리오 공원 44만5165㎡를 사적지로 지정했다. 아테네 신타그마광장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에반겔리스모스역에서 내려 224번 버스로 갈아탔다. 20여분을 가자 운전기사가 '케사리아니!' 하면서, 차에서 내려 똑바로 가라는 손짓을 한다. 200여m 가자 공원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스코페프티리오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를 아느냐"고 묻자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가로수 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니 왼쪽에 사진에서 봤던 장소가 나타났다. 철문이 잠겨 있었다. 철문 안에는 각명비처럼 수백여명의 희생자 이름과 날짜가 적힌 검은색 비석이 보였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2개의 황금색 동으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기둥도 눈에 들어왔다. 설명문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오다, 우연히 케사리아니 출신 드미트리(52)를 만났다.

가로수로 심어진 감귤나무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다가와 묻는다. 감귤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케사리아니에 온 이유를 설명하게 됐다. "점령이나 내전시기 기념물을 찾아 스코페프티리오까지 왔는데 문이 닫혀서 시내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그가 씨익 웃는다. "따라와요. 같이 갑시다!" 30여년 동안 관광가이드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런 사람도 만나네' 하는 생각에 같이 웃으며 스코페프티리오로 갔다. 비석과 기념물이 있는 철문 안쪽으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사실 이 공간은 처형장이 아니라 빨치산들을 수용했던 공간이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기념물을 만들었어요." 빨치산들을 수용했던 장소와 총살 장소는 훼손될 우려가 있어 케사리아니시청에 연락해야 개방된다고 한다.

그가 기념물 뒤쪽 울타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이 공간을 아느냐"고 말을 건넸다. "여기가 바로 처형장으로 사용된 곳이지요. 사실 그리스인들의 저항활동은 케사리아니에서 시작됐어요."

말을 마치자 큰 키의 그가 올타리를 짚고 훌쩍 뛰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뛰어넘었다. 마치 설명을 준비했던 것처럼 그가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곳이 처형장이었던 곳이지요. 여기 직사각형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바로 독일군이 기관총을 거치해 발사했던 장소입니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기관총 거치대로 사용됐던 앞 쪽에는 울타리 벽을 뒤로 하고 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다. "수용소가 있던 왼쪽에 좁은 회랑이 보이죠? 독일군은 빨치산들을 저쪽으로 끌고와 앞에 보이는 나무가 있는 곳쯤에 세워놓고 총살했습니다. 기념물이 설치된 장소와 이곳은 서로 연결된 곳이죠. 저 회랑을 통해서 걸어왔을 그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장면을 떠올려본다. 밝은 대낮이지만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침침하게 보이는 저 회랑을 걸어나오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 그리스를 생각하면서 자랑스럽게 죽어갔을까? 아니면 고향의 부모 형제 자식들을 생각하고 그리며 죽어갔을까? 독일군이 뿜어댄 기관총의 불빛은 그리스인들을 관통하고 무수히 벽에 처박혔으리.

빨치산들이 서 있던 곳에는 조그만 시멘트 위에 글이 쓰여져 있다. '인민과 순교자를 위하여, 1942~1944년. 모든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 '소아시아 파국'과 케사리아니의 역사

한참을 그곳에서 설명을 듣고서 서성이다 나왔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삼촌들과 함께 사냥을 올 정도로 스코페프티리오 주변에 집들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만큼 시대가 변한 걸까. 그가 케사리아니를 소개시켜주겠다며 길을 나섰다.

"우리는 사실 스미르나에서 왔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스미르나에서 이주한 이주민이죠."

"그럼 1922년 '소아시아 파국' 때 케사리아니로 왔다는 말입니까? 인구교환이 벌어질 때 이곳으로 왔군요!"

케사리아니는 1922년 이른바 '소아시아 파국' 당시 터키의 스미르나에서 건너온 그리스인 난민들이 거주했던 난민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소아시아 파국은 '대그리스주의'를 표방했던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협정을 체결해 인구교환이 이뤄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리스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격변을 몰고왔으며 '민족분열'의 기원이 됐다. 스미르나에서 상업활동과 전문직종에 종사했던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 파국 이후 그리스로 돌아와 핍박과 차별 속에 보내야 했다.

오전 숙소에서 그리스 국영방송 <에르트>(EPT)를 켜자 '소아시아 파국' 90주년 기념 특집기획물이 방송되고, 국립역사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할 정도로 이 사건은 관심사였다.

"조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는 말에, 드미트리는 "아주 긴 얘기에요. 아주 길어요"라며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실 아까 케사리아니에서 빨치산 활동이 시작됐다고 했는데 곳곳에 그런 기념물이 남아 있어요."

그가 케사리아니 시내 길가로 나서자 낡은 이층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외벽은 너덜너덜하고 이층에는 유리창 대신 나무 창틀이 있는 집들이다. "오래된 집으로 보이죠? 대부분 1920년대에 지어진 집들입니다."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집들이다.

그의 말처럼, 점령 시기 빨치산 활동의 전설적 지도자 아리스 벨루키오티스(Aris Velouchiotis)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저항단체를 조직했다. 그와 함께 나중에 최후를 같이한 마놀리스 차포스는 케사리아니 출신이다. 그가 길가 키오스크(간이매점) 옆의 허름한 2층집 앞으로 갔다. 조그만 동판이 벽에 붙어 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의 태도가 진지하다. '1944년 8월18일 죽어간 카람팔리키스와 무명의 동지를 위하여, 그리고 국가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뜻이란다. 아테네에서 독일군이 철수하기 직전에 학살이 있었던 장소다.

해방 이후 케사리아니의 역사는 더욱 슬프다. 1944년 12월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 대 정부군·영국군이 전투를 벌였던 시기 케사리아니의 대다수 주민들은 민족인민해방군에 가담했다. 영국군과 정부군은 무차별적으로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며 케사리아니를 포격했다. 전투가 끝난 뒤 영국군과 정부군은 '점령군'으로서 케사리아니에 진주하고, 이들은 점령 시기 '저항의 전사'(빨치산)들이 처형당했던 스코페프티리오에서 사격연습을 해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에 항의하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마크로니소스섬으로 유배되거나 투옥됐다. 케사리아니는 정부에 의해 '요주의 지역'으로 찍혀 감시 아래 놓였다.

이번에는 그가 바로 옆의 조그마한 광장으로 안내한다. "독일군 점령 당시 학살 기념물은 그리스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어요. 그리스 전체가 독일군의 커다란 피해를 봤으니까요.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저항활동도 치열했으니까요."

광장의 한쪽 구석에 설치된 조형물을 가리키며 독일군의 점령에 저항한 그리스인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라고 한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3인의 인물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한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케사리아니가 해방 이후 버림받았듯이, 제주 4·3 이후 제주도는 '반역의 땅'이었고, '소외받은 땅'이었다. 많은 제주도민들이 연좌제의 그늘 아래 수십년 동안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국가로부터는 어떻고. 오죽하면, 5·16 군사쿠데타 이후 김영관 제주지사조차 부임하면서 "4·3 사건 이래로 10여년 동안 정부 시책에서 버림받아왔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을까. 케사리아니는 또다른 '제주도'였다.

케사리아니(그리스)/허호준 기자hojoon@hani.co.kr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