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형무소 학살사건은 1950년 7월 중순 특무대, 헌병, 경찰이 경북 대구형무소의 재소자 2,574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발생한 조직적 학살은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인 학살, 그리고 형무소 수형인 학살사건이다.
당시 형무소 수형인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과 관련한 정치범들이 많았으나 단순 절도범 등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학살은 기결수와 미결수의 구분이 없었다.
형무소 수형인 학살은 최상층의 지시에 의해 전국 모든 형무소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살의 이유는 인민군이 남하하면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중 대전형무소 1800여 명, 대구형무소 1000여 명은 관련 미문서와 사진, 국회 기록으로 학살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부산, 마산, 김천. 전주, 공주 등지의 학살도 유골이 발굴되는 등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이 외에도 인천, 수원, 원주, 청주, 광주, 목포, 진주 등의 형무소에서도 모두 학살이 자행된 것으로 속속 확인되고 있다.

대구형무소 피학살자 수는 60년 4대 국회의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의 조사결과 1,402명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2002년 민주당 전갑길 의원실에서 조사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처리된 1,172명의 행방이 묘연하며, 이들이 이감 도중 학살되었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약 2,574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대구형무소 수형인들은 대부분 가창계곡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창댐은 수몰지역이나 60년 국회조사특위 조사 과정에서는 유골과 탄피를 확인한 바 있다. 댐공사를 위해 굴찰작업을 하던 기사가 도망갈 정도로 수많은 유골이 땅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칠곡군 덕곡마을 신동고개, 대구 송현동 상인동 일대, 동산면 동화사 입구 계속 등 여러 곳에서 유골을 확인하였다. 이 때 확인된 유골들의 정수리에 20-30cm의 대못이 박혀 있는 등 당시의 학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삼웅, <해방후 양민학살사>, 1996, 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