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11사단 20연대 2개 대대가 회문산지역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1대대 1중대는 고창읍 서북방 팔덕면 용산리에서, 2중대와 4중대는 고창읍에서, 3중대는 342고지에서, 5중대는 복흥면 상송리에서, 6중대는 용계리, 7중대는 용광리, 8중대는 쌍치면 옥산리에서 출발했다. 용화봉 여분산을 포위 공격하면서 회문봉의 사령부를 향해 들어갔다.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주민들이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와 고창경찰서, 향방대원, 군경유가족회, 학도의용대원, 의용경찰대원에 의해 집단희생당했다. 당시 사건을 일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장면] 덕산리 : 1950년 10월 30일 무장면 덕산리 백양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에 의해 마을 뒷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잡혀 총살당했다. 당시 군인들에게 여러 명이 잡혔으나 노인들은 돌려보냈고 나머지 청년 5명이 총살당했다. 유홍종, 엄규섭, 임인택, 엄종섭, 김병현이 희생자로 확인되었으며 가해자는 국군 11사단 13연대 3대대였다.

 

[대산면] 대장리 : 1950년 11월 30일 군경토벌대를 피해 공음면으로 피난하던 대장리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 잡혀 희생되었다. 대장리 주민들이 피난하던 중 먼저 가던 피난민들은 무사했으나 뒤에 가던 유점식 등 피난민들이 공음면 덕암리 평촌마을 들녘에서 포위망에 걸려 살해당한 것이었다. 당시 사건의 희생자는 7명이다.

 

[대산면] 지석리 : 1950년 12월 2일 대산면 지석리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 붙잡혀 마을 옆 야산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정재국, 김차석, 신휘철, 강응원, 한부덕 등 5명이었다.

 

[심원면] [심원면 해리면_동짓달 사건] 1950년 12월 22일 오후 군경합동토벌대가 상하면, 해리면, 심원면 등 서남쪽 3개 방향에서 진입하였다. 토벌대는 박격포와 총을 쏘면서 진입하였으므로 겁에 질린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모두 바닷가로 도망쳤다. 동호리 바닷가와 심원면으로 도망하던 해리면 주민들이 군경에 붙잡혀 사살당했다. 만돌리 바닷가로 도망치던 심원면 두어리 주민들도 희생되었다. 당시 바닷가는 시야가 트인 갯벌 위였으므로 피신할 곳이 없었으며 모두 사살된 것이었다. 주민들이 주로 희생당한 곳은 심원면 고전리 당산나무 밑, 만돌리 개명산 앞, 만돌리 바닷가, 작은 달구지, 해리면 동호리 바닷가였다.

고전리 당산나무 밑 사건 : 해리면 하련리, 왕촌리 주민 30여 명이 진주하는 군인을 피해 해리천을 건너 심원면 방향으로 피난하던 중 군인들에게 잡혀 고전리 당산나무 아래로 끌려갔다. 군인들은 “한 놈당 세 방씩 쏘아라”라는 명령에 따라 총을 쏘았다. 이곳에서 일부는 극적으로 살았으나 20여 명이 희생되었다.

작은달구지 사건 : 두어리 주민 7명 등 40여 명이 황학산 방면에서 들어오는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잡혀 ‘작은달구지’로 끌려가 총과 칼로 살해당했다.

개명산 및 만돌리 바닷가 사건 : 군인들을 피해 만돌리 바닷가로 몰려갔던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했으며 그 중 생포된 50여 명을 개명산 아래로 끌려와 기관총을 난사해 살해했다. 이날 만돌리 바닷가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몇 명이나 되는 지는 조사되지 않았다.

구동호 선창가 사건 : 11시경 군경토벌대가 왕촌마을부터 구동호에 이를 때까지 피신하던 주민들이 발견되는 대로 사살했다. 마을에서 희생된 피난민들은 10여 명이었다. 피난하던 주민들 37명은 마을 뒤 일제강점기에 파놓은 두 개의 굴에 숨어 있었는데 마을마다 수색하던 군인들에게 붙잡혀 선창가에서 총살당했다. 마을에서 희생된 주민까지 모두 50여 명이 희생당한 것이다.

신동호 해수래 성교 사건 : 11시경 군인들은 신동호 마을에 진입하여 피난해 있던 주민들을 신동호에 있는 삼양사 소금창고에 가두웠다가 새벽 1시경 차례로 끌어내어 해수래 성교에 1줄씩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희생자의 시신은 썰물에 떠내려갔으며 목격자들은 당시 희생자가 50여 명이 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왕촌리, 방축리 사건 : 해리면 왕촌리, 안산리, 사반리 주민들이 인근 조지산과 방축리 부근으로 피신했다가 군경토벌대에 잡혀 살해당했다.

좌치포구 사건 : 1950년 12월 23일에도 군경의 토벌작전이 계속되어 좌치나루터에서 많은 피난민이 희생되었다. 동짓날 사건 후에 군경토벌대는 동호국민학교에서 숙영하고 다음 날 삼양사 둑방길로 나가 심원면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심원면 하전리에서 하루 동안 피신했던 주민 30여 명이 12월 23일 배를 타고 부안으로 가기 위해 좌치나루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으나 바로 좌초되었으며 이어 경찰들이 전마선을 타고 나와 이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외에도 심원면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연화리 도천마을로 피난했던 고전리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상하면] 하장리 : 1950년 12월 24일 상하면 하장리 주민들이 피난 중 용대리 용대마을 부근에서 사살되었다. 이날 경찰이 저수지 건너 마을 뒷산에서 오는 모습을 보고 마을 주민들이 홍농으로 피난을 가던 중 뒤 쳐져 있던 방극섭과 박동섭이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대산면]중산리(11사단) : 1950년 12월 28일 중산리 주민들이 군경토벌대에게 살해당했다. 1950년 12월 28일부터 29일까지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는 경찰과 함께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군경토벌대는 12월 28일 중산리 곡천마을과 성남마을에 진입하였다. 가택수색을 하여 피난하지 않고 집에 남아있던 이용범, 이재룡, 박맹원 등 3명을 곡천마을 앞 논에서 총살했다. 성남마을에서도 선기상, 김영조, 김인화 일가족 등 5명이 무장면으로 피난가던 중 붙잡혀 마을 뒤 소나무 숲에서 살해당했다.

 

[상하면] 자룡리 : 1950년 12월 29일 영광군 홍농면 주공순이 토벌을 피해 아들을 업고 친가인 상하면으로 오던 중 토벌대에게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산’ 아래 바닷길에서 사살당했다.

 

[상하면]석남리 : 1950년 12월 31일 상하면 석남리 장복득은 영광군 홍농면으로 피난하던 중 ‘덕개미산’에서 살해당했다.

 

[공음면] 건동리 : 1951년 1월 15일 공음면 건동리 주민 등이 장성군 삼계면 고산으로 피난 갔다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대장촌 잔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당시 고산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150여 명에 달했는데 건동리에서 피난했던 희생자는 김기호 등 6~7명이었다.

선동리 : 1951년 1월 5일 공음면 주민들이 11사단 국군에 의해 선동리 선산마을 옥산저수지 부근에서 집단살해당했다. 당시 희생자는 400~500명이었다. 1951년 1월 5일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대위 이용배)와 고창경찰, 고창학련원, 군경유가족회원, 향방대원 등 군경토벌대가 무장면, 대산면, 공음면을 포위하자 각 마을 주민들은 공음면 선동리 방향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피난민들은 각 길목마다 이미 대기하던 군경토벌대에 잡혀 선동리 선산마을 옥산저수지 앞밭으로 끌려 왔다. 붙잡힌 주민들은 오후 3~4시경까지 엎드린 채로 토벌대와 군경유가족들로부터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토벌대원들은 부녀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수냉식 기관총 2정이 설치되어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얼마 후 ‘산 사람은 일어나라. 천운을 타고 났으니 살려주겠다’라고 하자 일어난 사람이 있었는지 또 다시 총을 쐈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떡메로 때려 ‘확인살해’했다.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를 알고 있다는 주민들 20여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했다. 이 외에도 집에 있다가 토벌대에게 살해당한 주민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상하면] 하장리 : 1951년 1월 6일 군경토벌대는 공음면 선산면에 이어 상하면에서 토벌작전을 하였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를 비롯한 군경토벌대가 상하면 하장리, 석남리, 자룡리에서 수색작전을 벌여 집안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살해했다. 주로 하장리에서 붙잡힌 주민들은 인근 상하국민학교 옆 공터에서 희생되었는데 당시 희생자는 18명에 달했다. 이 중 12명이 하장리 주민이었다. 자룡리와 석남리 주민들은 갈산마을에서 희생되었다. 갈산마을에는 80여 명이 끌려왔는데 이중 여자도 20여 명 되었다. 이들은 돌방구재와 왕재에서 희생되었다.

 

[대산면] 회룡리 : 1951년 1월 9일 영광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성송면 암치리 뒷산 생말골로 피난했던 대산면 회룡리 주민들 중 강봉원이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상하면] 용정리 : 1951년 1월 12일 용정리 노준섭이 피난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다가 마을에 들어온 군경토벌대에 의해 집 뒤에서 총과 칼로 살해당했다.

 

[심원면] 연화리 : 1951년 1월 23일 만돌리 현종수가 연화리 수리답 부근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현장에는 시신이 여럿이 있었다. 같은 마을 장종술의 시신은 저수지에 빠진 상태였다.

 

[심원면] 용기리 : 1951년 1월 27일 심원면 용기마을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주민 4명이 살해당했다. 주민들이 마을 남쪽 안산으로 피난했는데 삼망산 방향에서 군경이 몰려오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뒤 쫓아 온 경찰이 주민들을 연행하여 살해했다. 1951년 2월 4일 용기리 오태영, 임남권이 고창경찰서로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 1951년 2월 3일 용기리 오태랑이 심원면과 부안면 사이 좌치포구에서 살해당했다.

 

[심원면] 월산리 : 1951년 2월 15일 월산리 박경오가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당했다.

 

[상하면] 자룡리 : 1951년 3월 4일(또는 3일) 총소리가 들리자 자룡리 주민들이 ‘고리포산’과 전남 영광군 홍농방면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미처 피난을 못한 주민들이 ‘비둘기 모퉁이’와 ‘고리포산’에서 군경과 마주치게 되었고 주민들이 ‘비둘기굴’로 몸을 숨겼으나 이내 경찰에게 끌려갔다. 자룡리와 용정리에 진입한 군경은 마을에 남아있던 젊은 남성들을 끌어내 ‘비둘기 모퉁이’로 끌고 가 ‘비둘기굴’에서 끌려나온 주민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사살했다. 이날 희생자는 60여 명에 달했다. 이날 용정리에서 연행된 주민 5~6명은 해리지서로 끌려간 뒤 3월 22일 돌아왔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한 주민은 21명이었다. 이 날 작전에 가담한 군인은 11사단 20연대 2대대 8중대였다.

 

[심원면] 월산리 : 1951년 3월 10일 월산리 주민들이 사등천변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는 8명이었으며 손재만의 희생사실만 확인되었다.(8명 희생자 중 1명 확인) 1951년 3월 10일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월산리 주민들이 바닷가로 나가 ‘가막바위’와 해변가 바위틈에 숨었다. ‘가막바위’가 밀물에 잠기면서 익사할 지경에 이른 주민들이 사등천변으로 올라왔다. 이를 지켜 보던 경찰이 이들을 붙잡아 현장에서 12명을 사살했다. 바닷가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주민 50여 명이 심원국민학교로 연행되었다가 대부분 풀려났으나 김응섭은 해리면 동호리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상하면] 용대리 : 1951년 3월 13일 용대리 택동마을 주민과 이곳으로 피난온 공음면 두암리, 구암리, 석교리 주민들이 택동마을에서 집단살해되었다. 이날 오전 10시경 두암저수지 부근에서 총성을 울리며 토벌대가 진입하였다. 토벌대는 집집마다 수색을 하면서 집에 남아 있던 주민들에게 총을 쐈다. 마을 에 남아있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마을 앞으로 집결되었으며 곧 마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모두 엎드리게 했다. 당시 집결된 주민들은 모두 200여 명(전북도의회 실태조사는 100여 명)이 넘었다. 모여 있던 주민들 중 군인들이 긴 칼로 군인가족이라고 애원하는 전효녀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으며 4살 된 아이의 목을 자르는 것도 목격되었다. 토벌대는 칼로 계속 주민들을 내리쳤고 얼마 후 총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산 사람은 명당을 쓴 사람이니 일어서면 살려 주겠다’라고 했다. 살아있던 몇 사람이 일어나자 다시 총을 쏴 일어섰던 사람들이 다시 쓰러졌다. 이 날 희생당한 주민은 100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증언이 있으며,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희생자로 확인한 주민은 모두 37명이다.

 

[심원면] 주산리 : 1951년 3월 14일 주산리 이규련이 토벌군경을 피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심원면] 월산리 : 1951년 3월 18일 월산리 김동반이 좌치나루 부근에서 군경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참고문헌
김삼웅, <해방후 양민학살사>, 1996.
6·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 전북도의회(1994)
진실화해위원회, <고창11사단사건 보고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