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9 19:04수정 : 2015.03.20 10:06

세월에 떠밀린…‘위안부 피해’ 최고령 생존자 김복득 할머니

김복득 할머니가 18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병실에서 유동식 공급을 위해 위장과 연결한 튜브를 단 채 “되다”(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2년 사이 급격히 쇠약해지는 김복득 할머니의 모습. 왼쪽부터 2013년 3월14일, 2014년 12월14일, 2015년 2월7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상임대표(오른쪽부터)와 양노자 인권팀장이 마을 어귀에서 할머니와 만나 반가워하고 있다. 2013년 3월10일.
김복득 할머니가 병실에서 입술연지를 바르며 곱게 화장하고 있다. 2014년 7월22일.
김복득 할머니의 97살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통영 거제지역 역사동아리 청소년들이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5년 2월7일.


<한겨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최고령 생존자인 김복득(97) 할머니를 2013년 봄부터 사진에 담아왔다. 경남 통영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쓰는 한편,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으로 전재산을 기부하는 등 사회활동도 왕성하게 펼쳐왔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최근 치매와 관절염 등이 악화돼 중환자실과 일반병동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18일 경남 통영시 도산면의 한 병원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김 할머니는 죽 등 음식물을 공급하는 튜브를 착용한 채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1918년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스물두살이 되던 1939년 통영극장 앞에서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배를 탔다. 부산을 거쳐 중국에 도착한 할머니는 다롄에서 3년, 다시 필리핀으로 끌려가 4년간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는 지금 고단했던 삶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이제는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도,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는 할머니에게서 예전의 그 환한 웃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할머니를 대신해 누가 언제 물어도 한결같았던 그의 평생 소원을 전한다.


“일본이 사과하면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하겠습니더. 우리는 했다 카고(하고), 즈그는 안 했다 카고, 그게 원통해서. 일본이 사죄를 해야 죽어도 눈을 감겠습니더. 내 해원을 풀어주는 게 그게 제일 아니겠습니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우리 정부에 등록한 이는 모두 238명이었다. 그중 올해에만 벌써 두 분이 돌아가셨고, 이제

생존자는 53명이다. 인터넷 한겨레(▶김복득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에서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다.


통영/이정아 기자 lee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