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5-04-06 18:40


<한겨레>가 창간을 서두르던 1987년, 그때는 어떤 현실이었을까. 한마디로 지긋지긋한 유신잔재를 청산할 수 있는 결정적 고비였다. 보기를 하나만 들겠다. 그때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는 200여만명이 쌈불(화산)처럼 터져 나왔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유신 끝장’은 벌써 일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정치적 매듭만 남은 셈이었다. 그런데 벅찬 역사의 뒤안에서는 거꾸로 ‘광주학살의 원흉’ 노태우를 내세워 다시금 권력을 조작하려는 안팎의 끔찍한 음모가 꾸려지고 있었으니, 그 뻔한 범죄를 깨트리지 못했다. 강요된 잿더미, 그렇다 다시금 변혁의 실체인 노동자 민중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는데도 겉으로는 허탈과 한숨, 좌절과 방황이 허무주의처럼 속절없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바로 이때다. 그 허무를 뚫고 빠끔한 불빛 하나가 반짝했다. 오늘의 ‘한겨레’ 창간이 그것이다. 이제는 대중적 영향력이 엄청난 ‘한겨레’, 그 알짜(실체)는 무엇이던가. 나 나름으로 매겨 보면 한겨레 그것은 ‘엄씨’였다. ‘엄씨’라니 무슨 말일까. 그냥 씨앗이 아니다. 만년 언 땅을 뚫고 일어나는 싹이다. 아니 아무것도 뿌리내릴 수가 없을 것 같은 깎아지른 바윗덩이에 뿌리를 내리는 싹이요, 천년 가뭄으로 까칠까칠 마른 모래밭에서도 제 한숨에 서린 이슬로 눈을 뜬 싹을 일러 ‘엄씨’ 그런다.

그렇다고 해도 ‘한겨레’를 일러 제대로 된 ‘자유언론’ 그러면 됐지, 왜 ‘엄씨’라고까지 할까. 반민중적 체제에 맞서 자유언론인들이 만들었다는 것과 아울러 ‘한겨레’ 독자들과 주주들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절대다수 대중의 저항에도 다시금 유신잔재가 권력을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권력조작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거의 상상을 못할 만치 반문명적이요 반사회적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 독점 독재체제에서도 ‘한겨레’ 같은 언론이 설 수가 있었던 것은 독자 대중과 주주들의 삶과 행동이 곧 오늘의 ‘엄씨’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자유언론의 ‘버날’(영광)을 ‘한겨레’ 독자들과 주주들에게 돌려주고 그들과 함께 몸부림치고 싶은 게 있다. 원래 ‘엄씨’란 언 땅에서 제 목숨을 틔우면서 아울러 꽁꽁 언 땅을 풀고 바윗덩어리를 부수고 천년 가문 땅을 기름지게 갈아엎어 모든 목숨들이 다함께 살아가는 땅을 만들고, 나아가 모든 목숨들의 목숨을 시들게 하는 ‘띠따소리’(권력자의 명령)를 꺾어 팽개치는 ‘괏따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멍든 하늘도 일으키고, 병든 땅도 일으키고, 좌절과 절망으로 허무주의에 빠진 ‘나간이’(장애)들도 일으키는 목숨의 소리 ‘괏따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엄씨라.

여기서 나는 ‘한겨레’ 독자들과 주주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참짜 엄씨이고자 할진댄 꾸려진 신문이나 읽고 주주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오늘의 ‘한겨레’가 참말로 이 메마른 땅을 갈아엎고 모든 목숨들이 살 수 있는 ‘살곳’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가. 아니 이 멍든 하늘, 이 병든 땅에 주눅 든 이들을 일깨우는 괏따소리를 내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질 않을까. 그 괏따소리는 어떤 성현대덕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놓을 것이라곤 땀과 목숨밖에 없는 것들이 그 땀과 목숨으로 내대는 소리일 터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아무튼지 독자들과 주주들이 매일매일 ‘한겨레’를 새롭게 꾸미는 주역, 참된 ‘엄씨’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겨레’는 세상과 그 역사를 새롭게 일구는 엄청난 변혁과 진보, 창조의 언론이 되리라고 믿는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