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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굴 현장.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함안지역에서는 1950년 8월 2일부터 폭격 피해가 시작되었다. 미국폭격 당시 마을을 떠나라고는 경찰서의 경고를 받은 경우도 있었으나 주민 대부분은 폭격을 피해 자발적으로 피난해야 했다. 별도의 피난처를 정해주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주민 스스로 판단하여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1950년 8월 3일부터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 미군 폭격이 시작되어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당시 마을에 인민군은 없었으나 이 날 이후 매일 같이 폭격이 계속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폐광으로 피신했다. 식량을 구하러 나갔던 주민들이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다. 인민군은 8월 10일 또는 11일 마을에 들어왔으며 9월 15일경 후퇴했다. 미군이 들어 온 후 폐광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거제 장승포로 소개되었다.
 
군북면 원북리 주민들은 1950년 8월 2일 박격포 등 포격으로 주민들이 희생되자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폭격 피해를 당할 위험은 여전했고 결국 마을로 돌아와 근처에 있던 기차터널인 ‘어시굴’로 피신했다. ‘어시굴’은 길이 300여 미터였고 당시 수백 명의 주민들이 피신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3일 3명의 주민이 터널을 나갔다가 폭격에 희생되었다. 마을이 폭격당하는 것에 비해 터널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으나 1950년 8월 18일 폭격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바뀌게 되었다. 미군 전폭기들은 터널 안으로 로켓과 기관총 공격을 퍼부었다. 폭격은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희생자는 수백 명에 이렀는데 대부분 외지인이었으므로 구체적인 희생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다.

 

군북면 사촌리에는 1950년 8월 20일 오후 2시경 폭격이 있었다. 미군은 마을 주택을 목표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하였고 이를 피하려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 중 1명이 확인되었다.


군북면 월촌리 주민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인근 산골인 소자골 골짜기로 피난을 했다. 폭격 당시 골짜기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12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1950년 8월 19일 이 오두막을 향해 F4U 전폭기 여러 대의 폭격과 기총사격이 있었다. 2명의 희생자가 확인되었다.

 

군북면 각리의 주민들은 미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지리 남산벌판 인근 마을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0일경 마을에 남아 있으면 폭격을 당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민들과 주민들이 모두 허허벌판인 남산벌판에 모여 천막을 치고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남산벌판에 모인 피난민들은 2천명에 달했다. 1950년 8월 20일 아침 9시 첫 폭격이 시작되었다. 전폭기는 일반 폭탄을 비롯해서 네이팜탄까지 투하했으며 피난민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134명의 희생자와 57명의 부상자가 확인되었다. 방치된 시신이 많았으며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체 사망피해가 적어도 150여 명을 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인민군이 피난민 사이에 침투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난민을 고의적으로 폭격한 것으로 보았는데, 피난민이 실제 인민군 측의 방패 역할을 한 사례 또는 미군이나 군군이 피난민 때문에 공격을 주저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런 주장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군북면 박곡리에서 피난을 나가던 주민들이 1950년 8월 21일 F4U 4대에 의한 폭격과 기총사격, 장자리 방면에서 날아 온 포격으로 희생되었다. 피해사실이 확인된 희생자는 5명이었다.


1950년 8월 20일과 28일 법수면 강주리에도 미군 폭격이 있어 상당수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 중 7명이 확인되었다. 1950년 8월 30일 군북면 영운리와 하림리에 폭격이 있었다. 4대의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마을을 불태웠다. 이날 주민 21명의 피해사실이 확인되었다.

 

폭격은 9월에도 이어졌다. 9월 5일 대산면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양포나루에 모여 있던 주민들이 흰 수건을 흔들었음에도 기총사격을 가해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9월 9일 수곡리 폭격으로 4명이 희생되었으며, 9월 12일에는 군북면 사촌리에 두 번째 폭격으로 인해 8명이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