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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전수찬 지음/창비
   기사입력 2014-04-10 08:19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많은 사람들이 수치심을 인간과 짐승 사이를 구분하는 잣대로 삼는다. 역사 이래 수치를 모르는 사람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중국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ㆍ1103~1141)를 모함해 죽인 매국노 진회(秦檜ㆍ1090~1155)는 1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악비의 사당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동상으로 남아 사죄하고 있다.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인 동탁(董卓ㆍ?~192)은 200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만고의 역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한 명인 이완용(1858~1926)은 대한민국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매국노의 오명을 씻을 수 없는 처지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도 과연 수치심은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잣대로 기능하고 있을까. 전수찬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수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는 지난 2004년 ‘어느덧 일주일’로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삶의 지척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와 끊임없이 다투는 세 명의 탈북자를 등장시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도 연약한 감정인 수치를 치밀하게 파헤친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한 ‘원길’은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진 아내를 남겨둔 채 딸을 업고 돌아섰다. 이후 남한에 온 그는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 ‘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하는 ‘원길’은 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며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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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찬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수치’는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도 과연 수치심은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잣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욕망 앞에서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지는 각박한 사회상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 여기서 작가는 주인공들의 겪고 있는 내적 고통을 고도로 자본화된 한국사회, 그 안에서도 물신성이 첨예화된 사건 하나에 맞붙인다. ‘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민간인 학살범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를 두고 진실공방이 격화되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삼자로 자리한다.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사회에 팽배한 물신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반하는지 통렬하게 폭로한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정부와 지역주민, 정부를 불신하는 시위대 모두 자신의 물질적ㆍ정치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먼저 이뤄졌어야 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어느 쪽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 누가 학살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수없이 외치는 ‘영남’의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만 남길 뿐이다. 작가는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에 자신의 삶을 방기하는 주인공들의 슬픔과 번뇌를 주변인들의 태도와 대비시키며 각자의 욕망 앞에서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지는 각박한 사회상을 고발한다. 동시에 작가는 우리가 아직도 윤리를 논하고 도덕을 세우고 수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독자에게 질문한다

한기욱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의 남다른 점은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탈북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사유하고 윤리적으로 응답하려는 데 있다”며 “이런 윤리적 사유가 이야기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탈북자를 ‘받아들이면서 배제하는’ 우리 사회의 물신주의적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적 짜임새가 더러운 속옷처럼 부끄럽게 드러난다. 우리 시대 ‘윤리적 상상력’의 의미를 심문하는 역작”이라고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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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