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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46] 12.10.03 10:04l최종 업데이트 12.10.03 10:04l
 

대선후보들의 '참배 정치'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여야, 무소속 후보 가릴 것 없다. 비록 정치적 행보라고는 하나 우리 민족의 성지(聖地)를 참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응당한 일이긴 하다.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당 대선후보 확정 직후, 안철수 후보의 경우는 출마 선언 후 서울 현충원과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물론 방식은 조금 달랐다. 박근혜 후보는 서울 현충원에서 이승만-박정희-김대중 세 전직 대통령 묘소를 모두 참배했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이승만-박정희 묘소는 참배하지 않았다. 그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안철수 후보는 세 전직 대통령은 물론 박태준 전 총리(전 포스코 명예회장) 묘소까지 참배했다. 물론 여기엔 사적 인연이 작용한 듯하다.

광주 5·18국립묘지는 현재로선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만 참배했다(박근혜 후보는 앞서 2000년 5월, 2004년 3월, 5월 등 세 차례에 걸쳐 광주 5·18국립묘지를 찾은 바 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마석 모란공원 민주인사 묘역도 참배했다. 안 후보는 지난 9월 29일 의정부 일정을 마치고 귀경길에, 문 후보는 10월 2일 오전 이곳을 찾아 김근태 의원·인혁당 희생자 김용원 선생·조영래 변호사·문익환 목사·최종길 교수·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 묘역을 참배했다.

애국지사 묘역, 현충원-노무현 묘소-5·18묘역-모란공원만 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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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 선국선열과 애국지사 214분이 안장돼 있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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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각자의 견해(입장)에 따라 특정인의 묘소를 참배할 수도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곳을 먼저 찾느냐도 각 후보 진영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다만 서울 현충원을 찾은 후보들이 전직 대통령과 전몰장병 묘소에는 참배하면서 같은 경내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임정요인 묘역 포함)을 찾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연장선상에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및 3의사 묘역을 찾지 않은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서울 현충원 서편 사병묘역 바로 뒤에는 애국지사 묘역이 있다. 안철수 후보가 찾은 박태준 전 총리 묘역에서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계단 몇 개만 오르면 된다. 이곳에는 구한말 이후 광복 때까지 국내에서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14분이 모셔져 있다. 의병장 이인영 선생·신돌석 장군을 비롯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한 지청천·김경천·신팔균 선생 등이 잠들어 있다.

또,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 노인동맹단 출신으로 64세 노구를 이끌고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처단에 참여했던 우덕순 의사,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장인환 의사, 이밖에도 3·1만세 의거에 참여한 이종일·이필주·권병덕·라인협·유여대 선생 등 민족 대표와 일제말기 총독부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국한 주기철 목사 등도 이곳에 안장돼 있다.

바로 뒷편 임정요인 묘역에는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그곳에서 서거한 순국선열들의 유해를 봉환해 이곳에 모셨다. 모두 18분이 안장돼 있다. 상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외무총장 신규식 선생·국무총리 노백린 선생·의정원(현 국회의장) 의장 손정도 선생 등이 그분들이다. 모두 임시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분들이다. 연배로 보나 공적으로 보나 세 전직 대통령보다 결코 뒷자리일 수 없는 분들이다.

전직 대통령 묘역보다 광복회장을 먼저 찾는 게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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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백범 60주기를 맞아 한 무리의 꼬맹이들이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 백범 묘소를 찾아와 제각기 모양으로 꿇어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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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독립투쟁가 가운데 빠진 분이 한 분 있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 묘소는 용산구 효창원에 따로 마련돼 있다. 효창원에는 백범 이외에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한 이동녕 선생, 임정 군무부장(현 국방장관)을 지낸 조성환 선생, 임정 비서장을 지낸 차이석 선생 등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가 있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항일 성지'가 아닐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 대선후보들이 찾은 서울 현충원의 전직 대통령 묘소와 전몰장병 묘소, 그리고 광주 5·18국립묘지,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의 민주열사 묘역을 폄하해서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곳일뿐더러 어쩌면 이곳보다도 먼저 참배할 곳이 바로 애국지사 묘역과 임정요인 묘역이요, 또 효창원이라는 얘기다. 민족정기가 바로 서고 나라의 위상이 제대로 선 나라라면 대선후보들이 생존한 전직 대통령보다 먼저 광복회장을 예방하는 것이 순서일 게다(물론 광복회장의 위상이 일개 보훈처 사무관보다 못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대선후보 세 사람이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임정 묘역, 그리고 효창원의 백범 묘소와 3의사 묘역을 참배하길 권한다. 혹 관례나 전례를 운운하지 말기 바란다. 전례는 깨면 되는 것이고 누군가가 시작하면 비로소 전례가 되는 것이다(참고로 민주당 경선이 진행 중이던 지난 8·15 광복절 당시 손학규 경선후보는 백범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다). 대선후보들의 바른 역사관은 여기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