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미점령지역이었던 거제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되었다.

 

]1950년 7월 14일(또는 15일) CIC통영파견대장 강경일(康耕一)은 거제경찰서, CIC문관 등에게 거제의 갑종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을 즉시 구속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것과 거제 국민보도연맹원 260명 중 을종 악질에 해당하는 자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오후 6시 이 명령을 받은 거제경찰서는 다음날인 7월 15일(또는 16일) 각 지서 소속의 경찰관에게 통보하여 갑종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을 소집하여 구속하였으며, 7월 19일 오전 10시 사찰주임 강화봉이 중심이 되어 을종 국민보도연맹원 29명의 명단을 뽑아 CIC통영 파견대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CIC통영 파견대장 강경일은 7월 21일 오후 9시까지 을종 국민보도연맹원 29명을 구속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거제경찰서 등은 이 명령에 따라 29명의 을종 국민보도연맹원을 모두 구속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거제경찰서는 1950년 7월 24일, 소집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유치장과 창고에 가두어 놓고 심사를 하였다. 당시 거제경찰서는 평소 1개당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유치장 3개와 거제경찰서내 물품보관 창고, 장승포국민학교를 유치시설로 사용하였다.

 

「강화봉 등에 대한 군법회의 판결심사자료」에서 CIC 유기봉은 육군본부 정보국 CIC 경남지구본부 통영파견대 대장으로부터 1950년 7월 25일 오후 9시경 살해명령을 받아 장승포 앞바다에서 학살했다. 보도연맹원 72명에 대한 즉결 처분의 명령을 내려지자 거제경찰서 사찰주임 강화봉 등은 1950년 7월 26일 오후 7시 총살에 동원될 사찰계 형사들과 거제CIC분견대 대장 유기봉, 해군정보대(G-2) 부대장 박진홍, 해군정보대 대장 천재홍, 거제도 HID 윤상오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보도연맹원을 즉결처단할 것이니 각자 특히 기밀을 유지하라. 만일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처단한다”, “해군정보처 부대장 박진홍 지휘를 받아 출동하라”라고 훈시 한 후 경찰관들로 하여금 거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국민보도연맹원 72명과 청년방위대 영창에 갇혀 있던 박삼수를 경비선에 태우게 하였다. 1950년 7월 27일 새벽 1시경 일운면 지심도 앞바다 구주레끛(당시 구조라의 사투리) 해상에서 학살했다.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