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보도연맹사건은 1950년 7월 3일~5일 사이 6사단 7연대 헌병에 의해 진행되었다.

 

헌병 10여 명이 후퇴하며 충주경찰서에 들어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경찰들은 명령에 따라 동네마다 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소집된 사람들은 헌병에게 이끌려 호암동 싸리고개로 이송, 집단희생되었다. 당시 현장에서 최은용, 박종원, 최세 분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충주군 살미면에서 73명이 보도연맹으로 예비검속되어 희생됐다. 시신을 직접 수습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쐈으며 100여 구가 넘는 시신이 쌓여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김삼룡의 고향이 엄정면이었기 때문에 좌익단체 가입자도 많았고 그런 이유로 보도연맹원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