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원 5명이 1950년 7월 초 경찰에게 연행돼 옥천군 청산면 샘티재에서 사살됐다. 이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간부급으로 보이는 주민들이 7월 10일경 상촌면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장소는 상촌면 상도대리 3개 지점과 고자리 1개 지점이다.

 

1950년 7월 18일 다시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가 영동경찰서장에게 하달되었다. 1950년 7월 19일 오전, 특무대 영동파견대장 김 아무개 일등상사가 경찰서를 방문하여 전황 설명과 함께 서장에게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영동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연행 혹은 소집되어 영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8부터 20일 사이에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에서 사살되었다. 일부는 어서실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석쟁이재에서 희생되었다.

 

이후 각 면단위 청년방위대원들이 경북 경산으로 이송된 후 보도연맹원으로 색출돼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사살되었는데 최소 89명에 이른다. 또한 경북 왜관 등 피난지에서도 보도연맹원의 사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