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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10:19:45 (*.96.151.82)
6089

등록 :2015-11-08 19:25수정 :2015-11-08 22:23

[국정화, 무엇이 문제인가/연쇄 기고]
오수창 서울대 교수·한국사
자연의 풍광 앞에서 어휘의 한계를 탓해야 할 아름다운 계절에, 필자는 국가의 중요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을 짚어줄 수 없는 모국어의 빈약한 상상력에 한탄과 감탄을 함께 발한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가 우리 사회의 민주질서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 글을 시작했지만, 필자는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개념어를 찾을 수 없었다. 제목에 붙인 ‘반칙’은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지금 정부·여당은 반칙에 그치지 않고 규칙 자체를 마음대로 바꿔버린다. 도박판에서 쓰는 ‘판 뒤엎기’라는 말이 있다지만 한 나라의 국가 정책에 갖다 붙이기가 너무나 민망하여 차마 제목에 올리지 못했다.

정부·여당은 정책과 논란의 초점인 ‘국정교과서’라는 용어를 던져버리고 ‘올바른 교과서’라고 부르기로 했다. 국정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이유에서이다. 말이란 한 언어권의 구성원들이 맺은 사회적 약속이다. 더구나 국정교과서는 법률에 규정된 용어로서, 교과서에는 ‘국정’, ‘검정’ 그리고 ‘인정’ 교과서가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용어 자체를 바꿔치기하는 현상 속에 국정화 정책의 본질이 담겨 있다.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약속을 마음대로 뒤엎는 억지 앞에서,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국정화를 추진하거나 지지하는 이들은 그동안 수많은 사례에서 규칙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평소 자신들이 정체성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인사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경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다. 필요하다면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의 어느 구석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경쟁과 시장에 대한 존중을 찾을 수 있는가? 아니,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국정교과서이다. 다양한 시각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뜻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역사학자와 교사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의무이다. 이제 국가의 감독을 줄여가야 마땅한 때에, 오히려 학자와 교사들에게 주어졌던 교과서 집필과 선정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인에게 기업 활동을 못하게 하고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거나 지지한 인사들은 그러고도 앞으로 개인의 자유를 외칠 수 있을까. 이번 국정화 정책은 한국 자유민주주의론자들의 내력에 두고두고 진한 오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름 아닌 국정화 정책 그 자체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아예 규칙을 바꿔버리는 방식의 실례이다. 2013년 역사 교과서 검정제를 통해 여러 교과서들이 나왔을 때 교학사 교과서는 교육부와 여당 인사들의 온갖 반칙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부실한 내용과 난삽한 서술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곧바로 국무총리, 교육부 장관과 새누리당 인사들이 목청을 높여 역사 교과서에 대한 검정제 폐지와 국정화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교학사 교과서를 집필한 교수는 자기 텃밭인 시장과 경쟁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는데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역사 교과서의 국가 독점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때 시작된 ‘판 뒤엎기’가 올가을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지지하고 국정화를 추진하는 인사들이 자신과 상대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댄 수많은 사례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보자. 그들은 자신이 경쟁과 시장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온갖 비방과 폭력으로 뜻이 꺾였으며 그래서 국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다가 외부의 반대 속에 포기한 학교는 모두 합해봐야 10곳 남짓하며 전체의 1%가 안 된다. 무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에 국한된 사례를 들어 전체 실상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더없이 심각한 자기 진영의 폭력에는 완전히 눈을 감아 버린다. 국정화를 지지하는 단체들은 세종로 한복판 플래카드에 상대편 교수들을 ‘좌익’이라 써붙이고, 전국역사학대회가 열린 대학에 난입하여 폭력으로 행사를 방해했다. 극우단체의 저주와 폭력에 만성이 된 피해자들이 그러려니 하는 동안, 교육부와 치안당국은 국정교과서에 찬성한 교사들은 놓아두고 반대한 교사들만 처벌하는 절차에 돌입했다.

반칙을 일삼다가 그래도 불리하면 개념을 바꿔치기하고, 일방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심지어 자기 정체성까지 뿌리째 부정한다.

오수창 서울대 교수·한국사
오수창 서울대 교수·한국사
그래도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웃는 수밖에 없다. 국사학자의 90%가 좌파이고 국정화에 반대하는 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면서 ‘전쟁’을 선포한 집권세력에 맞서 학자와 시민들마저 정색한다면, 대한민국은 내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쾌하고 끈질기게 잘못을 바로잡는 운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무산되거나 머지않아 폐지될 것이다.

오수창 서울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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