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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06-19 21:29수정 :2015-06-20 11:29
문양자씨는 항상 두 장의 사진을 함께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의 증명사진과, 돌아가시기 직전 찍힌 것으로 보이는 학살현장의 사진이다.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문양자씨는 항상 두 장의 사진을 함께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의 증명사진과, 돌아가시기 직전 찍힌 것으로 보이는 학살현장의 사진이다.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두 사진과 산내학살 유족 문양자

유일하게 고개 돌린 대전 산내학살 희생자
그는 증명사진 속 인물과 과연 동일인일까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시작된 휴전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중이다. 아직 종전을 하지 못한 휴전체제이기에, 우린 아직 발발한 날(6·25)을 기준으로 전쟁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난 날을 ‘기념’하는 나라들과 우린 그래서 다르다. 끝나지 않는 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이 됐고 반공은 국시가 됐다. 누군가는 숨죽여 살아야 했고, 누군가는 ‘빨갱이 가족’이란 손가락질이 두려워 실종된 가족을 찾지 못했다. 문양자(71)씨는 한국전쟁 직후 대전형무소를 둘러싸고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57년간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문씨는 항상 두 장의 사진을 함께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의 증명사진과, 돌아가시기 직전 찍힌 것으로 보이는 학살현장의 사진이다. 문씨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두 사진을 보이며 묻는다. “아버지인 거 같지 않으냐?” 그의 간절한 표정과, 꼭 닮은 두 사람의 사진을 보며 사람들은 “그런 것 같다”고 답한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문씨는 못내 아버지가 그립다. 문씨가 기억하는,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문씨를 돌아봤던 아버지의 모습은 학살현장 속 사진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봐요, 우리 아버지 맞죠? 맞죠? 아니라고요?


▶문양자씨 아버지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계기는 사진이었습니다. 65년 전 찍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사진 속 인물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문씨의 이야기가 실린 사진 기사가 출발점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딸의 지난 시간과 딸이 몰랐던 아버지의 시간을 교차해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데 취재 중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그리움이 믿기 힘든 일을 믿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절박하고 슬픈 표정의 얼굴이 카메라를 쳐다본다. 이미 총을 맞아 입은 옷이 피로 얼룩진 것인지, 아니면 총을 맞기 위해 바닥에 엎드린 직후인지는 알 수 없다. 흑백의 사진에서 붉은색을 가늠하긴 힘들다. 사진 왼편 이자의 발을 잡은 이는 움직임 탓에 흐릿하게 찍혀 있다. 줄잡아 수십구는 될 법한 시신들이 나뒹구는 구덩이에 던져 넣으려던 참이었을까. 사진을 찍은 이는 소심했다. 한날한시에 찍은 일련의 사진들은 학살자들의 뒤편이나 먼발치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트럭에서 내려진 재소자들, 구덩이 앞에서 사격준비를 하는 군인들, 구덩이 아래로 확인사살을 하는 듯한 군인들의 모습 중 인물의 얼굴이 정면에서 드러난 사진은 오직 이 사진뿐이다. 찍던 이도 놀랐으리라. 사진 속 인물이 카메라 셔터 소리를 알아채고 일부러 고개를 돌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진을 찍던 이를 소리쳐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가 훗날 알아봐주길, 그 순간 미치도록 바랐는지 모른다. 57년 뒤 이 사진을 통해 자신을 알아본 이가 나타나리란 사실은 알 수 없었겠지만.

지난달 27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사건 희생자 유해 매장지를 찾은 문양자씨가 봉분을 쌓고 잔디를 심은 매장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시민들에게서 모금한 돈으로 1650㎡(500평) 가량의 유해매장 추정지를 임차해 너비 3m, 길이 7m 구덩이에서 20구가량의 유해를 발굴했다. 대전/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지난달 27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사건 희생자 유해 매장지를 찾은 문양자씨가 봉분을 쌓고 잔디를 심은 매장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시민들에게서 모금한 돈으로 1650㎡(500평) 가량의 유해매장 추정지를 임차해 너비 3m, 길이 7m 구덩이에서 20구가량의 유해를 발굴했다. 대전/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6900명…당시 민간인 학살 중 최대 규모


절박하고 슬픈 얼굴의 사진은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1999년 12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것이다. 사진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찍은 다른 17장의 사진과 함께 ‘한국의 정치범 처형’이란 보고문에 딸려 있었다. 이 박사가 찾기 전까지 비밀로 묶였던 것들이다. 모두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첫주 어느 날 대전 산내면 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에 파견된 밥 에드워즈 중령은 그해 9월23일 워싱턴 미 육군 정보부로 보낸 보고문에서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은 집단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중략) 서울이 함락된 뒤 북한군이 형무소 재소자들을 석방할 가능성을 막고자 수천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execution)했다”고 적었다. 중령이 미 본토로 보고문을 보낸 시점엔 이미 최대 6900명의 민간인이 골령골에서 학살된 뒤였다. 학살을 실행한 이들은 충남지구 육군특무대(CIC)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으로,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중 최대 규모였다.

공권력에 의한 학살대상은 주로 정치사상범들이었다.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27일 대전으로 피난한 이승만 정부는 다음달 14일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의 지휘권을 넘기고 다시 대구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정치사상범, 10년 이상 징역형을 받은 재소자들을 대전·충청지역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골령골에서 총살해 매장했다. 북한군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대전은 경부선, 호남선 양 철도의 분기점이었고 5개 간선도로가 방사형으로 교차되는 교통 요지였다. 정원이 1200명인 대전형무소엔 대전 이북에서 이송된 재소자까지 4000여명이 수감돼 있었고, 이 중 절반이 정치사상범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한 김아무개씨의 진술을 기록한 문서를 보면,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총을) 쐈다. 피와 골수가 튀어 바지가 엉망진창이 되면 군복을 갈아입히고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라고 했다. 구덩이에 시신이 넘치자 헌병 지휘관이 사람들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 시신들을 눌러버리게 했다”고 적혀 있다. 6월28~30일 자행된 1차 학살에서 1400명, 7월3~5일 2차 학살에선 1800명이 희생됐다. 정부가 대구로 후퇴하던 때인 7월6~17일 3차 때는 1700~3700명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차 학살 뒤 대전형무소로 새로 들어온 재소자들이었다.

3차례의 학살은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헌병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트럭으로 싣고 산내로 데려가 하루 종일 총살했다. 경찰이 외곽을 경비했고, 청년방위대와 산내 주민들이 깊이 1.5m, 길이 수십m의 구덩이를 파 시신을 묻었다. 당시 현장을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애벗 소령이 사진에 담았다. 소심한 미군 소령의 카메라에 절박하고 슬픈 얼굴이 남은 것은 2차 학살 때인 7월3~5일이었다.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건 1999년 12월의 일이지만 그로부터 7년 뒤인 2007년 사진에 찍힌 인물을 알아본 이가 나타났다. 뒤늦게 사진을 본 문양자(71)씨였다. 사단법인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의 사무실 입구에 전시돼 있던 사진 속 인물은 문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문씨는 어린 시절부터 품에 지니고 다닌 아버지의 증명사진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똑같았다. 다들 깜짝 놀라며 신기해했다. 지난달 25일 대전 오류동 유족회 사무실에서 문양자씨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친정어머니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바로 알아보셨죠. 사진 전문가도 찾아가고, 재판에 쓸지 몰라 초상화가도 찾아갔는데 다들 ‘아버지가 맞다’고 했습니다.”

문씨는 ‘드디어 아버지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눈길에 끌려간 아버지, 이후 생사도 모르고 찾아헤맸던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끌려가면서 뒤돌아본 게 기억에 남아요. 사진에서도 같은 모습이잖아요. 목을 돌려 쳐다보는. 꼭 저 모습이었어요.”

문씨는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졌다. 진실을 밝혀 억울하게 숨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야 했다. 그래야 아버지가 끌려간 그날 이후 송두리째 뒤바뀐 자신의 삶도 위로받을 것 같았다.

주검 구덩이에 던져지기 직전
엎드려 고개를 돌린 한 남성이
사진 속에서 이쪽을 쳐다본다
훗날 자신의 얼굴 알아봐주길
그 순간에 미치도록 바랐을까

사진이 처음 공개된 건 1999년
산내학살 유족 문양자는 2007년
처음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품에 지닌 실종자 아버지 사진과
너무 닮았다, 의심 여지 없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던 살점과 뼈들’


마지막으로 문씨가 본 아버지 문상국씨는 겨우 서른한살이었다. 일제 때 군청 공무원이었다가 해방 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아버지는 자주 집에 없었다. 어린 딸은 조금만 아파도 아버지 등에 업혔다. 아버지는 이따금 어린 딸을 허벅지에 앉혀놓고 “지금은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유학을 보내고 싶어했던 어린 딸은 결국 평생 학교를 일년밖에 다녀보지 못했다. 아버지 생애의 곱절을 산, 이제는 다 커버린 딸 문씨는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눈이 많이 온 1950년 겨울의 어느날 대전 가양동이었다. 문씨 가족이 살던 적산가옥의 주방에서 어머니가 막 지은 밥을 상에 올려 방으로 들여왔다. 아버지는 그해 7월 태어난 젖먹이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문씨는 일곱살이었고, 문씨와 두살 터울인 남동생은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떨어져 지냈다.

동생을 안은 아버지가 밥 한 수저를 뜨자마자 누군가 대문 밖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품에서 아기를 내려놓은 아버지가 밖으로 나섰다. 어린 문씨가 뒤를 따랐다. 경찰 제복 같은 옷을 입은 사내 셋이었다. 그들은 뭐라 할 틈도 없이 아버지의 양쪽 팔을 잡아 그대로 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문씨가 아버지를 따라가려 하자 아버지의 팔을 잡지 않은 사내가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아가, 들어가라. 집에 들어가. 낼모레 아버지 오신다.”

아버지는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인 길을 따라 세 남자에게 끌려갔다. 고개를 돌려 어린 문씨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문씨의 망막에 각인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본 아버지의 모습을 57년이 지난 2007년 어느 날 한 사진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대전 산내학살사건은 넓게 보아 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중 하나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좌익 전향자들을 통제하고 회유할 목적으로 30만명에 이르는 이들을 보도연맹원으로 조직했다가 이듬해 전쟁이 발발하자 집단 학살했다. 하지만 산내에서 숨진 이들은 문씨 아버지처럼 보도연맹원이 아닌 이들이 더 많았다. 산내학살사건은 최대 6900여명에 이를 만큼 희생자 규모가 컸기에 학살의 양상도 끔찍했다. 특파원이었던 영국의 일간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는 세 차례의 학살이 끝난 직후 골령골을 찾아 비극의 현장을 기사로 옮겼다. 그는 1950년 8월9일자 기사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에서 “7월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100명씩 트럭 37대, 3700여명이 죽었다”고 썼다. 그는 이 기사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고 보도했다.

진실화해위가 2010년 6월에 펴낸 진실규명 결정서엔, 당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내로 갔던 유족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골짜기 곳곳 겹겹이 쌓인 시신들이 심하게 부패돼 있어 가족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던 이들은 또 한번 절망하고 오열했다.

학살이 있고 난 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곤룡골이 아닌 ‘골령골’로 불렸다. 한때 시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던 골짜기는 현재 대부분 농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끊임없이 유해가 나온다. 교회 건물을 지을 때도, 신작로를 낼 때도 유해가 나왔다. 농사를 지으려 땅을 팔 때마다 유해가 비어져 나온다. ‘몸에 좋다’며 30여년간 이곳에서 유골을 캐내 팔아치운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이 최대 6900명에 이르지만, 지금껏 발굴된 유해는 수십구에 불과하다. 진실화해위가 과거 기록 등을 뒤져 267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2007년 34구의 유해를 발굴했을 뿐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만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시민들에게서 모금한 돈으로 골령골의 유해매장 추정지를 임차해 폭 3m, 길이 7m 구덩이에서 20구가량을 추가 발굴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2월23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사건 희생자 유해 매장지에서 만난 문씨가 아버지의 증명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문씨는 항상 품에 아버지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대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지난 2월23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사건 희생자 유해 매장지에서 만난 문씨가 아버지의 증명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문씨는 항상 품에 아버지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대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51년부터 추모


전쟁이 빚은 비극은 골령골에만 있지 않았다. 당시 대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남한 정부만이 아니었다. 1950년 7월21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의 인민군은 민간인과 좌익인사들을 골령골에서 살해한 가해자들과 대전·충남지역 우익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이들은 ‘인민교화소’로 바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고 인민군의 전세가 불리해진 9월 집단 처형됐다. 조선노동당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면서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 시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인민군은 9월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사흘간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수감자 중 500여명은 대전형무소 내 밭고랑과 우물 등에서 희생됐고, 600여명은 형무소 인근 용두산에서 희생됐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조사 결과 양민을 탄압·구속·살해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충남지역 우익인사 1557명이 인민군 후퇴 전 대전형무소 등에서 희생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전쟁이 발발하고 3개월 동안 대전형무소는 좌우익을 막론해 수천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참혹한 현장이었다.

두 죽음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달랐다. 1951년 12월 충남도는 ‘애국지사 합동장의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모 대상은 인민군 및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로 제한했다. 이듬해 3월 대전 용두산 기슭에 4000㎡ 규모로 전국 최초의 ‘반공애국지사총’을 설립해 1557위의 희생자 유해를 발굴·수습해 화장 후 안장했다. 1980년대엔 지사총 성역화 사업이 추진됐고 1996년 대전 사정공원으로 ‘반공애국지사총’을 이전했다. 이곳에서 해마다 현충일에 합동추모제가 거행된다. 산내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이 수십년간 숨죽이며 살았던 것과 천양지차였다. 산내사건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했고 서북청년단이나 경찰이 수시로 찾아왔다. 연좌제 탓에 말단 공직도 맡지 못했다.

문씨의 가족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내내 대전에 머물렀다. 이듬해 초 어머니가 어린 문씨를 데리고 잡혀간 아버지를 면회하러 대전형무소를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때 아는 교도관으로부터 아버지가 “이미 산내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문씨에겐 전하지 않았다. 문씨 집안의 비극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1년 3월 할머니가 식사 중에 갑자기 돌아가셨고, 8월엔 할아버지가 목을 맸다. 2대 독자인 아버지의 죽음은 부모에게 생을 포기할 만큼의 충격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남편과 시부모를 잃은 어머니는 이듬해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렸다. 어린 여동생은 어머니가 데려갔지만 남동생은 고아원에 보내졌다. 문씨도 버림받아 남의 집에서 보모 생활을 했다. 이후 문씨는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인근 도살장에서 잡은 소 다리를 넣은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새벽마다 시장까지 날랐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학교는 일년도 채 다니지 못했다.

열세살이 되던 해 문씨는 노트 만드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열일곱살이 되던 1960년 방직공장에 취직해 따로 살 곳을 얻었다. 그때부터 고아원에서 남동생을 데려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동생은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날 때마다 “아버지가 저거 타고 오면 좋겠다”고 했다. 동생도 곧 양복점 ‘시다’(보조원)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62년엔 열세살이 된 여동생도 데려와 같이 살았다. 동생들을 건사하려고 서울 영등포로, 경기 안산으로 직장과 거처를 옮겨다녔다. 스물다섯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문씨는 방직공장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두 동생의 가장 노릇을 했다.

힘이 들 때 이따금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문씨가 많이 아플 때, 여동생을 잃어버려 애타고 있을 때 아버지와 만났다. 죄수복을 입은 아버지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트럭에 탄 채 문씨에게 말없이 약을 던져주곤 했다. 그때도 문씨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했다. 왜 트럭에 타고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2002년 병으로 먼저 세상을 뜬 남동생은 아버지가 전쟁 통에 행방불명됐거나 월북했을 것으로 알고 있다. 2003년에야 아버지가 산내에서 돌아가셨단 사실을 알았다. ‘빨갱이 자식’이라며 손가락질당할 것이 두려워 이들은 수십년 동안 아버지의 행방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복 입은 이들에게 끌려가며
딸 돌아보던 31살 아버지 문상국
눈이 내리던 50년 말 겨울의 기억
사진 속의 사건은 50년 여름의 일
아버지 아닌 딴 사람이란 말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재판기록 따르면
아버지는 부역혐의 징역 10년 받고
1·4후퇴 직후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고아처럼 버려져 살아온 긴 세월
그는 그 기록을 안 믿으려 한다

문양자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찍힌 것으로 보이는 학살현장의 사진.
문양자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찍힌 것으로 보이는 학살현장의 사진.


두번의 후퇴, 두개의 학살이 있었다


진실화해위도 문씨의 아버지 문상국씨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골령골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을 받으면서 숨은 조각을 맞춰나가는데, 다른 가능성이 부각됐다. 문씨가 아버지라고 믿어온 사진 속 인물이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골령골에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쳐다본 인물은 1950년 7월초 학살됐는데, 문씨 아버지 문상국씨는 이듬해 1월 숨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보면, 문상국씨는 1950년 말께 부역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뒤 이듬해 1월14일 전후 숨졌다. 1950년 유엔군의 9·28 서울 수복 뒤 정부는 인민군에 협조한 이들을 부역 혐의로 잡아들였는데, 문씨의 아버지도 이 과정에서 수감된 것으로 보였다. 문씨가 기억하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던 그날이었다. 문씨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공출한 옷을 훔쳤다는 혐의로 1951년 1월8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문씨의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병찬이란 이가 자신의 머슴을 시켜 밀고한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38선을 넘어 압록강 연안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은 11월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공군과 인민군은 이듬해 1월4일 다시 서울을 점령했고 다시 피난길(1·4 후퇴)에 오른 남한 정부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부역 혐의자들을 골령골로 끌고 가 총살했다. 앞서 전쟁 발발 직후의 학살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1950년 9월28일부터 11월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는 1만1992명에 이르렀다. 대전형무소는 문씨 아버지와 같은 부역 혐의자들로 가득했다. 전황이 불리해진 1950년 12월말엔 서울에서 재소자 2020명이 추가로 대전형무소로 이감돼 왔다. 전쟁으로 형무소 건물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에서 재소자만 늘었다. 식량과 의약품이 태부족이었다. 일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부는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유엔 민사처의 1951년 1월31일 보고서를 보면 “1950년 12월31일부터 이듬해 1월20일까지 439명이 죽었다. 하루에 약 70명이 재판을 받았다. 대전형무소장은 의약품, 음식, 침구류의 심각한 부족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돼 있다. ‘1·4 후퇴’ 시기인 1951년 1월13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부산형무소로 대거 이감됐다. 영하 14도의 한겨울에 질병과 굶주림으로 허약해진 재소자들은 대전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문씨의 아버지도 이즈음 산내로 끌려가 숨진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가 찾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내역표’의 사망자 명부를 보면, 그는 1월14일 전후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문씨의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 서만수 전 대둔산지구토벌대장은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1951년 3월 대전형무소 최아무개 총무과장을 찾아 면회를 요청했지만 ‘문씨는 이미 산내에 간 지 오래됐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산내에 갔다는 말은 총살당했다는 말”이라고 증언했다. 정아무개 당시 대전지검 검사가 “문상국은 산내에 끌려가 죽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진술도 진실화해위는 확보했다. 대전형무소 조아무개 형무관은 “1·4 후퇴 시기엔 재소자들을 다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죄질이 나쁜 사람들을 산내에서 학살했다”고 했다.

문씨가 아버지라 믿은 인물의 사진은 애벗 소령이 한여름인 1950년 7월초에 찍은 것이었다. 문씨의 아버지는 문씨 기억대로 그해 말 겨울 눈 쌓인 길을 따라 형무소로 끌려갔다. 애벗 소령의 사진 속 인물과 문씨 아버지는 각각 1950년 7월과 1951년 1월에 숨진,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간절하게 또 묻는다 “우리 아버지 맞죠?”


지난 11일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 유족회 사무실에서 문양자씨를 만났다. 문씨는 두 사람이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진 속 이분은 아버지가 끌려가시기 몇 달 전 이미 돌아가신 분이에요, 선생님. 모르셨어요?”

“전에 ‘돌아가신 시기가 안 맞는다’ 그런 얘기를 듣긴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겨울에 돌아가셨는데 이 사진은 여름이라고. 근데 그것도 정확한 건 아니잖아요.”

“왜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게… 제가 기록을… 형사재판 기록을 떼러 다녀도 없는 거예요. 조서 기록한 게 있을 거 아녜요. 연말에 끌려가서 재판받은 지 며칠 만에 그렇게 죽일 수 있어요?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면회도 안 시켜주고.”

“기록을 믿을 수 없단 말씀이시죠?”

“우리 친정어머니가 면회 갔을 때 어머니한테 형무소 과장이 그랬대요. 산내로 갔다고. 아버지가 기자여서 아마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봤을 거라고요. 이렇게 머리 돌려서. 진실화해위 직원도 사진 보더니 ‘조사를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재판 기록이 믿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문씨가 되물었다.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사진이 찍힌 시기가 틀렸거나, 문씨의 기억이 틀렸거나, 문씨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대전형무소 사망자 명부의 기록이 틀렸거나. 하지만 그런 가능성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보아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특히 애벗 소령이 찍은 사진은, 다른 17장의 사진과 함께 한날한시에 찍은 일종의 파노라마 사진의 일부였다. 군경이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있었을 리 없다. 외모가 흡사하고, 같은 장소에서 숨졌다는 것 말고는 두 사람을 한데 묶을 만한 끈이 없었다.

“봐요. 눈썹이 짧잖아요. (남동생의 자식인) 조카와 꼭 닮았어요. 아버지가 끌려가실 때 뒤돌아보던 모습이랑 똑같아요. 아버지예요.”

문씨는 연신 사진 속 인물을 “아버지”라 했다. “아버지가 끌려간 시기가 겨울이라는 기억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 기억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1950년 7월 전쟁 발발 뒤 태어난 동생을 아버지가 안고 있던 문씨의 기억도 분명했다. 사진 속 인물은 동생이 태어나던 1950년 7월 첫주 어느날 골령골에서 숨졌다. 더더욱 아버지와 사진 속 인물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2대 독자인 문씨 아버지는 닮은 형제도 없었다.

문씨는 사진을 접하기 전까지 아버지가 숨진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문씨에게 사진 속 의문의 인물은 무려 57년 동안이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어야 했다. ‘형무소에서 골령골로 끌려와 돌아가셨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겠구나’라고 문씨는 생각한다. 그 생각이, 아버지와 닮은 의문의 인물을 아버지로 만들고 있었다. 문씨는 아직도 두 사진을 함께 넣어 다니며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우리 아버지인 거 같죠? 맞죠?”

사람들은 문씨의 간절한 표정과 꼭 닮은 두 사람의 얼굴 사진을 보며 “그런 것 같다”고 답한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말부터 문씨의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 초까지 7개월 동안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최대 75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6000여명은 국군과 경찰에 의해, 나머지는 인민군에 의해 희생됐다. 한국전쟁유족회 등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전쟁 시기 전투와 무관한 정치적 이유로 국가공권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은 최대 1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가 5년의 활동기간 동안 이 중 극히 일부인 2만620명의 죽음을 규명했을 뿐이다.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종료하며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아직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고 있다.

대전/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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