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동기icon_mail.gif 기사입력 2015/04/28 [17:50]


[편집자주] 이 글은 지난 4월 14일 (사)평화통일시민연대(상임대표. 이장희 외대 명예교수)가 주최한 제50차 평화통일전략포럼에서의 임태환목사의 발제문 “‘오늘’의 정치신학적 해석”을 요약한 것이다.
  
아, 세월호, 2014. 4. 16.
꽃 생명들이여 그래도 제발 우리 안에서 부활하소서, 새로이
우리들 안에서 부활하소서 생혈로 생기로 생령으로, 기어이 하나로
이 나라의 숨결로 약동하소서 혁생 혁명 혁진으로, 그대 꽃님들 더불어
조작사회, 거짓공화국, 야만의 나라, 짐승들의 패쟁은 가라 가라 가라 영원히!
(중 략 .......)


발표자는 먼저 자작시로 세월호사건 1주기 정국을 탄식/탄핵했다. 이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를 통해 새 개념과 문제를 제기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를 고려대 전태원 교수의 이해로 ‘오늘’을 진단했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제국은 첫째, 혼합정체의 성격으로 국제기구의 군주정, 다국적 기업의 귀족정, 비정부조직들(NGO)의 민주정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탈영토화한 제국적 주권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제국의 두 번째 특징은 이제 자본의 지배가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사람들의 삶 자체가 자본에 포섭되고 있어, “시민사회는 국가 속에 흡수되지만, 국가 속에서 저항들은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고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제국의 세 번째 특징은, 비물질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의 새로운 헤게모니 형태가 되고 있어, 새로운 정치 주체인 다중이 출현하고, 제국적 질서의 생산 그 자체가 이미 자율적인 주체의 형성, 정치 주체로서 다중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중은 ‘공통적인 것’ 곧 지식, 언어, 정서 등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사고하여, 그 결과 협력, 자율, 네트워크 형태의 조직화를 위한 견고한 기본 구성 요소를 제공하여 삶정치적 노동을 이루려 한다.

발표자는 같은 주제를 넓혀 성공회대 권진관 교수의 연구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오늘’의 정치에서 이루기 위한 ‘함께 같은 곳을 향하여 보는 태도’를 요청한다. 알랑 바디우는 신실한 주체, 반동적 주체, 애매한 주체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 역동적인 정치적 상황임을 지적한다.
 
네그리와 하트에게 다중들의 자발적 참여는 항상적이고 단단한 기초가 사회 저변 안에 강고하게 자리 잡아가는 대세적인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 혹은 힘의 형성이 중요하다.

정치적 교류의 공공적 공간은 신실한 주체들(faithful subjects)과 이들을 지켜보아 주는 제3의 세력의 활동과 언어, 이야기를 통해 확장된다. 참여(presentation, participation)와 대변(representation)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말해준다.
 
한나 아렌트는 이 주시하는 자들(spectators)이 내리는 판단이 정치적 행위자들의 성공을 결정한다 한다. 보편적인 공통성은 폭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종합적 판단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알랑 바디우가 말하는 반동적 주체들(reactive subjects)은 국가든 개인이든 사적인 관심에 몰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공통적인 관심을 나누지 않는다. 애매한 주체들(obscure subjects)들은 신실한 주체가 내건 자유와 평등의 진리가 외려 제국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공적인 것, 다른 사람들 모두를 아우른 진리,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 나타나는 것, 정치에서의 진리는 정의와 평화(정확하게 말하면 정의로운 평화)일 것인데, 그러한 진리는 사회적인 힘과 주체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공공의 영역, 혹은 공통의 세계, 공통의 공감대, 공동체적인 공감대(community sense) 등을 형성하는 것,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같은 곳을 향하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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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차 평화통일 전략포럼, '오늘'의 정치신학적 해석 © 은동기



발표자에게 한세욱 목사와 고상균 목사는 ‘오늘’의 정치현실에 예리한 비판을 시금석으로 밝힌다. 예수는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라고 하신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위험하다.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올바르기 때문에 위험하고, 세상을 파괴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헌신적이기 때문에 위험하고, 가진 자와 강한 자를 비판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와 함께 해서 위험하고, 낡은 세계와 관념을 타도해서가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현실( 하느님나라)에 예민하고 충실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성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라곤 한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에 관한 어떤 기독교적 교리의 수락이 아니라, 그 생명과의 ‘실존적 조우’(遭遇,encounter)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인간성(co-humanity)의 생탄 및 창출이라 하겠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한 순간에 불살라지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과 신앙이 괴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운동을 ‘생활신앙운동’이라고 명명한다.

역사의 슬픔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등불을 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회의 슬픔은 순종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순종의 대상이 세상의 낡은 질서인 경우다. “정의가 이익에 팔아넘겨지고, 진실이 효율에 내팽개쳐지고, 신념이 실용에 꺾여나가는 등” 사람들의 희망이 패배하면서다.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강자는 약자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 반대로 약자가 그 폭력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때 강자는 불안함에 빠지고 만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마5:38)는 비폭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폭력을 당당히 받아들여 강자로 하여금 더 이상 폭력이 지배수단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라는 저항적 메시지로 읽어내야 한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반격이다. 너를 때리는 이에게 ‘더 때려!’하고 나머지를 들이대는 것, 속옷을 강탈하는 세력에게 ‘겉옷도 먹고 떨어져라 이놈아!’라고 소리치는 것, 강제노역을 시키려는 이에게 싸늘하게 웃어주는 것. 쫄지마! 쫄지말라구!”

더하여, 황석영·안병무·공지영은 ‘오늘’의 이해에 옷깃을 여며 숭고한 접근을 하게 한다고 발표자는 강론(强論)했다. 황석영 장편소설, “바리데기”에서 주인공 바리는, ‘세상을 구원할 생명수는 있는 것일까?’ 탄식한다. 불바다, 피바다,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는 모래바다, 무쇠성, 서천의 하늘 땅 끝, 무간 팔만사천 지옥을 경험한다.(266쪽) 흑인들 백인들 황인들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시달리다 죽고, 일하다 죽고, 맞아 죽고, 터져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애달아 죽은 온 세상의 넋들이....

“얼른 대답해다오.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268쪽)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270쪽) 겉으로는 평화롭게 씻은 듯이 깨끗한 백사장, 개신교 목사, 가톨릭 사제, 힌두의 바라문, 무슬림 이맘, 불승, 유대교 랍비, 목청껏 떠들지만 서로가 남의 말을 삼켜버린다.(272쪽) 다만 그럴 뿐! 피차 관계없는 사이들! 생명과 생명 사이는 관계의 결여태일 뿐이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압둘 할아버지, 286쪽)

안병무 선생님 설교에서 “그러나 교회에는 없다. 교회에는 없다. 순교하는 놈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교회 밖에는 있다. 예수의 얼굴을 정말 그리십시오. 여러분이 망해도 예수는 살아야 하니까. (다시 말씀을 잇지 못하고 우심) 지켜야지. 세상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혼잣말을 하듯 말씀을 마무리하고 울면서 강단을 내려오심) : 남을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려 죽으신 예수가 관계의 참 생명수다.

공지영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서 “이 편지를 쓰기 전 엄마는 잠이 안와 거실로 나갔다. 겨울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서 있다가 문득 돌아보니 자그마한 성모상이 서 있었다. 성모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냥,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모성의 완성은 품었던 자식을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실에 엎디어서 엄마는 깨달았다.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신은 인간이 (신이) 있게 (그렇게) 살면 있고, 없게 (그렇게) 살면 없다. 인간이 위대한 신을 있게 살면 위대한 신이 있고, 저급하고 천박하게 신이 있도록 그 따위로 인간이 살면 저급하고 천박한 신이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한의 사제’ 같은 ‘대통령’을 ‘오늘’에서 강청하며, 그 뜻이 역사 전반에 흘러온 과정을 신의(神義)에 비겨 함께 밝혔다.

‘파토스’(pathos), 성서에서 이와 관련한 언급이 가장 빈번하다는 것이 헤셸의 증언(예언자들, 상·하)이다. 성서에서의 의미는 “마음 속 깊이 애끓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며 여기서는 이 의미로써만 적용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 ‘자연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감수성’이 결여된 자기중심적 파토스를 경계한다. 그 파토스, 그것들의 ‘하느님과 민중’ 사이의 조응관계. 그러므로 “마음 속 깊이 애끓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pathos)으로 인간을 향하여 살피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은 “마음 속 깊이 애끓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pathos)으로 탄식하는 집단(공동체)의 정황에 공명으로 호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저 사건들이며, ‘화산맥’이요 ‘합류’로 발생한다 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손상될 때, 아주 크게 손상될 때, 집합적으로 아주 크게 손상될 때, 그런 분위기가 집합적으로 형성될 때 하느님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 하느님의 사건에 동참케 하는 하느님의 형상, 그것이 일으킨 사건이 출애굽이며, 예수사건이며, 동학혁명이며, 3.1운동이며, 4.19혁명이며, 5.18운동이며, 6월항쟁이다.

하느님의 파토스는 곧 하느님의 자유이다. 하느님의 파토스는 고난에의 동참이라는 자유로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은 고난 받으실 수 있을 뿐 아니라(leidensfahig), 고난 받으시기를 자원하셨다(leidenswillig). “하늘의 이성적 ethos는 감성적 pathos 없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전인격적이시며 전주체(全主體)시다. 그분의 ethos와 pathos는 하나다. 예언자들의 마음은 온통 역사라는 현장에 가 있다. pathos, 즉 세상에 대한 관심이 곧 하느님의 기질이다.”
 
한의 사제-대통령 : 민중신학은 ‘고난의 현장’에 임하는 ‘한의 사제’를 호출한다. 우리의 대통령은 ‘고난의 현장’에 임하는 이로 자기의 자리를 정위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한없이 낮아져야, 겸양해야 한다. 저 가장 아래를 높이고 치유하고, 거기를 그들을 받들어 부양하고, 그 지경을 넓히고 두터이 하여 그 감격이 온 누리에 편만 충만케 하고, 그 기운으로 그 파토스로 넘실대게 해야 한다. 그런즉 그 이름을 민중신학적 통찰로 ‘한의 사제’라 명명하여 그 직무에 세례하고 파송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알아 ‘우리’로 초월해내고, ‘고난의 현장’이 역사의 심장임을 통각(痛覺)으로 통찰해, ‘한의 사제’로 그 직무를 다하라.


임태환[신학박사. (사)평화통일시민연대 이사,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