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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12-24 18:43
놀라운 판결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한갓 나약한 개인으로 쪼그라뜨렸으니 말이다.

<산케이신문>가토 기자와 박성수씨 재판에 공통으로 던져진 질문은 ‘대통령을 허위사실이나 저속한 표현으로 비난하면 명예훼손이 성립되느냐’였다(다른 쟁점은 제쳐두자). 가장 명쾌한 답은 ‘공적인 사안과 관련됐다면 거의 100%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사법부의 확고한 견해다. 민주사회에서는 공직자를 향해 “격렬하고 신랄하고 때론 불쾌할 정도로 날 선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혹 허위사실이 포함됐다고 해서 처벌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위축돼 숨구멍조차 막히게 된다.” 또 ‘저속한 표현’이 처벌의 기준이 된다면 “판단자의 취향에 따라” 처벌이 좌우된다. 그건 법치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공직자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를 가진 강인한 사람”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만큼 그에 따른 비판과 감시를 감내해야 한다. 그런 근기가 없다면 애초 공직을 맡을 깜냥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다른 견해를 취했다. 공직자는 공적인 존재(공인)인 동시에 사적인 존재(사인)다. 공인으로서는 비방을 감내해야 하지만, 사인으로서는 명예를 보호받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 제기가 ‘대통령 박근혜’의 명예는 훼손하지 않았지만 ‘사인 박근혜’의 명예는 훼손했다.

언뜻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결론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정반대다. 대통령이란 존재가 ‘명예를 초탈하는 강인한 공직자’에서 ‘명예라는 보호막으로 숨어드는 나약한 개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판결문에 표상된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근거 없는 공격에 눈 하나 깜짝 않고 국정에 매진할 뿐인 철의 여인’이 아니라 ‘허위 소문에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소심한 여성’이다. 이야말로 대통령 비하다.

그나마 가토 기자를 재판한 서울중앙지법은 박 대통령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줬다. ‘개인 박근혜’가 명예훼손을 당했을지라도 가토 기자가 애초 겨냥한 것은 ‘대통령 박근혜’였으므로 ‘개인 박근혜’를 비방할 의도는 없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대목에서 박 대통령은 공적인 존재로 돌아와 위엄을 되찾는다. 하지만 박성수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대구지법은 끝까지 박 대통령을 ‘개인 박근혜’로 취급했다.

결국 한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을 뿐인 박성수씨는, 그 개인이 고소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집요한 수사와 구속과 구속 연장과 추가 구속까지 당하며 8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토 기자에 대한 검찰의 항소 포기에 힌트가 있다. 검찰은 “박 대통령(개인 박근혜)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함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혔다. 사실 규명이 됐다고 처벌을 포기한다? 이는 ‘개인 박근혜’를 위해 국가의 형벌권을 동원했다는 놀라운 고백이나 다름없다. 수사기관은 심부름센터처럼 개인을 위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수사와 기소는 공익을 위해 처벌이 꼭 필요할 때만 최후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공권력이다. 굳이 처벌할 일도 아닌데 수사와 재판을 벌인다면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의 인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두 사건 수사와 재판으로 표현의 자유와 함께 대통령의 위신도 큰 상처를 받았다. 국가적 퇴행이다. 과거 한나라당 의원들이 연극을 핑계로 대통령에게 온갖 쌍욕을 퍼부은 적이 있다. 당 대표 박근혜는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아무도 처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이게 민주공화국의 풍경이다. 그때는 명예를 초탈하는 강인한 존재인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던 시대였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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