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essEngine ver.2

글 수 1,138
 

데스크승인 2012.10.10 08:15:39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news@jejusori.net

먼 이국에서 눈이나 감고 죽었을까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의 비보에 부치는 글

한 재미동포의 비보

때때로 말 한 마디나 전화 한 통화가 온 정신을 산란케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도를 닦는 도인이나 스님들은 저자를 피해 깊은 산골로 거처를 옮겨 수도생활을 한다.

오늘 아침 한 낯선 재미 동포(김수복 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하는데, 내 전화번호를 알려고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오늘 아침에야 전 오마이뉴스 정운현 편집국장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출국 전에 통화가 돼서 무척 다행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내 기사의 올드팬 독자라고 했다.

121084_134832_177.jpg
▲ 고 이도영 박사 ⓒ오마이뉴스 박도

그는 2004년 권중희 선생과 내가 오마이뉴스 누리꾼의 성금으로 백범 암살 배후를 규명하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처에 간 일 등을 상기시키며, 그때 우리 일행을 도와 준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올 봄에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지난해 가을 내가 쓴 소설 '제비꽃'을 받은 뒤 무척 좋아하며 당신이 귀국하든, 내가 미국에 가든 다시 만나고 싶다는 안부를 주고받은 지 꼭 일 년 만에 받은 운명 소식이었다. 나는 마음을 진정한 뒤 하던 일을 모두 밀치고 이 기사를 쓰고 있다. 이게 그분에 대한 최소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2003년 봄 오마이뉴스에 '항일유적답사기'라는 연재기사가 실릴 때였다. 그 기사 가운데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라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장면을 그린 기사가 나간 다음 날이었다. 나는 그 하얼빈 역 플랫폼 의거 현장을 조선족 사학자 서명훈 선생의 안내를 받았는데, 자기가 재미동포 이도영이라고 하면서, 서명훈 선생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하얼빈 거주 동포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기에 서명훈 선생의 전화를 가르쳐드린 일이 있었다.

121084_134831_177.jpg
▲ NARA에서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일대 항공사진을 펴보이는 이도영 박사 ⓒ오마이뉴스 박도

백범 암살 배후규명에 앞장서 주다

그 기사 연재 후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백범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한 권중희 선생의 기사로 천만 뜻밖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게 되었다. 그때 이도영 박사가 자청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여 우리는 그분만 믿고 미국으로 갔고,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40여 일 나라(NARA)에서 암살 배후 관련 찾았으나 이미 중요비밀문서는 관계기관에서 수거한 뒤라 진실규명에는 실패하고 돌아왔다.

나는 그때 이도영 박사를 좀 더 잘 알게 되었는데, 당신 아버지가 제주도 모슬포 소재 대정면사무소 면서기로 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8월 20일 한밤중에 군 당국에 끌려간 뒤 학살되었다고 했다. 그때의 일이 당신 평생 화두로 나중에 나라(NARA) 언저리를 맴돌게 되었다는 아픈 사연을 밤새워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분 안내로 버지니아 남쪽 도시의 노퍽(Norfolk)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도 방문할 수 있었고, 거기서 끔찍한 장면도, 한국전쟁 사진도 숱하게 수집해 올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2005년에는 내 고교시절 짝이었던 친구의 유해가 허드슨 강변 제비꽃 옆에 뿌려졌다는 소식을 이도영 박사의 주선으로 듣고 달려가 추모예배를 드리고 다시 나라(NARA)로 가서 한국전쟁 사진을 스캔해 왔다. 그때 이 박사는 내 침대 옆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유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때의 이야기가 내 작품 '제비꽃'에 거의 그대로 실렸다. 다만 작품 속에는 도영을 수영으로 고쳤을 뿐이다(여기서는 다시 도영으로 고쳤다).

121084_134830_177.jpg
▲ 백범 알살규명 조사팀의 회의장면(오른쪽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카메라를 든 이는 당시 EBS 김봉렬 PD) ⓒ 오마이뉴스 박도

1950년 8월 20일

1950년 8월 20일, 그 날은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칠월 칠석이었다. 당시 남제주군 대정면 서기였던 아버지가 한밤중에 잠을 자다가 경찰에게 불려나갔다. 한밤중에 불려나간 아버지는 그날 새벽 이미 예비 검속됐던 마을 사람 250여 명과 함께 이튿날 새벽 모슬포 주둔 아무개 부대 군인들에게 총살당한 뒤 마치 사람으로 젓갈을 담듯이 채마밭에 암매장됐다.

소년 이도영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가 몹쓸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 세월이 흘러 이도영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겨울. 눈이 내리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던 중, 눈뭉치에 맞은 하급생이 자기 담임선생에게 일렀다. 그는 교무실에 불려갔다. 그 선생은 소년 이도영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아버지 이름이 뭐냐?"
"아버지 없습니다."
"호로 새끼로구먼."

그 순간 아버지의 실체를 모르고 자라난 도영은 쇠뭉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그 일이 소년 도영의 평생을 지배할 정도로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라는 화두는 이도영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할아버지가 준 골갱이(호미)로 어머니와 보리밭 검질(김매기)을 하며 보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할아버지는 골갱이 대신 황소 한 마리와 밭가는 쟁기를 도영에게 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고된 농사일에 매달리며 살아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먹물장이보다 철저한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소년은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 뜻을 저버리고 뭍으로 나갔다.

121084_134827_177.jpg
▲ 1950. 7.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혐의 죄수들을 산골짜기로 데려가 처형하는 장면. ⓒ NARA, 눈빛출판사

연좌제 망령에 시달리다

그는 학비가 전액 면제받는 한 국립사범대학(경북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졸업했지만 신원 조회로 교사 발령이 몇 달 동안 늦어졌다. 그때부터 이도영은 연좌제라는 망령에 시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교사 발령을 받고, 4개월 남짓 교사로 근무하다가 군 입대로 휴직하게 됐다. 연좌제라는 망령은 군에서도 이도영을 괴롭혔다. 2급 비밀취급 인가가 나오지 않아 보직을 받을 수 없었다.

이도영은 제대와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1978년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수속을 밟을 때도 신원 조회에 걸려서 떠날 수가 없었다. 1년 남짓 줄다리기 하다가 한 대학 선배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국으로 떠났다. 이듬해 아내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아내 또한 번번이 출국이 좌절됐다. 그때마다 충격을 받은 아내는 그만 실성하여 식음을 전폐한 상태에서 침을 맞다가 운명했다.

1979년에 시작한 학위 공부가 1995년에 끝났다. 학위를 받고 나서 얼마 안 돼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이도영은 폐의 삼분의 일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 이도영은 하늘이 자신을 살려준다면 할아버지의 유업인 일백여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서로 엉키어 하나가 되었다는 '백조일손(百祖一孫)'사업을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건강을 회복한 이도영은 제주의 한 신설 대학에서 초빙이 와 고향에 돌아갔다.

이도영은 제주도에 가자마자 예비검속에 관한 중요한 문서를 입수하여 그 실체를 추적하는 데 착수했다. 하지만 이도영은 전임 강사 계약이 만료되자 다시 미국으로 왔다. 미국에 온 뒤, 이도영은 비로소 하늘의 뜻을 알고 아카이브에 드나들면서 본격적인 제주 4·3 사건과 예비 검속 등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에 매달렸다. 1999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비밀 해제 요청을 한 지 2개월 만에 해제된 문서 3건이 우편으로 배달됐다. 초보 심마니가 수십 년 묵은 산삼을 캐는 기분이었다.

121084_134829_177.jpg
▲ 1951. 4.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 처형장면 ⓒ NARA, 눈빛출판사

이도영의 마지막 소원

처음에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한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4·3사건이나 예비 검속으로 목숨을 잃은 피학살자 민간인들의 진상을 캐는 역사를 발굴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여태 미국 아카이브를 맴돌고 있다고 하였다.

이 일을 이도영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메릴랜드 주 스노 힐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도영의 마지막 소원은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현대사연구소를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아카이브 부근에다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이 미국에 와서 마음 놓고 자료 수집도 하고 연구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아울러'죄 없는 죄'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피학살자들의 유골이라도 추렴하여 학살 현장에다 안장시키고, 그곳에다 위령비를 세워 후세에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는'산 역사의 체험장'으로 남기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이도영의 이야기는 커튼 사이로 비친 푸르스레한 달빛과 실루엣으로 잔잔히 흘렀다. 하지만 잔잔한 그 속삭임이 때로는 흐느낌으로 변하기도 하고, 분노의 함성으로 내 귀를 두드렸다.

아버지의 학살자를 찾다

마침 이튿날은 일요일이라 이도영 박사와 나는 워싱턴 근교 세난도 국립공원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도영은 간밤에 미처 마무리 못한 얘기를 들려줬다. 이도영은 십 수 년 간 끈질긴 추적과 집념으로 마침내 당신 아버지를 학살한 당시 제주 주둔 부대의 책임자들을 찾았다.

그들 가운데는 5·16 쿠데타의 주체 세력으로, 국방장관까지 역임한 이도 있었다. 이도영이 결정적인 증거물을 들이대며 그 당시 부대 책임자로 지금은 큰 교회의 장로인 김 아무개 예비역 장군에게 추궁하자 참회는커녕,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얼버무리거나, 자기는 그런 일은 전혀 모른다며 물증조차도 부인하거나, 이미 고인이 된 일본 헌병 오장 출신의 김 아무개 장군에게 모든 걸 떠넘기면서 대면을 피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한 방송국의 협조로 5·16 군사혁명 대담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뷰를 요청하여, 그 말미에 1950년 8월 제주도에 있었던 예비검속 학살자 사건을 추궁하였다고 하면서 그 대담 녹음테이프를 틀었다.

121084_134826_175.jpg
▲ 맥아더기념관에 비치된 앨범(미 군정기간 동안 처형한 좌익연루자의 시신에서 자른 목을 상자에 담아 상급부대에 보내고자 방부처리하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총살 했나

"누구의 명령을 받고 총살집행을 하였습니까?"
"군대에서 한 일이란 뻔 하지 않아요. 이제 와서 그때 일을 들춰 뭘 하려 합니까?"
"만일 장로님 아버님이 억울하게 학살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왜 대답을 못합니까?"
"그때는 전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곳 제주는 전투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전시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아도 됩니까? 더욱이 제 아버지는 당시 면서기로 국가공무원이었습니다. 아무런 심문도 재판도 없이 한밤중에 데리고 가 그렇게 총살하고 암매장해도 됩니까?"

"군인이란 명령에 따라 행할 뿐입니다. 당신의 얘기를 듣고 보니 미안한 점도 있군요. 자, 이제 우리 악수로 지나간 과거 일을 역사의 뒤안길로 묻읍시다."
"저는 지금 장로님과 악수할 계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제주도에 있는 제 아버지 공동묘역인 백조일손에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진정으로 무릎 꿇고 사죄한다면 그때에 악수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언제 제주도에 꼭 한번 가야겠습니다. 그곳에 가자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이상의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도영은 그 이듬해 백조일손 위령제에 그 장로를 초청했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이도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121084_134828_177.jpg
▲ 나라(NARA)에서 아키비스트 보이런(중앙) 말을 듣고 있는 이도영 박사(왼편, 오른편은 재미유학생 이선옥씨) ⓒ 오마이뉴스 박도

저는 그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박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그러십니까?"
"간밤에도, 지금도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신 것만으로 고맙습니다. 제 마음에 맺힌 게 좀 내려갔습니다. 오십년 묵은 체증이 뚫린 기분입니다. 아무도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그 일에 얽매여 사느냐고 저를 압박합니다. 심지어 재혼한 제 처나 자식들까지도."

"이제 그들을 '용서'할 아량이 없습니까?"
"저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용서'가 가장 좋은 덕목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진정으로 참회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에 앞서 진실규명과 그들이 진정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쉽사리 용서해 주면 잘못을 반복시킨다'고 합니다. 해방 후 일련의 양민 학살사건들 진상이 한 번도 제대로 규명돼지지 않았고, 가해자가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5· 18 광주시민 학살과 같은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었습니다. '좋은 게 좋다' '이미 지나간 과거다'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적당히 넘긴 결과가 어떻습니까?

진실이 묻힌 결과,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 잡아들이는데 가장 악질 노릇한 헌병 오장 아들이 얼굴에 철판 깔고 오늘날 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세상 아닙니까? 이런 나라에 무슨 정의가 있겠습니까?"
"……."

간밤에 시작한 이도영의 이야기가 그제야 모두 끝났다. 그새 차는 메릴랜드 주립 대학 캠퍼스를 지나고 있었다.
"이 박사님이 먼저 그들을 '용서할 아량은 없습니까?"

"성서에도'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다의 영어는 'Forgive'인데, 저는 이를 'For me give'의 준말로, '곧 자기를 위해 용서해 주라'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도 마음속으로 지난날의 원한을 하나 둘 정리하고 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래야 여생을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말씀 마음에 잘 새기겠습니다."

- 박도 장편소설 '제비꽃'에서

121084_134833_178.jpg
▲ 맥아더기념관 앞에서(오른쪽 이도영, 왼쪽 기자) ⓒ 오마이뉴스 박도

그의 유고 '말할 수 없었던 한반도 전쟁'

나는 뒤늦은 그분의 부고에 깊이 고개 숙여 묵념을 올린 뒤, 이 기사를 써서 그분 영전에 부친다. 나는 이 기사를 쓰고자 그분의 추억을 더듬으며 서가를 뒤지는데 맥아더 기념관 앞에서 같이 찍은 사진 한 장과 그분이 나에게 출판이 가능할지 알아봐달라고 보낸 '말할 수 없었던 한반도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부제 '양민학살 진상조사보고서' 출력원고가 봉투에서 불쑥 쏟아졌다.

사실 귀국 후 이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여 봤지만 좀체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이런 책을 펴내야 제작비도 걸질 수 없다는데 어찌 출판을 강권할 수 있으랴. 언젠가 당신의 유고를 출판한 뒤 제주도 백조일손 현장으로 뉴욕의 당신 무덤으로 찾고 싶다. 하지만 나도 내 생전에 이루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도영 박사님! 이제 하늘나라 아버지 어미니 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소서.

2012. 10. 8. 박도 이 세상에서 두 번 절합니다.

<제주의소리>

<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협약에 의해 게재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118 [연대제안]중증장애인 근로지원서비스 제도개선을 위한 연대를 제안합니다!!
[관리자]
2012-03-09 11035
117 [세계의 창] 한반도 문제의 외적요소와 내적요소 / 진징이
[관리자]
2012-08-17 11041
116 게시판을 더 이상 중언부언 비판만으로 도배하지 않으려면!
[관리자]
2012-04-23 11042
115 "국가 주도 학살사건, 공소시효 없애야" / 연합뉴스
[관리자]
2012-10-31 11056
114 새책! 『9월, 도쿄의 거리에서』―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생생한 보고문학!
도서출판 갈무리
2015-09-03 11067
113 [제4회 코리아국제포럼] 프로그램 file
코리아국제포럼
2012-09-10 11114
112 극단 코끼리만보 _ 민간인학살을 다룬 연극 <말들의 무덤> file
rafy
2013-08-06 11127
111 원한을 바름으로 갚는다(以直報怨) file
以直報怨
2012-06-16 11217
110 정말 소를 키우려는 사람을 찾아!
[관리자]
2012-02-13 11222
109 日 침략전쟁 미화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충북일보
[관리자]
2012-10-10 11295
108 거제민간인희생자사건 손해배상청구소송재판결과
[관리자]
2013-01-10 11469
107 ‘서프라이즈’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코르작 이야기 공개 / 스포츠 경향
[관리자]
2014-02-24 11469
106 "'한국판 킬링필드' 다큐 <빨갱이 무덤> 도웁시다"
[관리자]
2012-07-18 11511
105 제주 4.3 사건 희생자.유족 피해자 추가 접수
[관리자]
2012-09-12 11540
104 가우크 대통령, 프라하 찾아 참회 “나치의 주민학살은 큰 잘못”
[관리자]
2012-10-12 11622
103 "광주,민중반란" 이영조, 진실위 영문책자 배포중단, '패소'하나?
[관리자]
2012-05-15 11637
102 또한번 약속 믿어 보겠다.
정명호
2012-03-08 11647
101 [교수학술단체 공동 성명서]
[관리자]
2012-03-09 11661
100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 62주기 위령제 영상 1
구자환
2012-07-11 11747
99 "양민학살, 유족들 힘이 약해 정부가 무관심" / 오마이뉴스
[관리자]
2012-11-03 11966

자유게시판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