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5-06-01 14:35수정 :2015-06-01 14:55


<한겨레>는 노동절인 지난 1일 ‘3년 전 만난 해고노동자들…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뒤 세상을 등진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 모였던 또다른 해고노동자 13명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기획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그 후속 기획으로 13명의 해고노동자들 개개인의 세밀한 삶을 글과 사진으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이 기획은 ‘다음 뉴스펀딩’을 통해서도 소개됩니다. 뉴스펀딩은 독자들의 후원을 받아 독자와 함께 기사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 생산 방식입니다.

한겨레와 다음은 뉴스펀딩을 통해 모아지는 후원금을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단체인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잡고)에 전달할 것입니다. 1만원 이상 후원해주신 분들은 해고노동자 13명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초대가수의 공연을 볼 수 있는 토크콘서트에 초청할 계획입니다.

2012년 5월 21일 경기 평택역에서 쌍용자동차희생자 추모결의대회를 마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2년 5월 21일 경기 평택역에서 쌍용자동차희생자 추모결의대회를 마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쌍용자동차는 우리 사회에서 ‘정리해고’의 대명사다. 정리해고된 지 6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도. ‘77일간의 옥쇄파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대 싸움과 해고자와 그 가족 28명의 죽음,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복직 투쟁 때문이다. 한국의 해고를 이야기할 때 쌍용차는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남오씨는 복직 싸움을 위해 생계를 접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남오씨는 복직 싸움을 위해 생계를 접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해고자 김남오(43)씨는 ‘그날’ 이후 복직 싸움을 위해 생계를 접었다. 2009년 5월22일부터 8월6일까지 노조 조합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해 경기도 쌍용차 평택 공장을 점거했을 때, 김씨도 그곳에 있었다. 그해 8월6일 공장 정문으로 걸어나오면서 “여기 더 있어야 하는데. 더 싸웠어야 하는데” 생각했던 김씨는 재정총무팀을 맡아달라는 노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하다 허리 다쳐 수술하고 나서 사무직으로 일한 적이 있었어요. 다들 볼트 조였던 형들이라 나 같은 사무직 경력이 필요했던 거였죠. 나도 가만히 앉아서가 아니라 내가 싸워서 직접 복직을 얻고 싶었고요.”


 그렇게 복직 싸움을 시작한 김씨는 여느 해고자들처럼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와 고공농성장을 지키고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 법원을 쫓아다니며 6년을 보냈다. 그러나 집회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복직에 대한 회의는 집이나 노조 사무실을 홀로 지킬 때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와이프한테 2년만 싸우면 된다고 시작했어요. 2년 지난 다음에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됐잖아요. ‘그만두겠다’는 말도 많이 했죠. 그런데 내가 그만두면 내 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복직은 마치 신기루 같아서 가까이 왔는가 싶으면 멀리 가고, 멀리 있는 가 싶으면 가까이 오기도 했다. 2014년이 그랬다. 2014년 2월 서울고법은 “정리해고는 무효”라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늘 ‘지기만’ 했던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찾아온 첫 승리였다. 그해 11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김씨는 대법원 앞에서 ‘정리해고 무효 판결’을 바라며 2000배를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리해고는 정당했다”며 서울고법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지난 2월, 해고자들은 유일한 복직 방안이 돼버린 회사와 교섭을 시작했지만 기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회사에 돌아간다는 확신 갖고 싸웠는데 대법원 판결 나오고 교섭도 늘어지면서 확신이 좀 사라진 것 같아요. 복직되면 생계, 가족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 왔는데 복직한다고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도 싶고.” 김씨가 말했다.


쌍용차 평택공장을 떠난 이덕환씨는 경기도 포천에서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일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쌍용차 평택공장을 떠난 이덕환씨는 경기도 포천에서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일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경기도 쌍용차 평택공장 앞을 떠나지 못하는 김씨와 달리 이덕환(43)씨는 경기도 포천에서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일하고 있다. 평일에는 농협 기간제 노동자로 어르신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형 가게를 돕는다. “해고되고 이것저것 일해보니 마땅한 일도 없고 취직도 잘 안 되니까 가족은 의정부에 두고 저만 고향인 포천으로 왔어요. 그나마 지금 하는 기간제 일이 그동안 했던 일 중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에요.”


 생계 탓에 이씨의 몸은 포천에 있지만 마음은 줄곧 경기도 쌍용차 평택공장을 맴돈다. 정리해고 무효소송 1심, 2심 재판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간 이유도, 노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찾은 이유도 복직의 그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꿈은 더 강해진다.


“대출받아서 집을 샀는데 해고되니까 빚을 못 갚다 보니 신용불량자가 됐어요. 지금도 카드를 못 만들어요. 돈벌이는 잘 안 되고 아이들은 커가니까, 뭐라도 더 벌려고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는 있는데…. 해고자의 삶이 그래요. 그래서 대법원 판결이 그렇게 났지만 졌다고, 아직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


2011년 12월 9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복직 등을 촉구하며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 세운 ‘희망텐트’를 평택시 공무원들이 강제 철거한 뒤, 텐트가 있던 자리에 앉아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1년 12월 9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복직 등을 촉구하며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 세운 ‘희망텐트’를 평택시 공무원들이 강제 철거한 뒤, 텐트가 있던 자리에 앉아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남오씨와 이덕환씨가 되찾고 싶은 건 경제적 여유와 행복한 가족만이 아니다. 자존감, 명예, 정당함 같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그들은 돌려받고 확인받고 싶다. “해고는 부당하니까, 내 명예를 회복하려면 복직밖에는 없어요.”(김남오) “복직을 못 놓는 이유는 제가 정리해고됐다는 걸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이덕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가 회사에 복직을 요구하는 해고자는 187명이다. 이 숫자에는 쌍용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8명이 포함돼있다. 정규직 해고자들이 정리해고 무효 소송을 벌이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쌍용차의 정규직임을 법원이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은 지난 2013년 11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원청인 쌍용차의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최근 법원은 최근 한결같이 현대차, 지엠대우 등 ‘완성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원청의 정규직’이라고 인정하는 추세다.


서맹섭씨는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서맹섭씨는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서맹섭(39)씨는 쌍용차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2000년부터 쌍용차 협력업체를 전전하며 무쏘, 로디우스 등을 만들었다. 2005년 산업자원부가 주관한 국가 품질경영대회에서 은상, 경기도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서씨는 부지런했고 손이 빨랐다. ‘조금만 하면 정규직 될 수 있다. 일만 열심히 하자’는 생각은 근거 없는 몽상이 아니었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고용과 임금이 열악하다. 쌍용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9년 쌍용차 정규직 정리해고에 앞서 2008년부터 하청업체 문을 닫는 방식으로 비정규직이 하나 둘씩 회사에서 사라졌다. 정규직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했다. 믿을 건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용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8년 10월 노조를 만들었다.


“정규직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을 비정규직이 대신 했지만, 정작 가장 먼저 쫓겨나는 건 비정규직이에요. 우리가 쫓겨나면 다음은 정규직 차례니까 비정규직 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죠.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은 ‘누구든 나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공장에서 같은 옷 입고 함께 일했는데 섭섭한 정도가 아니었죠.”


 2008년 말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에 한상균 현 민주노총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해고에 맞선 정규직·비정규직 연대가 시작됐다. 2009년 5월22일 쌍용차 노조가 공장을 걸어잠그고 해고 반대 파업 시작하기 전인 5월13일 서씨는 공장 안 굴뚝에 올랐다. 2008년 10월부터 휴업했던 협력업체는 2009년 5월17일 서씨를 해고한 상태였다. 땅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서씨는 하늘 위에서 86일을 살았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2만개의 부품을 모아 자동차를 만드는 ‘H-20000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완성된 코란도를 공개하고 있다. 코란도는 쌍용차 해고자들이 경기도 용인시의 공업사에 모여 부품을 조립해 만들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2만개의 부품을 모아 자동차를 만드는 ‘H-20000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완성된 코란도를 공개하고 있다. 코란도는 쌍용차 해고자들이 경기도 용인시의 공업사에 모여 부품을 조립해 만들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함께 싸우겠다던 쌍용차 비정규직 노동자는 6년 사이 19명에서 8명만 남았다. 네 아이의 아빠인 서맹섭씨에게도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해고자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기둥은 역시 복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서씨의 꿈은 그냥 복직이 아닌, 정규직 복직이다. 해고뿐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을 없애는 게 그의 바람이고 싸움의 이유였다.


 “주변에서 애들도 있는데 언제까지 싸울 거냐고 하죠. 하지만 제가 쌍용차의 정규직이라고 인정한 판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어요. 이제 조금만 버티면 정규직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내가 정규직으로 돌아가고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이 사라져야 우리 아이들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잖아요. 사회 전체는 당장 못 바꾸더라도, 내 회사부터 내가 바꾸고 이걸 세상에 알리는 게 제 소신이에요. 여기에 비정규직도 있다는 걸 꼭 알려주세요.”


글 김민경 기자 torani@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