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17 19:16 송고

중국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유골
중국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유골
(푸순=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주민 유골들의 모습. 일제는 1932년 9월 16일 푸순 핑딩산에서 항일유격대를 지원했다는 구실로 주민 3천여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중국 당국은 1970년부터 현장에서 유골 800여구를 수습해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4.1.17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smj@yna.co.kr

중국, '핑딩산 사건 현장' 역사교육장으로 복원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일제의 참혹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는 것입니다. 이마저도 거부하는 일본은 역사 문제에서 독일을 배워야 합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에 있는 핑딩산(平頂山) 학살기념관의 저우쉐량(周學良) 관장은 17일 중국 외교부가 초청한 외신기자 30여명 앞에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핑딩산 사건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가 1년 뒤인 1932년 9월 16일 자행한 대규모 양민 학살 사건이다.

 

당시 만주 일대의 석탄, 철광석 등 광물자원 수탈과 철도 운송의 거점이었던 푸순시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해 항일 유격대가 야간 기습을 감행하자 분노한 일본군은 주민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구실로 한 마을 주민 3천여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본군은 주민에게 사진을 찍는다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핑딩산 아래에 모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살해하고 불태운 시체를 구덩이에 파묻었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일부 주민이 이 사실을 알려 미국 언론 등에 보도되면서 사건의 참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중국 당국은 1970년 학살 현장에 대한 유해 발굴을 시작해 불에 탄 유골들을 수습했고 1972년 현장에 기념관을 세워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기념관에는 800여 구의 유골이 수습돼 유리막에 싸여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다.

 

일본 도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2002년과 2005년 이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이 제기한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당시 일본 법원은 국가가 권한을 남용해 해당 사건을 저지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권력의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배상 책임은 면해진다는 주장을 내놨다.

벽에 가득한 중국 핑딩산 학살 피해자 명단
벽에 가득한 중국 핑딩산 학살 피해자 명단
(푸순=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 학살기념관 내부의 모습. 1932년 9월 16일 일제가 학살한 주민 3천여명의 이름이 벽과 천장에 기록돼 있다. 2014.1.17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smj@yna.co.kr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전시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과거 일본이 피해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모두 정리된 사안이라고 주장해왔다.

 

지난 2009년에는 일본 의원 24명이 핑딩산 학살 생존자에게 사과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중의원 의원 10명과 참의원 의원 14명은 이 편지에서 "인간으로서, 일본 주민들이 뽑은 의원으로서 우리는 마음속 깊이 미안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저우쉐량 관장은 "당시 피살된 마을 주민 가운데 조선인은 없었다"면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학살을 저지르기 전에 마을 주민 가운데 조선인을 모두 불러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볼 때 (한일합방 이후여서) 당시 조선과 일본이 특수한 관계였기 때문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핑딩산 학살의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와 후세에 대한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저우 관장은 현장을 취재한 일본 기자들에게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일본 국민에게 전해달라"면서 "이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특히 2차 대전 A급 전범에 대한 참배는 우리 인류를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sm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