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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4-10 19:05수정 :2015-04-11 14:59

 

첫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후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가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내 관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어색해 미치겠으니 빨리 끝내 달라”며 사진기자를 독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 (하)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중정에서 원하는 노래 안 만들어 영창으로

-사무실에 기타가 안 보인다. 기타 안 치시나?

“미쳤어?”

그가 짐짓 퉁명스럽게 질문을 걷어냈다. 다시 둘러보아도 기타나 키보드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기타도 없고, 노래도 안 만드시고….

“학전 열고 지금까지 해온 (뮤지컬 번안곡) 작업들이 다 노래하고 관련된 건데 뭐.”

-왜 대중가요는 더 이상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으시나? 다방 같은 데서라도 당신 노래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간다는 일화가 있던데. 노래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단 말이야.”

-당신 노래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에겐 각별한 추억이 담긴 곡들이다.

“다시 ‘쟁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쟁이는 어제 했던 작업을 부정해야 해. 안 그러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꼭 그래야 하나? 화가 중에도 물방울이나 꽃 그림만 연작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 판소리 오래 하시는 분 중에도 주요 레퍼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도 있지만 난 그런 데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아. 계속 더 찾아보고 싶어, 새로운 걸.”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것 아닌가?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그렇게 살았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기타 싱어송 라이터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71년 이후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김영동, 이애주, 김석만 등을 만나면서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1974. 대본 김민기)를 만들었고 78년에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곡, 제작했다. 90년에는 상업적 음악유통망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민족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발굴 수집하는 <겨레의 노래>(주최 한겨레신문) 사업을 감독했고 91년 학전 설립 이후에는 록 오페라, 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음악적인 실험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그의 삶이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저항가요의 상징이 된 것은 그걸 지은 사람이 김민기였기 때문이고, 김민기 스스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깨치고 나가”는 삶이 무언지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2년 그의 앨범이 압수되고 그의 노래가 금지되었을 때 김민기의 나이 고작 이십대 초반,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였다.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통기타 친구들은 주류 문화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던 “미대 형”이 선택한 길은 그러나 무대도, 화단(畵壇)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김민기는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71년에 음반을 낼 때는 전업가수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 아닌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하려고 했어. 근데 그 71년 판이 압수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학벌 좋고 인맥 좋아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소시민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텐데.

“소시민적으로 살았지.”

-교사자격증도 있었지 않나? 정보기관에 찍혀서 취직이 어렵다 해도 미술학원 강사나 반주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래 만들어라’ 했을 때 내가 응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길로 풀렸을 거야. 당시에 난 제법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이 있다.”

74년 카투사로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75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나게 된다. 중정의 학원 담당이라는 자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노래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들면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 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압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식구생각’이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식구생각’, 1975년 작)

-중정요원이 황당했겠다!

“군대에 있는데 내가 뭐 거부를 할 수 있나? 만들라 하니 만든 거지. 근데 아무리 걔들이 요구해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그거밖에 안 되는데 어쩌라고?”

김민기는 곧바로 사단 영창에 보내졌고 최전방부대로 재배치되었다. 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가 취직한 곳은 부평의 한 봉제 공장이었다. 동료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고, 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때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호 얘기 무지 하고 싶지만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아니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
누군가 세월호 영화 주제가 요청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 쓰라 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노래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런데 조사만 받고 구속이 안 되었다.

“어차피 완전 포획돼 있는데 차라리 날 좀 구속해줬으면 좋겠더라구. 근데 나도 나중에 안 거지만, ‘저 새끼 잡아 놓으면 영웅 된다’고, 그래 가지고 안 잡아넣고 고사(枯死)시킬 작정을 한 거야. ‘좋다. 니들이 나를 밑바닥이라 하니 그럼 난 내가 좋아하는 밑바닥으로 들어갈게’ 그렇게 맘먹고 전라도에서부터 (농사일을) 시작한 거지.”

김민기는 고향인 익산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배우다가 김제를 거쳐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천평 쌀농사를 지었다. 마을의 청년들과 합세해서 거기서 생산된 쌀을 도농직거래로 팔아 마을기금으로 쓰기도 했다. 시인 황명걸은 당시 김민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친구, 쌀장수 김민기/ 영롱한 아침이슬 잔뜩 구두에 묻히고서/ 그가 오고 있다…”(‘쌀장수 김민기’ 중에서 1984)

-10·26이 나고 유신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계속 농사만 지었다. ‘이제 좀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해지겠구나’ 다시 음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아예 농촌 내려갈 때 노래를 잊어버리려고 했지. 아침에 무슨 노래 하나 생각나서 하루 종일 따라붙으면 짜증나잖아. 그런 게 난 얼마나 많았겠어? 기타를 치는 사람, 현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 끝이 무지하게 귀해. 그런데 농사를 딱 시작하는 순간 이게 다 망가지는 거지. 그렇게 지워 버리려고 하다 보니까 지워지더라고 노래에 대한 기억이.”

-김제에서 농사지을 때 5·18이 일어났다. 들불야학이나 광주의 문화운동패하고도 평소에 교분이 있었다고 하던데, 광주항쟁에 대한 노래나 공연물을 만든 건 없다.

“없지.”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두가지 다…. 왜냐면,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 세월호 아이들에 대해서 노래를 못 만드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더 기억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자꾸 세월호 얘기를 물어서 죄송한데….

“세월호 얘기, 난 무지하게 많이 하고 싶어.”

-세월호가 우리 밑바닥을 다 드러낸 사건이었지 않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효용으로 환산한 우리의 밑바닥. 이런 셈법으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똑같은 생각이다. 세월호 이후에 어떤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보고 주제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야! 나 박정희가 시켜도 나 그런 거 안 했어. 왜 니들이 날 시켜?’ 그래놓고는 안쓰러워서 내가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라는 노래가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는 그 노래!

“거기가 북평이었는데 지금은 동해시인가? 그때 난 고3이었는데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랑 야영을 갔다가 후배 하나가 죽었어. 그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걸 노래로 만든 거야.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 1절하고 2절 가사가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고. 1절의 가사는 ‘검푸른 바닷가에…’ 어쩌고 서정적으로 가다가 2절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이렇게 나간다고. 그 1절하고 2절의 간극이 뭐였냐면… 그 집행부 새끼들! 다 어른들이지.

너무 억울했어. 내가 만약에 후배 집으로 연락하러 오지 않았다면 난 그 어른들하고 붙들고 싸웠을 거야. 그 당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강재훈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처럼 이렇게 찍은 거야. 그걸 제품이라고 만든 게 아냐.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 거지.”

-다른 사람들 회고에 따르면, ‘김민기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명곡 한 곡을 써내는 천재’라고 하던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원주로 공연 가는 버스 안에서 지었고, 술자리에서, 결혼 축가로 즉석에서 곡을 뽑아내는….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구술을 하는 거지. 실제 작업하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지가 않다고. 원래 그런 게 속에 있었으니까 긴 시간 숙성이 되가지고 나오는 거지, 라면 300원에 사듯이 그렇게 되는 게 창작이 아니잖아.”


허문도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간다”며 거절

그는 노래가 군중을 각성시키거나 일깨우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래로 군중을 기만하는 건 더 큰 죄라고 여겼다. 광주학살로 집권한 5공화국 신군부는 1981년 ‘국풍81’이란 대형 문화축제를 기획했다. 훗날 공개된 정부 기밀문서에는 “학원문제를 국풍으로 유도해 축제 속에 매몰시킨다”는 국풍81의 목적이 전두환, 허문도의 친필서명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문도를 직접 만나셨나?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아, 그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고 했지.”

그에게 “왜 받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 유혹을 물리친 사람한테나 적절한 질문이다. 김민기에겐 애당초 받을 이유가 없었을 뿐, 받지 않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80년대는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전두환 독재에 대항해서 시국선언이나 서명운동을 맹렬히 벌이던 때다. 70년대 당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들이 그 핵심에 있었는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활동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난 민예총에도 가입 안 했어.”

-왜 안 하셨나?

“그분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현실 참여의 문법이 다른 거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거야. 누군가는 그러지. ‘넌 사람들이 말하는 스타의 자질도 있는데 왜 안 하냐? 너 잘난 척하는 거냐?’ 근데 그런 게 아니라니깐. 나는 한없이 힘들게 내 일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들이 아티스트를 인정해준다면, 샤갈의 그림 한 폭에 모든 우주의 얘기가 다 들어 있는 거야. 그 그림에 정치건 뭐건 다 있다고. 근데 왜! 난… 억울한 거지. 아이쿠, 내 목소리가 이상해졌네. 허허.”

김민기는 이 대목에서 격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도 80년대는 쓰라린 기억인 듯했다.

-1984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제작 발매해서 노래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런데 그 후 노래운동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노래라는 게 ‘말’(言)하고 ‘음’(音)하고의 조합인데, 그 조합관계에서 난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가 많다고. 근데 어떤 애들은 그걸 뛰어넘어서 다 해결한 것처럼 군다 말이야. 한자말이거나 관제화된 말을 막 쓰면서 거기다 음악을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김민기 음악은 70년대 통기타 음악하고도 다르고, 80년대 노래운동 계열하고도 다른, 단독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건 아니고… 난 미술을 한 사람인데,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고. 에잇… 이제 (인터뷰어의) 고문 취조가 막바지까지 가네.(웃음)”

극단 학전 사무실 한편의 풍경. 김민기 대표가 사용하는 책상과 책상 밑에 이동식으로 마련된 침대가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하 2㎞ 막장에서 만난 것

사람들 뇌리 속에 김민기는 저항가요의 전설이었지만 그는 사실 투쟁가를 목청 높이 외쳐 부르게 하는 전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부를 때나 탁자가 부서져라 군창을 할 때에도,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를 수리해서 땅을 일구고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충청도 탄광에 가서 광부 일을 하거나 목포 앞 김 양식장에 가서 일당 잡부를 하기도 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농사를 짓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한 글을 읽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농사도 그렇고 탄광도 그렇고 모든 게 배움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내 식으로 속담을 만들었어. ‘사람은 웬만해선 안 죽는다’고. 내가 지하 2킬로미터 탄광에 들어가서 뭘 봤는지 알아?”

-뭘 보셨나?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감을 못 잡을 거야. 지하 2킬로라는 막장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연탄가루 같은 게 기다리고 있질 않아.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들만 있을 뿐이야. 광부들이 삽을 들고 퍼내는 식으로 묘사하는 그림이나 영화는 다 가짜라구. 까만 1톤 탄차가 기다리고 있으면, 거기서부터 (머리 위를 가리키며) 대각선 위로 뚫고 올라가는 거야. 그걸 폭파시켜서 탄차에 쏟아 넣는다고. 들어가지고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런 줄 몰랐다.

“긴 다이너마이트 줄에다가 불을 붙여놓고 이~만큼 떨어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지. 불빛이라곤 깐데라(칸테라: 광부 안전모에 달린 휴대용 전등) 불빛밖에는 없어.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멀리서 ‘음~’ 하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서 10센티까지밖에 안 보여.”

-폭발하는데 깜깜해진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상상이 안 되는 거지. 뭐가 보인다는 건, 피사체가 있고 발광체가 있어야 할 것 아냐. 근데 먼지가 쫙 몰려오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지. 근데, 어느 날, (코앞을 가리키며) 먼지가 서서히 걷히는데 딱 여기에 나비가 딱 나타난 거야. 어마어마하게 큰 나비가.”

-지하 2킬로 깊이의 갱도에? 환상이 아니고?

“가만히 보니 그게 나비가 아니라 모기야. 나비만큼 엄청 큰 모기. 광부들이 ‘동바리’(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괴는 나무기둥)를 하나씩 메고 들어가는데, 그 목재에 알로 묻어 들어온 놈이 거기서 부화를 한 거지. 빛을 못 봤으니까 이놈이 길어진 거고. 내 눈에 나비처럼 보일 만큼. 그때 코앞의 그놈한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나?

“너, 더 살 수 있을래?”

지하 막장 깊은 곳 어둠에서 만난 모기 한 마리에게 건넨 반가운 인사. “너 더 살아주겠니?”라는 그의 말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김민기 자신과 막장 인생들에게 건네는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말이 아니었을까. 너, 더, 살 수, 있을래?

“나 더 얘기해도 돼?”

가만히 생각에만 잠겨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물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가지고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는데 내 신분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무슨 북한 간첩이라고, 나쁜 자식들! 그래서 간 데가 목포에서 배로 네 시간 떨어진 하의도인데 김 양식장에 가서 품팔이를 했어. 김은 한겨울에 만월이 되었을 때 배가 떠야 뜯을 수 있지. 난 농사지으면서도 달력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못했는데, 바닷물이라는 게 그렇더라구. 잔잔한 겨울 바다에 대보름달이 떠 있고 거기 배를 타고 들어가. 처음엔 무서웠지. 손이 들어가면 너무 차가울까봐. 근데 딱 들어가니까 물이 따뜻한 거야. 쿨렁쿨렁하는 배 위에서 빨랫줄같이 걸린 것들을 (아래를 보며) 이렇게 건져내야 해.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얘길….”

-보는 각도에 대한 얘기?

“맞다, 그 얘기! 미술이건 예술이건 중요한 건 ‘시각의 변화’야. 수평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대각선 위를 앙각으로 보기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내가 아동극에 자꾸 매달리는 것도 같은 이유야. 세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까.”

선문답 같은 그의 얘기는 탄광의 모기에서, 겨울 바다의 김 따기,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김민기에게는 소년의 순수와 노년의 달관이 공존한다. 20대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부드러웠고 60대의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정직하다. 변한 것은 김민기가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편협하게 굳어져 간 시선의 각도이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요
다시 ‘쟁이’ 얘길 하자면
쟁이는 어제의 작업 부정해야 해
안 그럼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쉼표’가 아니라 ‘숨표’야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1/16은 15/16랑 등가라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야
아, 근데 말이 길다, 취했네”


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2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무명 무실 무감한 인생, 지녀볼래

세월이 흘렀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아이엠에프(IMF) 공익광고에서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빛내주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던 방송 장면에 깔렸으며, ‘내 나라 내 겨레’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불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같은 노래가 2009년 시청 앞 노제에서 양희은의 노래로 그의 영전에 헌사 되었다.

김민기와 함께했던 통기타 가수들은 중간중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쎄시봉의 추억담을 전해 줬고, 그와 함께 문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다수는 정계에서 대학에서 각종 문화예술단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의도 밤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이 들고 남을 거듭하는 중에도 김민기는 그저 울렁이는 쪽배에 올라 보름달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한결같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 데고 찔린 자국이 흠집으로 남아서 오래된 고향집 흙집처럼 파이고 쓸렸다. 그래도 한참을 잊고 달리다 돌아본 자리, 거기 그대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그런 거 없어. 날 고문한 놈들한테 내가 미안하다 생각 들었던 것, 그게 분기점이었던 것 같애. 뭐, 함께하자고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으로, 정계로 떠나갈 때는 좀 선선하긴 했지. 나 혼자 남겨놓고 월급 받으러 가는구나 싶어서….(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요즘은 안 보고 산 지 좀 되었지만 4년 전인가 (김)지하 형이 박경리씨 <토지>를 뮤지컬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적단 말이야. 상황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걸 다른 장르로 넘기는 순간 그 작가의 필력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디오북’인데, 원작을 가장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지.”

-그 뒤로 진척이 없나?

“더 진행하지 못했는데. 이거 할 수 있는 데가 학전밖에는 없거든.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명이 넘는데. 비록 학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신세지만 그동안 돈 안 되는 거 알면서 같이 일해 왔던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최상일이라고 십년 넘게 노동요를 채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노래들을 거기 집어넣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거기에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그런 대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텐데.

“학전 초기에 더러 친구들이 굉장히 진화된 방법인 양 ‘주식회사를 왜 안 만드냐?’고 그러던데, 주식회사를 만들면 주주들한테 배당이 가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은 후원회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걸 마구잡이로 하면… 좀 자존심 상하지. 회원 가입하면 얼마 디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으면.”

-이건 어떤가? ‘돈 안 되는 일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줄, 철없는 사람들’ 구함!

“그거야 뭐….(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은 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아,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김민기와 헤어져 돌아오는 대학로 골목에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날렸다. 지난 몇 주 내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다시 입가에 맴돌았다. 한대수가 지은 곡을 그가 불러 1집에 넣은 노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김민기 노래 ‘바람과 나’ 1971)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 (상)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85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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