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5 19:22수정 : 2013.08.0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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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앞둔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지난달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식인들의 지적 천박성과 곡필아세가 우리 사회를 낙오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정년퇴임 앞둔 역사학자 안병욱 교수

안병욱(65) 가톨릭대 교수(한국근현대사)가 이번 달로 정년퇴임을 한다.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시대를 마감한 ‘87년체제’의 한 축을 이뤘던 현실참여형 진보적 학자의 한 전형일 수 있는 안 교수. 지난달 말 부천 캠퍼스 교수 연구실에서 그는 전남 화순에서 나서 광주일고,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대학교단에 선 1981년 이후 30여 년의 세월을 찬찬히 되돌아 보며 자부심과 함께 아쉬움도 토로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매한 현실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세력들에 대한 변함없는 경계와 냉소, 때로는 불편과 분노를 표시했다. 3일 전화통화에서는 국정원 대선개입과 서해 북방한계선(NLL)논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꼭 기록해서 후세에 남겨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첫 번째가 사이비 지식인들의 요설과 곡필, 혹세무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작업과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퇴임 이후의 소임으로 삼겠다는 뜻을 완곡하게나마 밝혔다. “편견과 왜곡 투성이의 질식할 듯한 지금 현실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선 안 된다”고도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에 참여하면서 ‘과거사 진상조사 전문가’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2000년에 창당된 민주노동당의 강령제정위원장으로서 창당 전 1년간의 물밑작업을 총지휘하기도 했다. 안 교수의 퇴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몇 개월의 시차를 둔 서중석·유홍준 교수 등 1948년생 동문 동기들의 퇴임과 함께 어쩌면 저물어가고 있는 한 시대의 또다른 풍경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할 일 많은 그들은 영원한 현역일 수밖에 없다.

인터뷰/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안 교수 연구실에는 서가들이 몇 줄로 늘어서 있었다. 책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 중에서 한 권을 빼어들었다. <중조,중소,중몽 유관조약, 협정, 의정서 휘편>이라는 제목 밑에 ‘기밀문건, 주의보존’이라는 글이 박혀 있었다. 길림성 혁명위원회 외사판공실이 1974년 6월에 편찬한 책인데, 몇 장 넘기니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호합작 호조조약’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제7조에 1961년 김일성과 저우언라이가 전권대표로 서명하고 이듬해 9월10일 각각 비준, 발효됐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왕 책 얘기가 나왔으니 이 책 얘기부터 하자. 중국 연변 고서점에서 산 책이다. 북과 중국이 백두산과 천지의 경계를 어떻게 획정했는지를 보여주는 공식 문서다. 그런데 국내에선 내가 이 책을 입수하기 전까지 그 조약집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70년대에 국내 언론들은 북한이 백두산 일대의 우리 영토를 6.25전쟁 참전 대가로 중국에 넘겨주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아무도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이 책을 통해 북-중 국경선이 숙종 때의 백두산 정계비 지역 윗쪽으로 끌어올려 획정되었고 천지의 절반 이상을 우리 영토로 확보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약문 지명 표기도 중국식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 천지 등으로 명기했다. 보수신문 보도와는 크게 달랐다. 중국은 주변 국가들과의 국경문제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게는 예외적으로 크게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입수했나.

“2000년 9월 일간지가 주관한 압록강~두만강 국경답사를 했다. 그때 북-중 국경조약 자료를 찾아봤더니 아무것도 없고 관련 연구도 없어 놀랐다. 그때는 그게 비공개 문건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답사 뒤 가 본 연변 헌책방에 바로 이 책이 있었다. 전율을 느꼈다. 내겐 기적같은 일이었다. 15위안을 불렀는데 10위안(당시 1500원 정도)으로 깎아 얼른 주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뒤 정부기관, 연구자, 도서관 등에 복사해서 나누어줬다. 심지어 베이징대학 관계자도 나한테서 복사본을 얻어갔다.  

-강의는 언제 끝났나. 고별강연은?

“6월 중순에 종강했다. 한국현대사, 북한사,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 대학원 강의 등을 담당했다. 한 학기에 3과목씩 일년마다 모두 6과목 강의했다. 고별강연 같은 것 하지 않았다. 교수 초년시절, 정년·회갑 기념논총 같은 거 만드는 걸 봉건유습이라 비판하며 장차 그런 것 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나.”

-한국역사연구회 후학들이 한 번 모셨다는데.

“그냥 저녁이나 함께 먹자고 해 갔다가 간단한 회고담을 늘어놓은 적은 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6월항쟁 뒤인 1988년 신진 진보학자들을 조직해 창립했는데,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첫 상임대표도 맡았다.”

국정원 과거사위 참여때
사과와 용서, 화해 기대했다
그런데 가해자는 큰소리 치고
보수언론이 진실 덮어버려

-왜 역사를 전공했나?

“이과나 상대는 싫고 문과인데 문학적 재질은 없고 정치는 싫고, 그래서 역사학과로 갔다. 3선개헌 반대시위에 나갔는데, 그때 바로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찍혔는지 곧 학내 문제를 핑계로 1년 유기정학을 받았다. 2학년이라 봐준 거라고 했는데, 등록금 내면서 정학당하는 거다. 폼도 안 나고 돈은 돈대로 내고, 최악이었다. 곧 강제입영당했다가 3년 뒤 유신체제하에서 복교했다. 긴급조치 4호로 감옥 구경도 했다.

입학 8년만인 1976년 초 졸업했는데, 그때 막 대학원 붐이 일었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이 대학에서 사람을 쓰기 시작한 때다. 석사학위도 미처 받기 전에 가톨릭대 요청으로 입도선매 식으로 1981년에 자리를 얻어 32년 6개월째 지키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의문사위는 2000~2002년에 위원을 맡았고 , 국정원 발전위는 2004~2007년 민간 참여자쪽 간사를 맡았다가 위원장 궐석으로 그 자리를 서너달 맡은 적이 있다. 진실화해위는 2007~2009년 위원장으로 있었다.”

-어떻게 맡게 됐나?

“역사학자로 과거청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1995년 전두환 구속처벌 운동 때 참여했다가 이런 저런 일에 불려 다녔다. 진실화해위는 위원장 임기교체기에 후임 위원장을 구하지 못하자 나에게 억지로 떠 맡겼다.”  

-성과나 의미를 평가한다면.

“의문사위는 해방 직후 반민특위 이후 처음 만들어진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다. 과거사위는 1970년대부터 중남미 군사독재정권들이 무너진 뒤 그 뒤처리를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만델라의 남아공에서 그 가치가 확인돼 세계적 추세가 됐다. 한시적이고 비사법적인 이들 기구는 법률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 합리적 논의를 통한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 평화적 방법으로 역사전환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근본 취지는 철저한 진실규명을 전제로 국가와 가해자가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피해자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해자들이 더 큰소리치는 나라다. 자신들이 오히려 ‘우리가 대한민국을 지켜냈다’고 주장한다. 보수언론들의 농간과 횡포도 큰 장애물이었다. 진실규명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겠다는 철학적 고민까지 했다.”

-얼마 전에 독일을 다녀왔는데,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독일과 우리를 비교한다면?

“독일도 일반인들의 관심이 약하다는 점에선 같다. 다만 자라는 세대가 기성세대들에게 나치 히틀러 때 무슨 짓을 했는지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한다. 이건 교육의 힘이다. 68혁명을 통해서도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지식인, 지성인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문제제기를 하면, 그게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일 때 언론들이 이를 확산시켜 올바른 방향으로 여론을 모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다. 아래로부터 문제제기가 이뤄지더라도 이를 확산시키는 게 아니라 보수 언론들이 왜곡하고 덮어서 죽여버린다.”

-지적 풍토에 차이가 있는 건가?

“유럽은 계몽시대 이래 오랜 근대의 전통 속에서 이성과 상식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우리도 조선 이래의 지적 전통이 있었으나 일제시대와 해방, 6.25전쟁 등을 거치고, 권위주의 통치까지 겹치면서 합리와 이성의 토대가 거의 붕괴됐다. 그 틈에 이익집단이 된 보수우익이 공적 영역을 사적으로 장악하고 지적 폭력을 휘둘렀다. 친일 기득권세력은 외세와 자본, 권력의 부패구조 속에서 확고한 지배영역을 구축했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지적 풍토의 황폐화를 피할 수 없다. 천박한 지적 풍토,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남북이 마찬가지다. 북은 기형적인 남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남 또한 시대착오적인 북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서 전면적 대결이 아닌 적당한 수준의 긴장과 갈등을 유지하며 적대적 공존을 꾀한다. 외세도 그걸 바라는 것 같다. 식자층들조차 너무 당연시하는 이런 풍토를 몇 세대 뒤 되돌아본다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결국 분단체제가 문제다. 김·노 정부 때 분단 기득권이 흔들리자 저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떠들었고 이명박 정권 이후 그것을 재구축하고 있다.”

NLL 건드려 선거 이용하고
남북 긴장 다시 쌓는 세력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어
꼭 기록해 후세에 남길 거다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과 서해 북방한계선 논란이 거세다.

“권위주의 정권 때는 북방한계선을 섣불리 건드리지 말자는 게 기본 정책방향이었다. 그 뒤 김·노 정권이 들어서자 보수우익의 공격이 시작됐다. 의도적으로 그 신경줄을 건드림으로써 불안 요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은 더 나아가 그걸 부추겨서 선거공작 등에 극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게 10·4 공동선언에서 북방한계선에 관한 현실적이고 적절한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기득권세력은 그게 실현되면 자신들 존립근거가 무너진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들 중 일부는 홍위병적 정신구조, 탈레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맹동주의자들이다. 구성원 전체의 장기적 이익이 아니라 눈앞의 자기이익만 생각하면서 폭력적인 대중선동을 일삼는 경직된 하루살이 정치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공부한다면 고고학을 해보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현실제약 없는 고대사 연구가 좋아보였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1970~80년대는 낭만적이지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도 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그 시절엔 근현대사 연구는 기피영역이었다. ‘1798년 정조 말기 사회문제’가 그나마 다룰 수 있는 최근세 연구테마였다. 전임이 된 뒤 ‘1863년 철종조의 농민항쟁’, ‘동학 농민전쟁’ 등에 대한 논문을 썼다. 모두 고통받던 지방민들에 관한 상소문·암행어사보고·지방 수령들의 건의문 등을 분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조선 후기 이후 아래로부터 시작된 저항, 농민항쟁사, 운동사, 전쟁, 민주화, 시민항쟁을 줄곧 다뤘다. 그런 연구를 통해 사회변동의 동력이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하는지에 매달려 왔다고 할 수 있다.

1985년 1학기 때 한국현대사 강좌를 개설했다. 우리나라 대학 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 강좌를 정식과목으로 개설한 건 그게 처음일 것이다.”

-민노당 강령제정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

“1999년 당시 권영길 창당준비위원장 요청으로 그걸 맡아 40여 명의 위원들과 함께 작업했다. 2000년 민노당 창당은 노동자 투쟁의 총결산이자 지식층과 진보세력의 총결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강령에 관심이 무척 컸고 여러 논쟁적인 정파가 대립했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노당 강령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사회가 지향할 이념적 지표요 이상이라는 의미를 지녀야 했다. 한국지성사에서도 나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이를 보람있게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