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30 19:45수정 : 2014.12.30 22:33

[올해의 인물로 본 2014] 그래도 희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2014년 8월16일 교황님의 광화문 시복식 때 수십만 인파를 멀리 원인터내셔널 옥상에서 지켜만 봤던 장그래라고 합니다. 뒤늦게 사회에 나와 계약직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복사하랴, 미션과제로 양말 팔러 다니랴, 계약 현장 뛰어다니랴 주말도 없었던 여름이었습니다. 그래도 신문이나 방송이 전하던 교황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겐 아직도 생생합니다.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고 퇴사한 한 선배가 말했더군요. 저 또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했습니다. 입사 전엔 냉동차량에 들어가 밤늦도록 꼴뚜기를 골라냈고요, 상사가 던져준 무역용어사전을 통째 외우기도 했지요.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웹툰과 출판본, 그리고 드라마로 등장했던 저의 그런 모습에 2014년 대한민국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응원해줬습니다.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한국 사회에서 제 처지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 많은 탓일 겁니다.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고단한 ‘을’의 삶을 본 사람들도 많았죠.


허물어진 가치와 양심들…
자각은 했지만 변화는 미약
당신의 진심어린 손길처럼
용기있는 삶들이 늘길 빕니다


정규직 전환을 꿈꿨던 게 안정된 생활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직장엔 성희롱과 후배 공 가로채기를 일삼는 이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진 동료와 상사들도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교육도 받고 열심히 살아온 저 같은 사람들이 그들과 오래 일하고 싶었던 게 과욕일까요? 당신은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라고 말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인간 증진’이란 분야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미생’ 장그래.


말과 행동의 일치,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 물질만능에 대한 경계…. 당신이 진심 어린 손길을 내밀며 건넸던 화두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가치라고 누누이 들어온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를 넘어 많은 한국인들이 ‘교황앓이’에 빠진 것은 그런 기본적 가치를 우리가 잃어왔다는 자각 때문이라 합니다.

저의 대기업 정규직 전환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내 문제에만 빠져 살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은 얼마 전 성탄전야 미사에서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따뜻하게 대할 용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셨죠. 자각은 했지만 아직 변화는 일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에, 2015년 그 질문을 곱씹어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랍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2014년 세밑에 장그래 드림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