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28 19:47수정 : 2014.03.02 16:37

26일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문희(28)씨가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팔 또는 다리뼈로 추정되는 유해들은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땅에 묻힌 탓에 훼손이 심했다.

[토요판]
[르포]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
두개골 찾아 붓질을 하지만 국가 예산은 0원

▶ 25일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유해발굴 현장에 근처 산청군의 ‘간디학교’ 학생 5명이 찾아왔습니다. 산청군 외공리 민간인 학살 위령제에도 참여하며 선생님께 슬픈 역사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김도현군은 베이지색 바지가 지저분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흙을 날랐습니다. “유골을 보면 그때가 상상되면서 화가 나요.” 전쟁이 낳은 비극, 묻어두지 말고 알리는 것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방법이 아닐까요.


주름이 깊게 파인 64살 아들 강병현씨는 29살 아버지가 여전히 그립다. 한 번도 본 적 없기에 더 그립다. 어머니가 삶던 국수를 “잠시 다녀와서 먹겠다”며 떠난 아버지는 다시는 국수를 먹지 못했다. 아버지는 뱃속에 있던 아들도 영영 보지 못했다. 생사를 몰라 사망신고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소식을 반세기가 훌쩍 넘은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알려왔다. 조사 결과 진주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아버지 강상준(사망 당시 29살)씨는 1950년 7월15일 금산지서로 소집됐다. 진주경찰서에 구금된 뒤 7월21일께 학살됐다.


‘좌익사상자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의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20일 결성됐다. 본래 목적은 해방 이후 늘어나는 ‘좌익정치범’ 계도였으나 실제 지역에서는 할당을 채우기 위해 사상과 관련없는 이들까지 가입시켰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원 명단은 그대로 학살 명단이 됐다. 북한 인민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군과 경찰은 남한 모든 지역에서 군마다 100~1000여명씩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집단 학살했다.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서는
보도연맹원·진주형무소 재소자
718명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졌다
국가가 유해발굴 손 놓은 사이
시민단체들의 힘으로 땅을 팠다

두개골, 팔다리 뼈, 허리띠 버클…
하나둘씩 모습 드러내지만
세상에 나와도 갈 곳이 없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 볼 곳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부르다 울어버린 64살 아들


죽음의 의문은 풀렸지만 아버지는 주검으로라도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는 진실화해위를 만들어 진상을 규명했으나 유해까지 찾아주지는 않았다. 2007년부터 진실화해위는 국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지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다만 3년간 고작 열 곳, 1617구를 찾는 데 그쳤다.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도 유해를 발굴하긴 했으나 유전자(DNA) 검사를 하지 않아 가족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진주 어딘가의 차가운 땅에 누워 있다.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만 있다면 발굴하여 양지바른 곳에 모시어 매일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단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지난 24일 진주시 명석면사무소에서 열린 개토제에서 한국전쟁유족회 진주유족회장으로서 호소문을 읽던 ‘늙은’ 아들은 이 한 문장을 읽다 두 번 울음을 터트렸다.


마이크를 타고 들리는 울음소리에 김형자(66)씨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와, 혼자 살아온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 나네요.” 1950년 7월 어느 날 잠깐 나간다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할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3일을 꼬박 걸어간 진주경찰서에서 “트럭 한 대가 사람을 이빠이 싣고 나갔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트럭에 실려 나간 날로부터 하루 전인 음력 6월6일은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당시 두 살이었던 김씨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부를 때마다 그렇게 슬프데요. 꿈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까. 얼굴도 모르는데. 산소가 없으니 아버지라고 부르고 절할 데도 없고….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 볼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241-1번지와 425-2번지. 일명 ‘용산고개’라고 불리는 이 일대에는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718명 이상이 군경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땅에 묻힌 유해가 64년 만에 햇빛을 본다. 한국전쟁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4·9통일평화재단 등 시민단체들이 모여 만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공동조사단)이 시민의 힘을 모아 유해를 발굴하기로 했다. 진실화해위는 민간인 학살 책임이 경찰, 군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 있다며 ‘사건 가해자는 국가’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유해발굴도 국가의 몫이었지만, 2010년 12월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 뒤 국가 차원의 유해발굴도 함께 멈췄다. 지난 24일부터 일주일간 그 유해발굴이 시민들의 손을 빌려 다시 시작됐지만, 첫 삽을 뜨는 ‘개토제’ 행사는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보다 지난 세월의 한을 담은 눈물이 더 많았다.


강원도 철원군부터 경남 남해군을 가로지르는 3번 국도 진주~사천 구간을 앞만 보고 달려서는 용산고개를 볼 수 없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매장지입니다’라는 펼침막은 작고 낡아 알고 보지 않는 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정수장 앞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 오른편엔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너머로 칡넝쿨이 덮여 있는 땅이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이 작은 고개에 한국전쟁 당시 진주에서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국군 전사자처럼 학살 피해자도 책임져야


당시 16살이었던 주민 심아무개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골짜기에 포승줄에 묶인 채로 총 맞은 시신들이 엎어져 있었다. 구덩이를 파지 않고 그냥 죽였고 주민들을 동원해 골짜기에다 장작더미처럼 쌓은 뒤 흙을 덮어 놓았다”고 증언했다. 아버지를 잃은 정연조(64)씨도 삼촌에게 들은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피가 쏟아져 나와 잔디도 까맣게 되고 개울에 핏물이 넘쳤다고 했어요. 옷이 보일 정도로만 흙으로 살짝 덮었는데, 이미 부패가 많이 돼서 아버지를 찾기가 힘들었대요.”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곳을 포함한 진주 일대에서 국민보도연맹원뿐 아니라 근처의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들까지 최소 121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본격적인 유해발굴은 25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됐다. 무작정 땅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 가로 3m, 세로 3m 정도의 면적에 한정해 유해가 나올 때까지는 골고루 판다. 유해가 발견되면 그곳을 중심으로 조금씩 주변을 넓혀간다. 유해를 찾는 것은 시간, 체력과의 싸움이다. 나올 때까지 삽질, 호미질의 무한 반복이다. 묻힌 장소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흙의 색깔은 가장 중요한 나침반 중 하나다. “자연스럽게 쌓인 토양이 아니면 색깔부터 달라요. 새로 덮었다거나, 한 번 뒤집은 적이 있으면 공기랑 만나니까 색이 더 진해지죠. 사람이 손을 댔다는 뜻이에요. 색이 다른 곳에 유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노용석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인문한국(HK)연구교수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학생들의 호미질을 바라보며 말했다.


2011년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진주지역 민간인 집단학살 유해 매장지 탐색조사를 했을 때 유해가 나온 곳이라 기대가 컸지만, 생각보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성도가 높으면 뼈가 쉽게 상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흙들은 산성도가 높아서 뼈가 잘 남아 있지 않죠. 게다가 여기는 습기도 많아서 얼마나 잘 보존돼 있을지….” 공동조사단장인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고고미술사학과)가 말했다. 한마음으로 유해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오전 10시30분 긴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뼈는 하얘서 흙 색과 쉽게 구분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뼈는 나뭇가지와 구분되지 않았다.


용산고개에서 유해를 찾는 10여명은 모두 유해발굴이 낳은 인연들이었다. 노용석 교수는 진실화해위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해발굴팀장을 맡았다.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학부·대학원생들은 노 교수와 함께 2005년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에 참여했던 인연을 고리로 모였다. 박선주 교수는 1997년 일본 홋카이도 강제징용 조선인 유해발굴 참여를 시작으로 2000~2007년 국방부 전사자 유해발굴, 2007~2009년 진실화해위 민간인 유해학살,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등 다양한 유해발굴의 경험이 있다. 발굴 ‘에이스’로 활약한 김영환·윤정구씨도 박 교수와 함께 여러차례 일본 홋카이도에서 유해를 발굴해왔다. 용산고개 현장에 한국의 유해발굴 역사가 집대성된 셈이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하다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전향했냐’고 묻더군요. 국가는 국민에게 병역과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생명을 보호해 줘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국군 전사자나 민간인 학살 피해자나 모두 같은 거예요.” 박선주 교수가 말했다.


남한 군경이 썼다는 카빈 소총 탄피와 탄두


유해발굴의 노하우도 세월의 무게 앞에선 기를 못 폈다. 64년간 쌓인 흙, 훼손된 땅, 산산이 부서진 유해…. 유일한 답은 기다림뿐이었다. 26일 같은 방식으로 이어진 유해발굴에서도 3~4개의 두개골과 그 옆의 이빨 조각들, 켜켜이 쌓이고 엉켜 주인이 몇 명인지도 모를 뼈 조각조각들, 낡아빠진 허리띠 버클,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군경이 썼다는 미국제 카빈 소총 탄피와 탄두, 하얀 단추 몇 개를 찾는 데 그쳤다. 많든 적든 유해발굴은 학살의 가장 강력한 증거다. 학살 피해자들이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유일하게 알릴 길은 뼈만 남은 몸을 드러내 대신 말하게 하는 것뿐이다. “3개 이상의 두개골과 정강이뼈들이 넓은 지역에 걸쳐 나오고 있습니다. 탄피·탄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총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됩니다. 뼈가 겹쳐 있고 지표면에서 10~20㎝ 아래에서 발견됐으니 파지도 않고 대충 묻어놓은 것 같네요.” 유해가 남긴 학살의 현장을 박선주 교수가 풀어냈다.


유해는 발굴돼도 바로 파내지 않는다. 학살지 전체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해가 어떻게, 어디서 발견됐는지 전체적인 모습을 보아야 죽은 상황과 죽은 이들을 분석해낼 수 있다. 뼈를 찾기까지는 거친 호미나 삽이 동원되지만 찾고 나서는 조각칼, 대나무 칼, 붓 등이 동원돼 흙을 아주 조금씩 털어낸다. 조각칼을 들고 몇 겹으로 겹쳐 있는 뼈들에 붙은 흙을 조심스레 거둬내 보았다. 한 번 삐끗하면 삭을 대로 삭은 뼈들이 뚝 떨어져 나간다. 아무리 집중해도 상처 하나 없이 뼈들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문득 화가 났다. 이름 모를 유해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의 시간도 슬펐지만, 이렇게 어렵게 찾는다 하더라도 이들은 갈 곳이 없다.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려면 유해와 유가족들의 유전자를 검사해 대조하는 작업을 벌여야 해 검사 비용이 만만치 않다. 국가 예산은 ‘0’원이다.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관련 법이 있는 것과 달리 민간인 학살자 유해발굴은 관련 법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안치할 곳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진실화해위가 발굴한 유해도 충북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2015년까지 임시로 보관돼 있다. 발굴을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 뒤 과거사 재단을 세워 유해를 제대로 보관할 예정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활동이 축소되면서 재단 설립 논의는 사라졌다. 용산고개에서 발굴한 유해들은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됐으나 진주 출신으로 확인돼 지난 19일 이곳에 세워진 컨테이너 박스로 옮겨진 유해 163구 곁에 보관될 예정이다. 온도와 습기 조절 장치가 없어 163구의 유해에는 벌써 파란 곰팡이가 피어나고 있다. 노용석 교수는 “법적 토대가 없는 한 유해발굴뿐 아니라 발굴한 유해도 계속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의 가장 큰 소원은 생이별해야 했던 가족을 자신들의 곁으로 모셔오는 것이다. 24일 경주유족회에서 온 네 사람이 용산고개를 찾았다. 이들은 용산고개 유해발굴 현장을 부지런히 휴대전화와 수첩에 담았다. 김하종(80)씨는 4·19 민주화운동 이후인 1960년 9월5일께 ‘경주지구 양민피학살자 유족회’를 만들어 유해발굴을 하려 했으나, 5·16 군사 쿠데타 뒤 단지 유족회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못다 한 일을 죽기 전에 하는 것이 김씨의 남은 꿈이다. “우리 회원인 신경시(79)씨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이에요. 저도 나이가 만만치 않고. 죽기 전에 유해발굴, 아니 집단학살과 매장이 일어난 곳에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우고 싶어요.”


진주/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