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29 18:37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1944년 그리스 내 전체 유대인의 87%인 6만5000여명이 학살된 아테네의 티시오역 근처에는 유대인 박해를 추모하기 위한 ‘부서진 다윗의 별’ 조각물이 소박하게 조성돼 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구금했던 유대교 회당 부근에 있는 이곳은 2010년 5월 유대인들이 조성한 홀로코스트 공원이다.

1937년 12월~1938년 1월 일본군에 의해 30만여명이 학살된 중국 난징의 난징대학살기념관에 가면 한쪽 벽면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 과거의 일을 잊지 말고 후세에 교훈으로 삼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방문객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은 2만5000~3만여명에 이르는 제주4·3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들 국내외 공원과 기념관의 공통점은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과거의 비극적인 일을 잊지 말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것이다.

16시간이면 제주도에 도착해야 할 세월호는 100일이 지나도록 제주항에 닿지 못했다. 수학여행의 설렘을 안고 꿈에 부풀었던 단원고생들, 잘살아보겠다며 제주 중산간 지역에 농지를 구하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배에 탔던 제주 이주민, 환갑 기념으로 제주도 추억의 여행에 나섰던 초등학교 동창생들. 이들은 제주도만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참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도가 이 참사의 도덕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해양인문학자인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지난 5월 ‘제주도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며’라는 집담회를 열고 “제주항 산지등대에서 보면 세월호가 도착하고 수학여행에 들뜬 학생들이 환호하는 착시가 느껴진다”며 “제주항 주변에 ‘세월호를 기다리며’라는 비석이라도 세워야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후세에 거울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현동 한마음병원 의사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4·3공원이나 현충원에서 추모하듯이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번 참사도 시일이 지날수록 잊혀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1970년 발생한 남영호 해난사고는 해방 이후 최악의 해난사고다. 제주 서귀포항을 떠나 부산으로 가던 이 배의 사고 희생자는 326명에 이르렀다. 기자는 초·중학교 시절, 이웃들로부터 누가 그 배에 탔었고 그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들으면서 자랐다.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참사 발생 1년 뒤인 1971년 서귀포항에 남영호 침몰사고 위령탑이 세워졌으나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항만 확장공사가 이뤄지면서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한라산 중턱으로 옮겨졌다. 잊혀진 역사가 돼 버릴 뻔한 이 사건은 다행히 최근 더디지만 추모사업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조형물이건 자그마한 공원이건 제주항 어느 곳인가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할 공간이 마련됐으면 한다. 잊지 말자.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경계하는 것, 그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이자 산 자들의 몫이다.

그리스 아테네 유대인박물관의 전시관 마지막 부분에 전시된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의 글 ‘추념’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기억하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리라. 망각 속에서 그들을 다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리니.”

허호준 사회2부 기자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