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부대 사건… 희생자 2억 배상판결
전국 민간인 희생사건 중 가장 큰 배상액
2012년 02월 17일 16:14:21
희생자 각 2억원
배우자 부모 자녀 1억
형제자매 3천만원
나주부대에 의해 희생된 유족들에게 국가가 27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중 가장 큰 배상액이다.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6부(정일연 부장판사)가 내린 배상내역을 보면 “국가는 희생자에게 각 2억원, 희생자 배우자 및 부모 또는 자녀에 대해서는 각 1억원, 형제자매에게는 각 3000만원 등 원고들에게 모두 27억5371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배상액을 재판부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재판부의 판결은 지난해 1심 판결을 받은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은 1억원, 청원 보도연맹사건은 희생자 본인에게 8000만원, 배우자 4000만원, 형제와 자매에게는 100만원을 판결했던 것과는 달리 큰 배상액이다.
현재 고양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 유족들은 그동안 겪은 고통에 비해 배상액이 너무 작다며 상소할 움직임이다.
나주경찰부대 사건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난 1950년 7월 전남 해남과 완도 일대에서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민간인 97명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에 희생자 17명(완도 5명 포함)의 유족 38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이에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나주경찰부대 등은 무고한 주민들을 어떠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총살했다”며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 5년이 지났다는 국가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주경찰부대 사건은 전시에 국가권력이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한 반인권적인 중대 범죄행위라는 점에서 공무원이 통상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반적인 불법행위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의 1심 결과에 대해 나주부대 유족회는 환영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주부대 사건 소송 대표를 맡은 최명진씨는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이번 판결이 여타의 민간인 희생 사건 배상액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주부대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초기 나주경찰부대가 해남읍을 경유, 완도로 후퇴하면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해남읍에 도착, 좌익척결 등의 이유로 가가호호 수색하며 주민들을 근접사격 혹은 정조준 해 희생시켰다.
또 마산면 상등리에서는 인민군환영을 위해 모였던 주민에게 총을 난사했고 완도군 완도읍에서도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지역주민들을 완도중학교에 모이게 해 다수의 지역주민들을 집단학살했다.
이에 정부산하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10월 나주경찰부대사건에 의한 희생자 97명을 확정하고 “어떠한 법적 절차도 수반되지 않은 민간인 희생사건”이라는 내용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바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가 파악한 희생자 중 신원을 확인한 수는 해남군 55명, 완도군 42명 등 총 97명이다.
이들 중 절반이상은 농·어업 종사자이고 20~30대가 가장 많았다. 또 여성은 6명이고 부자(父子) 등 가족 희생자도 33명으로 조사됐다.
한편 나주부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97명이나 이번 소송에 17명의 희생자 유족들만 참여해 국가 배상을 받게 됐다.
나머지 유족들은 안타깝게도 공소시효가 지나 이번 배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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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울 중 앙 지 방 법 원
제 2 6 민 사 부
판 결
사 건2010가합108154 손해배상(기)
원 고별지1 원고 목록 기재와 같다.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정평
담당변호사 심재환, 권정호, 하주희
피 고대한민국
법률상 대표자 법무부장관 권재진
소송수행자 정극현, 최보현, 이규재
변 론 종 결2011. 12. 9.
판 결 선 고2012. 2. 10.
주 문
1.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2 인용금액표 중 ‘인용금
액’란 기재 각 해당 돈과 위 각 돈에 대한 2011. 12.
9.부터 2012. 2. 10.까지는 연 5%의, 2012. 2. 11.부
터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
급하라.
2. 원고들의 각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3. 소송비용 중 원고 박동원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
과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가 부담하고, 원고 박
동원과 피고 사이에 생긴 부분의 2/5는 원고 박동원
이,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4.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 구 취 지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2 인용금액표 중 ‘일부 청구금액
또는 청구금액’란 기재 각 해당 돈과 위 각 돈에 대한
1950. 9. 15.부터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까지는 연 5%
의, 그 다음 날부터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로 계
산한 돈을 지급하라.
이 유
1. 청구원인에 관한 판단
가. 인정 사실
1) 나주경찰부대와 완도경찰 등의 민간인 사살 사건
가)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1950. 7. 23. 광주까지 점령하였다.
한편 1950. 7. 13. 인민군 6사단 일부가 금강을 건너 군산을 점령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호남지방을 방어하기 위한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와 예하 ‘전남지구편성관구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전남경찰국장 지휘 하에 지역별로 각 경찰부대가 편성되었다.
나) 인민군이 광주를 침공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전남 나주군(그 후 나주시로 변경되었다) 경찰서 소속 경찰들로 구성된 나주경찰부대(책임자 경찰서장 김탁배) 약 200명은 1950. 7. 23. 후퇴의 길에 올라 1950. 7. 25. 전남 해남군 해남읍(이하 ‘해남읍’이라고만 한다)에 진입하였다.
당시 해남읍은 해남경찰이 1950. 7. 23. 해남군수와 함께 부산으로 후퇴함에 따라 치안 공백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다) 나주경찰부대 중 일부 부대원은 1950. 7. 25. 무장을 한 채 해남읍 초입에 있는 해리에 진입하다가 주민을 만나게 되었는데, 주민이 부대원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도망하자 부대원은 주민의 집까지 추격하여 총을 난사한 후 그 옆집에 살고 있던 유부용(희생자 1)을 끌어내어 근처 우물가에서 사살하였다.
또한, 부대원은 우물가 근처에서 부대원을 인민군으로 오인하고 겁에 질려 “인민군 만세”를 외친 민육옥(희생자 2) 등 마을 주민을 사살하였고, 해리사무소 앞을 걷고 있던 이원암(희생자 3)을 사살하였다.
라) 해남읍 수성리에 진입한 나주경찰부대 중 2명의 부대원은 1950. 7. 25. 근처 전사옥(희생자 4)의 집을 수색하면서 가족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협한 후 전사옥을 집 앞으로 끌어내어 사살하였다.
그리고 해남읍 구교리에 진입한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1950. 7. 25. 피난을 가지 않고 집에 있던 김길용(희생자 5)을 집에서 끌어낸 후 마을 입구에서 사살하였다.
한편 해남읍 남동리에 진입한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근처 주택에 난입하여 수색한 뒤 그곳에 살던 김응준(희생자 6)을 사살하였다.
해남읍 읍내리에 진입한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1950. 7. 25. ‘해남철공소’에 난입하여 병 때문에 피난 가지 못하고 누워있던 곽준(희생자 7)을 사살하였다. 해남읍 중앙리에 진입한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1950. 7. 25. 김문심(희생자 8), 김재수(희생자 9) 모자의 집에 난입한 후, ‘우리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인민군이다’라고 대답한 김재수와 김문심을 끌어내어 사살하였다.
해남읍 성내리에 진입한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1950. 7. 25. 근처 해남경찰서를 지나가던 최대집(희생자 10)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였으나 이를 듣지 못하고 지나친 최대집을 사살하였다.
마) 나주경찰부대 중 일부 부대원은 1950. 7. 25. 14:00경 해남읍을 지나 전남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에 진입하였다.
부대원은 “인민군이 오니 마을 회관 앞으로 빨간 완장을 두르고 환영 나오라”는 방송을 한 후, 위 방송을 듣고 나온 주민을 사살하였다.
이에 임상순(희생자 11) 등 여러 명의 주민이 다음날 부대원을 찾아가 위와 같은 주민의 희생에 관하여 항의하자 이들을 근처 골짜기로 끌고 가 사살하였다.
바) 그 후 일부 나주경찰부대원은 1950. 7. 25. 전남 완도군(이하 ‘완도군’이라고만 한다)으로 향하면서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일평리에 진입하였는데 위 마을에서 임상호(희생자 12) 등 주민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술에 취한 임상호 등 주민이 부대원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엉겁결에 “인민군 만세”를 외치자 부대원은 이들을 사살하였다.
사) 한편 해남읍에 주둔하던 나주경찰부대 중 일부 부대원은 1950. 7. 25. 먼저 완도군 완도읍에 진입하였다.
당시 완도군 완도읍은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한 후 계속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과 전남경찰이 완도에 집결하여 인민군과 접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 등으로 민심이 불안하였고, 완도경찰의 대부분이 완도군 금일읍 소랑도로 후퇴한 후 각지에서 군․경의 낙오병들이 완도군 완도읍에 몰려들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아) 1950. 7. 26. 오전 완도경찰서의 소사(小使, 사환)가 “완도중학교에서 인민군 환영행사가 있으니 모두 모이라”고 외치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상당수의 마을 주민과 교사들이 완도중학교에 모였는데 나주경찰부대원은 그제야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고 나주경찰이다. 공무원과 경찰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몇몇 주민이 도망하자 부대원은 도망하는 주민을 사살하였고, 이를 목격한 나머지 주민이 놀라 모두 도망하자 이들을 추격하여 사살하거나 이채강(희생자 13), 최규남(희생자 14) 등 다수 주민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구금하였으며, 그 무렵 완도경찰은 구금한 주민을 사살하였다.
한편 이기용(희생자 15)은 완도동국민학교 교사로서 전쟁이 나자 고향인 완도군 약산면으로 피난을 갔는데 1950. 7. 26. 학교 관사에 있는 짐을 가지러 완도읍 제1부두에 왔다가 나주경찰부대원에게 사살되었다.
자) 완도경찰과 나주경찰부대의 일부 부대원은 1950. 7. 29. 배에 인공기를 달아 위장한 채 완도군 노화읍 이포리 선착장에 상륙하였다.
배가 들어오자 근처에 있던 주민 10여 명이 구경을 하였는데 위 부대원은 주민을 위협하여 경찰서로 끌고 가면서 길가에 있던 주민을 포함하여 모두 30여 명을 연행하였다.
그 후 경찰은 위 주민 중 연행에 항의하거나 반항한 박상후(희생자 16) 등 6명을 경찰서 마당에서 사살하였다.
차) 1950. 8. 1. 완도군에 집결한 나주, 완도, 강진, 장흥, 함평, 화순, 진도경찰부대 등 전남 서남부 경찰은 완도군 완도읍에 본부를 설치한 후 관내 도서지역 사수를 위하여 완도군 청산면에 강진, 장흥, 함평, 진도경찰부대를 배치하였다.
그 후 청산면은 위 경찰부대의 최후 방어 저지선이 되었는데, 청산면에 주둔하던 위 경찰부대 중 일부 부대원은 1950. 9. 15.경 지정대(희생자 17) 등 여러 주민을 각자의 집에서 연행하였다가 일부는 청산 지서에서 사살하였고, 지정대를 포함한 나머지 주민은 제주시 추자면으로 끌고 가 사살하였다.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
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정리위원회’라 한다)는 2005. 12. 5.부터 2006. 11. 30.까지 위 희생자들의 유가족으로부터 해남군, 완도군 주민이 나주경찰부대 등에 의하여 희생된 사건(이하 ‘나주경찰부대 사건’이라 한다)에 관한 진실규명 신청을 받고 이를 조사한 후, 2007. 10. 23. 위와 같은 경위로 살해된 유부용, 민육옥, 전사옥, 이원암, 임상호, 김응준, 곽준, 김길용, 임상순, 김문심, 김재수, 최대집, 이기용, 이채강, 박상후, 최규남 등 97명의 희생자를 확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진실규명결정을 하였다.
<진실규명결정>
① 희생자 97명은 1950. 7. 하순경 전남 해남군 해남읍, 마산면 상등리, 마산면 화내리, 현산면 일평리, 전남 완도군 완도읍, 소안면 비자리, 노화읍 이포리 등지에서 나주경찰부대와 완도 경찰에 의하여 집단살해되었다.
② 나주경찰부대는 좌익척결 등의 이유로 집집이 수색하면서 주민을 근접사격 또는 정조준 사격하여 사살하였고, 인민군 환영행사인 줄 알고 모였던 주민에게 총을 난사하였으며, 도로에서 우연히 만난 주민이 ‘인민군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사살하였다.
또한, 나주경찰부대와 완도 경찰은 배에 인공기를 달고 상륙한 후 선착장에 모인 주민을 끌고 가 사살하였다.
③ 희생자 97명은 모두 해남군 및 완도군 주민으로 그 중 절반 이상은 농․어업 종사자였고 20대에서 30대가 가장 많았으며, 여성은 6명이었고 가족희생자도 33명이었다.
④ 희생자들은 모두 비무장․비전투원이었고, 일부 희생자가 경찰을 보고 놀라 도망친 것 외에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 복장으로 변복하지는 않았으나 자신들이 경찰임을 적극적으로 감추고 진입하여 주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도록 유도하였는바, 환영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화를 입을까 봐 환영대회에 나간 주민이 인민군을 환영하였다는 이유로 살해하였다.
사건 발생 당시 해당 지역에는 인민군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교전도 발생하지 않았고, 주민 역시 무장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경찰을 공격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민 희생은 긴급한 작전상의 필요와도 무관하였다.
⑤ 나주경찰부대와 완도 경찰이 주민을 희생시킨 과정에는 어떠한 법적 절차도 수반되지 않았고, 책임자인 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민간인 희생사건이 발생하였다.
나) 한편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정대의 사망에 관하여 당시 지정대가 나주경찰부대나 완도경찰에 의하여 사살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정대를 나주경찰부대사건의 희생자에 포함하지는 않았으나, 지정대가 그 외의 경찰부대원에 의하여 사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3) 당사자들의 관계
원고들은 나주경찰부대 사건 및 그 외 경찰부대원의 사살에 의한 희생자들의 유족으로서 별지2 인용금액표 중 ‘희생자’란 기재 각 희생자와 같은 표 ‘관계’란 기재 각 친족관계에 있다.
[인정 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1 내지 46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변론 전체의 취지
나.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1) 나주경찰부대 사건 당시 시행된 제헌 헌법(1948. 7. 17. 제정되어 1960. 6. 15. 개정되기 전의 것) 제27조에 의하면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사람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대하여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2) 생명권은 인간의 모든 권리의 전제가 되는 것으로 생명권에 대한 보장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할 수 없고 구체적인 기본권의 보장도 무의미하므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나주경찰부대와 완도경찰 및 그 외의 경찰부대는 전쟁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의무를 망각한 채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주민들을 어떠한 절차도 거치지 아니하고 총살하였다. 위 경찰부대는 병 때문에 피난 가지 못하고 고향에 남아있던 주민,
마을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던 주민, 단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 주민, 당시 인민군의 군복을 본 적도 없어 위 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주민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였는바,
이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범죄행위로서 공무원인 위 경찰부대는 이와 같은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희생자들의 생명권과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 등을 침해하였고, 그 결과 희생자들은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원고들 중 희생자들의 배우자, 부모, 자녀 또는 형제자매는 희생자들과 2촌 이내의 근친관계에 있는 사람들로서 희생자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경찰에 의하여 사살됨에 따라 한순간에 가족을 잃고 친족관계가 파괴되는 등 막대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바, 그들 역시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나주경찰부대 사건 등으로 인하여 희생자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와 원고들 중 희생자들과 위와 같은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3) 한편 원고 박동원은 희생자 박상후의 조카로서 박상후의 사망으로 인한 다른 친족들의 위자료 상속분 외에 자신의 정신적 손해로 인한 위자료 30,000,000원을 더 청구하고 있다.
민법 제752조는 ‘타인의 생명을 해한 자는 피해자의 직계존속, 직계비속 및 배우자에 대하여는 재산상의 손해가 없는 경우에도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위자료 청구권자를 위와 같이 열거된 친족들로 제한하는 규정은 아니므로 그 외의 친족도 민법 제750조, 제751조에 의하여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으나, 그 외의 친족이 위자료를 청구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자신이 정신적 손해를 입었음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희생자 박상후의 조카인 원고 박동원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완도군 노화읍 구석리에 있는 조부모의 집에서 박상후와 함께 거주하던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한편, 원고 박동원은 박상후의 사망 당시 10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이미 고향을 떠나 목포시에서 거주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잠시 조부모의 집에 머무르게 된 사실, 원고 박동원은 박상후의 사망을 목격하지 못하여 이에 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고,
그 후 조부모로부터 박상후의 사망 경위를 전해 들어 알게 된 사실도 인정되는바(갑 14호증의 1, 2, 3, 44호증의 1), 앞에서 인정한 사실만으로는 원고 박동원이 삼촌 박상후의 사망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손해를 입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따라서 원고 박동원이 자신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
다. 손해배상의 범위
1) 희생자들은 위와 같은 공무원의 범죄행위에 의하여 생명권을 박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전제로 하는 모든 법적인 권리, 가족 및 혼인관계, 일상생활에서의 희로애락 등 인간으로서 누릴 존엄과 모든 가치를 한순간에 상실하였다.
게다가 위 범죄행위는 희생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직접적으로 보호할 의무를 지닌 경찰에 의하여 자행된 것인바, 이처럼 자행된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범죄행위로 인하여 희생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은 일반 사인의 범죄행위에 의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희생자들의 배우자, 부모, 자녀 또는 형제자매들은 희생자들이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인하여 사망함에 따라 그 당시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충격과 고통을 받았고, 인민군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경찰에 의해서도 자신과 가족들이 살해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 유족들은 이른바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힘에 따라 사회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아왔고, 특히 가장인 희생자가 사망한 경우의 유족들은 부모의 정을 느껴보지도 못한 채 가족의 해체와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왔을 것으로 보이는바, 위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사망 이후에도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주경찰부대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중대 범죄인바, 단지 전쟁 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위 범죄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피고로서는 희생자와 유족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에 상응하는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는 점,
희생자와 유족들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극단적이고 조직적인 범죄행위로 인하여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한편 나주경찰부대 사건 등이 발생한 1950. 7.경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1. 12. 9.까지 6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이 경과하였고
그동안 우리나라의 물가와 경제규모 및 국민소득수준이 비교할 수 없이 상승한 점 등을 종합할 때,
위자료는 이 사건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희생자들에 대하여는 각 200,000,000원,
희생자의 배우자, 부모 또는 자녀에 대하
여는 각 100,000,000원, 희생자의 형제자
매에 대하여는 각 30,000,000원으로 정
함이 상당하다.
위자료 청구권의 상속관계 및 구체적인 계산내역은 별지3 상속관계 및 손해배상액 계산에 관한 내역 기재와 같다.
2) 한편 원고들은, 피고가 각 위자료에 대하여 마지막 희생자 지정대가 사망한 1950. 9. 15.부터의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이에 관하여 보건대,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지급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 사실심의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2011. 1. 27. 선고 2010다6680 판결 등 참조).
위 1950. 9. 15.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1. 12. 9.까지 무려 60년이 넘는 기간이 경과하였고 그동안 물가와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으며, 이와 같은 사정을 고려하여 이 사건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위자료를 산정한 이상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은 위 2011. 12. 9.부터 발생한다고 할 것이다.
3) 따라서 피고는 위자료로 원고들에게 별지2 인용금액표 중 ‘인용금액’란 기재 각 해당 금원 및 위 각 금원에 대한 이 사건 변론종결일인 2011. 12. 9.부터 이 사건 판결 선고일인 2012. 2. 10.까지는 민법이 정한 연 5%의, 그 다음 날부터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고, 이를 초과하는 원고들의 각 나머지 청구는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2. 피고의 항변에 관한 판단
가. 피고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5년의 시효가 완성되어 소멸되었다고 항변하므로 살피건대, 구 회계법(조선총독부 법률 제42호) 제32조에 의하면 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 대한 권리는 5년간 행사하지 아니할 때에는 시효로 소멸하고, 이 사건 소가 나주경찰부대 사건 등이 발생한 1950. 7.경부터 5년이 경과한 후에 제기되었음은 명백하다.
나. 그러나 한편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우리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받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2002. 10. 25. 선고 2002다32332 판결, 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참조).
다. 이 사건의 경우
① 경찰이 전쟁 중에 저지른 위법행위는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거의 알기 어려워 원고들로서는 사법기관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서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존부를 확정하기 곤란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피고의 어떤 조치가 있기 전까지 피고 등을 상대로 적시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점,
② 전쟁이나 내란 등 국가비상시기에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집단적으로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해서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점,
③ 나주경찰부대 사건은 전시에 국가권력이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한 반인권적인 중대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점에서 공무원이 공무를 수행하면서 통상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반적인 불법행위와 달리 볼 필요가 있는 점,
④ 국민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는 피고가 오히려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조직적․집단적으로 희생자들의 생명을 박탈한 후 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뒤늦게 원고들이 위 집단학살의 전모를 어림잡아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면서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한 점,
⑤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의 경우에는 나중에 재심을 통하여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도 재심판결의 확정시부터 진행된다 할 것인데,
이 사건과 같이 아예 유죄의 확정판결이 없어 재심의 여지가 없는 사건에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여 원고들의 청구를 배척하는 것은 사법부의 판단을 통해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적절한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통로조차 사실상 봉쇄하여 현저히 부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점 등을 종합하면,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이 있었던 2007. 10. 27.까지는 객관적으로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고, 피해를 당한 원고들을 보호할 필요성은 매우 크나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여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를 지적하는 원고들의 재항변은 이유가 있고, 결국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
3.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청구는 위 인정 범위 내에서 이유가 있으므로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는 이유가 없으므로 이를 기각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정일연
판사
상종우
판사
강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