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보수를 향한 비평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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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소설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민주주의자들을 공경하라
자기모멸적 얼굴을 지워라

봉기는 소각되었다. 역사의 잉크였던 시민의 피는 교과서 안쪽에서 말라붙어 버렸다. 저 광주는 다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뉴라이트가 주도하는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대중의 힘을 주술적으로 불러오는 생기 있는 시민항쟁의 역사는 이들에게 공포와 수모일 뿐이다. 지난 몇 해 동안 거듭해서 타오른 촛불의 현재성은 광장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의 뇌에 광우병적으로 구멍을 뚫어 버렸다. 발작적 반응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매천 황현, 백범 김구마저 섬길 수 없는 인간형 부재라는 자기모멸을 자양분으로 이 세력은 성립했다. 아비 없는 이들의 이름은 한국 보수다. 우익, 수구(꼴), 가스통 할배까지 다양한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근현대사에서 정의로운 장면과 거리가 멀었다.

우선 이들에게는 민족주의가 온전히 존재할 수가 없었다. 뿌리가 친일파인 터다. 그에 따라 일제에서 숭미로 이어지는 다중적 의붓아버지 상은 권력의 히스테리로 출몰해 대중을 고통에 빠뜨리곤 했다. 백색테러, 민간인학살, 쿠데타, 독재 등 이들이 생성시켜 온 반인륜적 존재 양태는 뜨거운 문신으로 한국인의 기억을 지금도 휘감고 있다. 백선엽 다큐는 여기서 비롯된 자기분열의 전형이다. 고문은 예술이었다는 이근안의 고백은 이들 내면의 정체성이 백주에 작렬한 것일 따름이다. 일제식민지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해 근대로 삼고자 하는 뒤틀린 역사관을 스스로 벗어던지지 않는 한 이런 불량한 윤회는 멈추기 어렵다.

한국 보수는 달리 새겨볼 만한 이론이나 노선 따위 없는 길을 이제껏 내달려왔다. 형식적으로나마 내세워야 했던 민주주의야말로 이들에게 가장 불편한 목표였다. 친일이 극단적 친미와 독재로 이어지는 경로는 실은 민주주의 억압, 말살이 주요 임무였다. 이들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란 한국적 민주주의가 유신독재이듯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장구한 독재를 여섯 글자로 늘려 쓴 것일 따름이다. 하물며 대한민국 보수가 독점하기에는 그 말들이 너무 거룩하다. 이들이 어떤 경우에도 ‘자유’와 ‘민주주의’ 형성에 이바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서 나라를 사수해냈다는 것을 흔히 자유민주주의의 근거로 삼는데, 반공은 안팎으로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러시아의 차르, 나치의 히틀러, 무솔리니의 파시즘, 일제 군국주의, 에스파냐의 프랑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두루 강력한 반공을 내세웠는데 한결같이 악랄한 민주주의 파괴자들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저들에 비해 오히려 지배를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한국 보수의 핵심 통치술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국가와 무관한 반공기득권의 지배를 폭력적으로 정당화하는 악법과 지역감정이라는 또다른 분할통치에 기초해 있다. 2013년 체제는 단지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들과 결별하는 수준 높은 내용을 가져야 한다.

보수는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만한 역사적, 양심적, 상식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 헌법을 포함해서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먼저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깊은 공경을 가지는 게 마땅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성찰을 공미로 치환하는 한 주권 없는 보수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경제민주화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민주화를 잇는 이 가치는 재벌과 초국적 자본에 의한 국가 사유화를 막는 성스러운 싸움이다. 이를 방해하는 일은 한국 보수를 회복하기 어려운 매판수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오늘 보수가 소각해야 하는 건 광주가 아니라 이러한 자기 얼굴이다.

서해성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