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1일(목) 홍성지원은 1951년 국방경비법으로 사형당하신 고 전재흥(유족 전숙자)선생에게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판결내용을 설명하면서 지난 1951년의 군법회의는 "임의성 없는 자백"에 근거해 판단했다며, 이는 현대사의 아픈 과정으로서 잘못된 판단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러한 결과는 어떠한 위로의 말도 소용없는 것으로 재판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죄'라는 판결 결과를 통해 재심 신청인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재판부의 말은 비록 감정이 섞이지 않은 냉철한 것이었지만 희생자 유족에게는 충분한 위로의 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재판관의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민원실에서 판결문을 신청하고 기다리시는 시인 전숙자님과 이명춘 변호사님)

 

전재흥 선생께서 희생당하시기까지의 경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선생이 사시던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에는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인 1950년 9월 27일 서천등기소 사건으로 인하여 선동리 이장 ‘라권집’ 등이 면장이었던 사촌 ‘라희집’을 대신하여 끌려가 희생당했습니다.

 

선생은 국군 수복 후 그의 동생이 의용군 등 부역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피신하자 동생 대신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연행되었던 주민들은 시초지서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했지만 또 다른 100여 명의 주민들은 한산면 돼지고개(현 한산모시타운 인근)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시초지서에 갇혀있던 선생은 학살은 피했으나 서천경찰서로 넘겨졌고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군법회의에 의해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군법회의 판결자료(판결문이 아님)나 대전형무소 재소자 인명부에 따르면, 3개월 가까운 불법구금 후 선생은 1951년 1월 29일 대전형무소에 구치감되었다가 2월 21일 사형판결을 받고 1951년 3월 4일 ‘군에 인도’되어 사형당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3월 3일경 선생이 불려나가는 모습은 무기형을 받고 당시 대전형무소에 함께 있었던 같은 마을 주민(노희선씨)이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군법회의 판결자료」(1951. 2. 21)에는 선생이 ‘1950년 7월 10일 민청원으로서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하여 사형판결에 처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좌익에 의한 서천등기소 집단희생사건」(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2월 진실규명 결정) 등에 따르면, ‘라권집’씨는 1950년 9월 27일 구재극 등 11명에 의해 서천등기소에서 살해당한 것이므로, 같은 해 7월 10일 전재흥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니었음이 확인됩니다. 이 날짜가 음력이라고 해도 8월 중순에 그치므로 9월 등기소사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라권집씨의 죽음이 선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진술은 라권집의 딸 라도정(라권집의 딸)씨를 비롯하여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날짜도 안 맞고 사실도 증명되지 않고...

 

한 마디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서천등기소 사건'의 가해자로 덮어 씌워 사형시켰던 것이 확인되었던 것인데, 적대사건의 희생조차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어이없는 일입니다. 정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굼합니다.

그리고 국방경비법, 비상조치령은 법의 이름은 빌고 있지만 공포사실도 불분명했던 사이비 법률이었습니다. 법의 이름을 빌어 학살을 공식화했던 지상 최대의 악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선고의 아쉬운 점은 바로 법의 존립근거를 판단해 주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악법도 법'이라고 했던가요? 2심에서는 이 악법들을 냉엄하게 심판해 줄 것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