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4년 02월 23일 11:47:08 온라인뉴스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애서 코르작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23일 MBC 예능프로그램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전쟁 때문에 굶주리고 외로운 아이들을 보살핀 코르작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코르작은 당시 독일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학살했을 당시 아이들을 감싼 인물이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방송화면 캡처
아이들을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태웠을 당시 그는 “아이들이 기차에 타 무서워하면 누군가 손을 잡아줘야 하지 않겠냐. 난 결코 아이들을 떠나지 않겠다”며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코르작은 폴란드의 아동작가이며 교육자였다. 아이들을 사랑했고 그의 이러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해 1979년을 세계 아동의 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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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개 : 〈닥터 코르작〉
하태수 /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신부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닥터 코르작〉은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발생했던 유대인 수난을 배경으로 유대 고아들과 함께하다 죽임을 당한 폴란드 의학자 야누쉬 코르작 박사에 관한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유대인을 대신해 희생된 대표적인 폴란드인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방에서 굶어 죽은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이 그분이다. 전쟁 중이라 다 밝히지 못했으나 대리희생된 익명의 인물들이 적잖이 존재하였으리라. 난세亂世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의로운 이들은 난세와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고 어디서든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부드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연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폴란드인 코르작은 바르샤바에서 200명 유대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독일 의학계에서도 알려진 의학자였다. 1939년 세계대전을 시발점으로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진주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은 예외 없이 유대인 거주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코르작도 고아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간다. 거주지는 어린아이들의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어려운 장소였고 들려오는 총성 소리에 고아들은 잠을 설친다. 스테판 여사와 젊은 두 봉사자는 아이들을 돌보고 코르작은 체면을 돌보지 않는 광대 짓을 하면서까지 여유 있는 자들을 찾아 음식과 기부금을 부탁한다. 유대인의회를 찾아가 고아들의 안전을 부탁하지만 의회 사람들의 안전마저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아원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가고 병든 사람들은 길거리와 막사에서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박사는 아이들이 이 불행한 현상들을 보지 못하도록 정문과 밖으로 난 모든 창문을 폐쇄하였으나 이내 닥칠 현실을 외면만 할 수 없어 고아들이 죽음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연극을 마련한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공포로 우는 아이를 가슴으로 안아주고 그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자신의 침대에서 재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박사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에게 탈출을 종용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떠나는 상황에서, 폴란드인이 유대인 거주지에 남아 고아들과 생사를 함께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어느 부인의 요청에 박사는 ?어찌 당신마저 나를 그렇게 보는가. 어미가 그러하듯 나도 그 아이들을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한다. 결국 전쟁이 확대되면서 독일군에 의해 박사와 고아들은 마치 불량한 재고품들이 처리되듯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실리고 그들 모두가 1942년 트레브랑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리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고아들 편에 선 코르작
어린 고아들은 코르작의 보호 아래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우거진 숲과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냇물과 후견인들 속에서 고아들은 부모 없이도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유대인 거주지로 옮겨가야 했던 그들은 두려운 눈길로 서로를 확인하면서 전쟁의 아비규환을 목격한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냉정하고 어둡게만 보이는데, 고아들은 그런 현상들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손길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을 놓치면 의지할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만큼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 무자비한 전쟁에서 누군가 보호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대상들이 바로 폭력에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고아들이다. 영화는 코르작 박사가 왜 유대인 고아들을 돌보게 되었고 그들의 죽음에 동참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나 그는 이미 언급된 어린 고아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어린 고아들에게 측은지심을 가졌고 그들에 관한 일에서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코르작은 평소처럼 창문틀에 놓여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 바로 맞은 편에 보초를 서던 독일 병사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보초병은 만만한 듯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총구를 겨누려 한다. 서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이 흐르면서 그의 몸은 얼어붙고 만다. 이때 보초병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해서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 불행한 시대에는 오발탄으로도 사건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르작은 자신이 고아들 편에 서 있는 한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경계선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코르작
전쟁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코르작 박사에게 최악의 상황은 전쟁보다 오히려 술 취한 사람이 아이들을 때리는 부덕한 행위였다. 그것이 더 직접적으로 고아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폭력은 그들의 영혼에게 독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사랑으로 키워지고 존엄성 또한 지켜지기를 바랐다. 코르작은 유대인의회 책임자에게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최소한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권익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고아들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했지만 제공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는 쉽게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유머와 위트로 아이들을 웃기기도, 또 희망을 주기도 한다. 고아소년 요셉은 폴란드 가정에 위탁된 같은 처지의 소녀 에바를 사랑했으나 전쟁은 그들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절하여 죽고만 싶다는 요셉에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자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나 멋진 남자다.? 요셉은 죽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고아원이란 폐쇄된 공간에서 무료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교육이 아이들에게 필요했으므로, 늦은 밤에 그는 다음과 같은 구인광고문을 작성한다. ?고아원에서 근무할 교사를 구함. 비겁하거나 우둔하지 않아야 함. 월급은 없으며 하루에 두 번 식사를 제공할 수 있음. 그러나 그것마저 없을 수도 있음.? 유머가 넘친다.
삶으로 보여준 부활신앙의 아름다움
코르작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현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충실할 뿐이다. 모두가 떠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자신에게 딸린 고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신념이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화 시작부분에 코르작은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멘트를 한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한다면서 카드놀이와 경마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자신만을 위하면서 희생하는 척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이는 가식적이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희생이라 말할 수 없다.?
슐츠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길에서 우연히 불심검문에 걸린 박사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주고, 유대인 부자클럽에 초대하여 즉석에서 기부금을 모아주었다. 유대인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박사를 구하기 위해 독일군을 매수하고 스위스 여권까지 마련한 슐츠는 박사가 보호하는 어린 고아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선생님은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피신하십시오?라고 했다. 박사는 반문한다. ?무슨 할 일, 이것 말고 다른 무슨 할 일??
누구든 죽음 앞에서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만을 보존하고 맡겨진 일을 포기하려 한다면 이는 적어도 부활신앙과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박사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는 가련한 존재들이어서 죽음의 위협에 두려울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박사는 어린 고아들과 함께하는 것이 곧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로 여겼고 그 일에 결코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만일 그가 자유진영으로 도피하여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 고아들은 코르작이 아니더라도 보호되겠지만 그가 아니면 200명의 유대인 고아들은 누가 돌볼 수 있었을까.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일이며 그 선택은 곧 우리가 떠나 온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神을 추구하는 양식은 다르겠으나 동일한 것은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헌신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박사의 생애가 어떻게 마감되었는지를 목격한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이 후회 없는 삶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뻐하며 그분께 달려간다. 하느님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 점에서 시대적,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코르작 박사를 ?아름다운 순교자?라 칭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코르작과 200여 명의 고아들의 삶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탄 열차 칸이 수용소로 향하는 앞 칸들과 분리되면서 어느 평원에 홀로 멈추어 선다. 이내 열차 문이 열리면서 코르작 박사와 아이들이 뛰쳐나와 운무로 가리어진 넓은 평원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해방된 모습이었다. 박사와 어린 고아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달려가는 그곳에는 희미하나마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는 하느님의 자리, 구원의 희망을 상징한다. 온갖 위험과 사경을 헤매면서 도달한 장소에 한 그루 나무가 우뚝 서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지대, 곧 구원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아이들이 코르작의 손을 잡고 이젠 슬픔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계신 행복한 잔치에 들어간 것이다.
하태수 /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이며, 예수회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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