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essEngine ver.2

글 수 1,138

등록 :2016-04-17 19:36

 

평화협정에 대한 찬반은 극과 극이다. 반대하는 쪽은 평화협정 때문에 미군이 철수하면 공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찬성하는 쪽은 미·북 평화협정이 현실적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1960~80년대에 북한이 제안한 평화협정은 그 조건과 당사자 면에서 남한이 받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평화협정의 조건과 당사자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이전과 달랐다.

1961년 5월 남한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북한은 미군철수 조건부 남북평화협정을 제안했다. 1974년 3월에는 미·북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이 북베트남과 직접 ‘파리 평화협정’ 문제를 풀어나가는 걸 보고 그랬을 것이다. 그 후 80년대 말까지 북한은 평화 문제는 미국, 통일 문제는 남한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2년 1월21일 뉴욕에 간 김용순 국제비서는 아널드 캔터 미 국무차관에게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우리와 수교해 달라.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동·서독 통일과 동유럽 공산주의체제 붕괴를 지켜보면서, 주한미군 주둔을 조건으로 하고서라도 미국으로부터 체제 유지를 보장받으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제정세가 달라졌고 흡수통일 공포도 사라진 뒤인 2000년에도 북한은 같은 입장이었다. 6·15 남북정상회담 후 10월25일 평양에 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에게 김정일 위원장은 “탈냉전 후 미군은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92년 1월 김용순 뉴욕 발언의 연장선상에서 미·북 수교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 때인 1992년 주한미군 주둔을 조건으로 하는 미·북 수교 요구가 나온 뒤 2000년에 김정일 위원장도 계속 그 입장을 견지했다는 건 주목할 일이다. 이건 북한이 탈냉전 후 동북아 국제질서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됐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김정은 제1위원장도 그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50년대 초 3년간 전쟁을 했던 미·북이 수교하려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수교와 평화협정은 표리의 관계다. 작년 10월 리수용 북한 외무상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북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작년 말 미·북이 뉴욕 비밀접촉에서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2월1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비핵화와 평화협정 일괄협상’을 제안했다. 그러자 북한은 3월22일 다시 미·북 평화협정을 주장했다.

그런데 평화협정은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화협정 협상에는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인 중국과 실질 당사자인 한국도 ‘10·4 남북정상선언’에 따라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 북한이 미·북 평화협정만 고집하면, 법리상, 평화협정과 미·북 수교 협의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

지난 4월7일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회의에 참가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북한과의 불가침조약을 언급했다. 대북제재 국면에서 나온 이런 발언은 평화협정 협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차 중·미 협조로 ‘비핵화와 평화협정 일괄협상’이 전개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평화협정 협의 대책을 미리 마련해 놓아야 한다.

먼저 평화협정의 조건인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북한이 지금도 90년대 이후 김일성-김정일 입장에 서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이 ‘김정일 유훈’이기도 한 10·4 선언을 따를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10·4 선언 4항은 관련 3국 또는 4국이 한국전쟁의 공식 종료를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이건 정전협정 종료와 평화협정 협상에 남한이 당사자로 참여하기로 남북이 합의했다는 뜻이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만약 김정은 시대 북한이 90년대 이후 김일성-김정일 입장을 뒤집고 80년대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원하는 평화협정은 협의 자체를 시작할 수 없다. 이게 오늘날 동북아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 전 통일부 장관


번호
제목
글쓴이
1098 초대! 『벤저민 레이』 출간 기념 마커스 레디커 전 지구 인터넷 화상 강연회 (2022년 2월 19일 토 오전 11시)
도서출판 갈무리
2022-02-05 3381
1097 새 책! 『감각과 사물 ― 한국 사회를 읽는 새로운 코드』 김은성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2-01-27 3552
1096 새 책! 『벤저민 레이 ― 노예제 즉시 폐지를 최초로 주창한, 12년간 선원이었던 작은 거인의 파레시아』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12-30 3733
1095 초대! 『대서양의 무법자』 출간 기념 마커스 레디커 전 지구 인터넷 화상 강연회 (2021년 12월 18일 토 오전 11시)
도서출판 갈무리
2021-12-16 3768
1094 새 책! 『사물들의 우주 ― 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스티븐 샤비로 지음, 안호성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12-10 3733
1093 새 책! 『대서양의 무법자 ― 대항해 시대의 선원과 해적 그리고 잡색 부대』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11-26 3907
1092 새 책! 『피지털 커먼즈 ― 플랫폼 인클로저에 맞서는 기술생태 공통장』 이광석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1-10-28 4037
1091 새 책! 『도둑이야! ― 공통장,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 피터 라인보우 지음, 서창현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10-14 4193
1090 새 책! 『존재권력 ― 전쟁과 권력, 그리고 지각의 상태』 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최성희·김지영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08-25 4738
1089 초대! 『재신론』 출간 기념 저자 리처드 카니 화상 강연회 (2021년 8월 14일 토 오후 6시)
도서출판 갈무리
2021-08-06 4648
1088 새 책! 『재신론』 리처드 카니 지음, 김동규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08-04 4660
1087 새 책!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김은주·김재희·유인혁·이광석·이양숙·이중원·이현재·홍남희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1-07-11 4999
1086 새 책! 『미지의 마르크스를 향하여 : 『자본』 1861~63년 초고 해설』 엔리케 두셀 지음, 염인수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
2021-07-11 5148
1085 새 책!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 강우성·김성호·박인찬·유선무·이동신·정희원·황정아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1-06-03 5599
1084 새책!『까판의 문법 ―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조정환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0-03-09 25252
1083 새책!『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조정환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20-03-09 24964
1082 1월 14일 개강! 《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의 저자 염운옥의 인종주의, 낙인과 폭력을 넘어서
다중지성의 정원
2020-01-14 15798
1081 2020년 1월 2일! 다중지성의 정원의 철학, 미학, 문학 강좌 개강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2019-12-27 22893
1080 다중지성의 정원 2020. 1. 2. 강좌 개강!
다중지성의 정원
2019-12-19 24976
1079 새책!『비평의 조건 ― 비평이 권력이기를 포기한 자리에서』(고동연·신현진·안진국 지음)
도서출판 갈무리
2019-11-16 21165

자유게시판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