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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10-06 18:33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맞물려 서울에서는 ‘제3회 서대문구 노동인권영화제’가 열렸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혁 태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노동인권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여서 더욱 소중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상업 영화들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보석처럼 빛나는 영화들 <그림자들의 섬>(김정근 감독), <이상한 나라의 서비스>(태준식), <무노조 서비스>(이병기), <위로공단>(임흥순), <산다>(김미례), <소수의견>(김성제)을 모두 한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날 <소수의견>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다. 원작자 손아람 작가가 부산영화제에 내려가 있어 내가 ‘대타’로 참석한 자리였다. 또 다른 참석자는 세월호 희생자 세희 아버지 임종호씨였다. 왜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소수의견>과 세월호 사건을 하나로 묶었을까? 두 사건 모두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됐다면 일어나지 않을 비극이었고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어쩌면 영원히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래서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엄중한 질문을 던지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말할 때마다 창피할 정도로 목이 메고 눈물이 나왔는데 세희 아빠는 너무 말을 잘했다. 농담을 섞어가며 관객들을 적당히 웃기기도 했다. 청중들이 의아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부연 설명을 했다.

“세희 아빠가 마치 활동가처럼 너무 말을 잘해서 이상하죠? 본래 민주노총 금속노조 간부였거든요. 46일 단식했던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도, 생존 학생 예진이 아빠 장동원씨도 모두 금속노조 조합원이었습니다. 보수 언론은 이런 사실을 두고 ‘역시 순수한 유족이 아니었다’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이게 당연한 일입니다. 안산은 대표적 노동자 밀집 도시이거든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날에도 저는 안산노동대학 강의를 하러 단원구에 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노동자들의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가정에 들이닥친 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 모든 사건들이 노동자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노동문제가 배제당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관객들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였다. 젊은 관객이 옆 친구에게 “딸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소곤거리는 입모양이 내 눈에도 읽혔다. 세희 아빠가 말하는 동안 옆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준비했다.

“세월호 유가족들 농성장에는 계속 울기만 하는 분도 계시고, 아무 말도 못하는 분도 계시고, 말할 때마다 울음이 터지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유가족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세희 아빠 같은 분들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씩씩하게 견디는 분들이 없었다면 유가족 조직은 아마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다른 유가족들에게 항상 힘을 주고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아빠가 있었어요. 한번은 그분이 신부님과 같이 천막을 나갔는데 밖에서 신부님이 ‘힘들죠?’ 한마디 건네니까 그 아빠가 거의 폭발하듯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다른 유가족들 앞에서는 힘든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던 분이 그 한마디 말에 짐승처럼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절대로 울컥하지 말고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연습하고 있는데…. 옆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던 세희 아빠의 말소리가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뒤집혀진 배가 눈앞에 보였어요. 그 안에 분명히 우리 아이가 있는데…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세희 아빠는 기어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극장 안이 한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그날 밤, 헤어지면서 세희 아빠 임종호 금속노조 조합원 ‘동지’는 자기 손목에 차고 있던 세월호 추모 노란색 고무 팔찌를 끌러 내게 주었다. 세월호 사건의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색바랜 그 팔찌를 풀지 않을 것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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