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20:39수정 : 2014.05.09 13:12

8일 오후 ‘미안해요 잘가요’라는 글귀가 쓰인 노란색 띠로 덮인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을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해 임옥상미술연구소 직원들이 만든 것이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박홍규 교수

오로지 나를 용서하지 마라는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쓰기로 했지만,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미안하고 부끄럽고, 이런 글을 썼다고 나를 용서하지도 마라. 대통령부터 초등학생까지 모두들 세월호 사고를 자신의 문제로 삼아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고백하기커녕 오로지 남 욕을 하며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만 떠들어대니 늙고 못난 나라도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살인자다. 내가 사는 이 나라, 내가 사는 세상의 자랑이라는 과학기술이니 경제성장이니 국가사회니 학문 예술 따위가 아이들을 죽였다. 그래서 사고 이후 수치심과 죄의식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집에 처박혀 울며 지냈다. 수업을 하면서도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고, 아이들 눈을 바로 볼 수도 없다. 평생 처음으로 수면제라는 것을 먹어보아도, 시골길을 몇 시간 미친 듯 헤매어도, 물속에 코를 처박아 그 고통을 느껴보아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런 돈벌이 경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아니길 빌었다만 너무나도 무력해 이런 세상밖에 만들지 못하고 결국은 그렇게 어이없이 죽게까지 했다. 아무런 쓸모없이 나이만 먹은 내가 마땅히 죽었어야 했거늘 아무 죄도 없는 어린 너희를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하다니. 정말 나를 용서하지 마라.

 

돈에 미친 자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니
국민들도 모두 돈에 미쳐
돈에 미친 배를 타고 다니다가
그 돈의 미친 무게에
뒤집어졌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 나라다
정말 돌았다
나도 그랬다


이 글을 청탁한 사람이나 독자들은 나에게 사건의 법적 분석을 기대할지 모른다. 누구를 어떤 법으로 최대한 처벌할 것인가 하는 등이지만 대통령이 살인자 운운한 선장이나 선원들 기타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이 어떤 것일지는 지극히 불명하고 대법원까지 갈 긴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그들에 대해 함부로 떠들 일이 아니다. 천박하고 교활한 그들이 돈으로 법을 악용하며 정의를 빙자해 법을 농단하여 결국 흐지부지하게 끝나게 만들 것이 뻔하지만 그 점에 철저히 대비하기커녕 언론 플레이로 위기만을 넘기려고 권력의 눈치만을 보는 무능한 수사당국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국민이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하물며 그 배의 진짜 주인이라는 자를 비롯한 배후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의 추궁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그런 법적 차원을 떠나 이 나라의 엘리트라는 자본가, 경영인, 종교인, 예술가, 정치가, 고급공무원 등등의 자들과 함께 살았다는 점에서 나도 죄인이다. 종교도 예술도 학문도 오로지 돈벌이 수단이었는데 그렇지 않은 체했다. 그러니 나를 용서하지 마라. 대한민국은 그런 자들의, 그런 자들을 위한, 그런 자들에 의한 나라다. 그런 자들이 이 나라의 뺑소니 선장이고 선원들이다. 돈에 미친 자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니 국민들도 모두 돈에 미쳐 돈에 미친 배를 타고 다니다가 그 돈의 미친 무게에 뒤집어졌다. 오로지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 나라다. 정말 돌았다. 나도 그랬다. 한국인의 물질지향 경향이 세계 최고라는 수없이 많은 조사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흔히들 너무 못 산 탓이라고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다. 양반이니 쌍놈이니 빈부격차는 심했고, 그 때문에 돈에 대한 욕심은 지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이 나라의 유일한 꿈이 되었다. 돈에 새긴 왕은 말할 것도 없고 율곡이니 퇴계니 하는 선비들까지도 모두들 엄청난 부자로 수 백 명 노비를 거느리고 수십만 평 지주로 가난한 백성 위에 군림한 점이 오욕으로도 보인다. 모든 것이 돈으로 썩었다. 윗대가리에서 밑둥치까지 철저히 썩었다. 나도 썩었다. 빈부격차의 해소 없이는 돈에 미친 세상이 고쳐질 수 없다. 그런 세상을 더욱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말했어야 하는데 기껏 소박한 자율의 삶이니, 자유 자치 자연이니 하며 시골에 숨어 살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죽였다. 그러나 지금도 다른 대안을 모르고 울기만 하는 못난 나를 용서하지 마라.

  

돈 이야기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TV나 신문 잡지나 인터넷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살았지만 지난 사고 이후에는 24시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사실 보도 외에 앵커니 전문가니 뭐니 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돌려버렸다. 신문이나 TV 등에 나와서 사건의 분석이나 대안에 대한 천재적 전문가로서의 재주, 또는 사람들을 슬퍼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드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천부적 주술가로서의 재주 따위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돈 이야기, 경제, 성장, 기업, 특히 규제완화에 무조건 편들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닌가? 이런 황당무계가 세월호 참사를 낳지 않았던가?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는 사고 이전에 계속 규제완화에만 집중하지 않았던가? 그 사고는 바로 그 규제완화가 낳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당연히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 앞의 모든 사고도 규제완화가 낳은 것이 아니었던가? 전문가라는 자들은 자기 전문 분야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사건을 분석하고 대안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마치 그들의 전문성을 무시하여 사고가 난 듯이 보복이라도 하는 듯이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장이나 선원이었다면 과연 아이들을 모두 구해냈을까? 나라면 구해냈을까? 구원파라는 것이 진짜 기독교가 아니라고 기독교 전문가들이 야단들이고 전통의 유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유교 때문에 이런 사고가 생겼다는 분석도 있다. 가령 사고 원인의 하나가 유교식 권위주의와 맹종이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생도, 어른도, 전문가도, TV도, 인터넷도, 그 무엇도 믿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사고가 터질 때마다 한동안 요란스러웠다가 곧 본래대로 되돌아가는 세상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겉으로 드러난 본래란 예능과 드라마로 야단법석인 TV를 비롯한 대중문화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 잠깐 쉬었던 것 외에 다른 변화는 없다. 마치 그런 것들을 잠깐 안 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예능과 드라마가 아예 없는 나라도 많다. 아니 대부분의 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다. 먹는 방송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다시 없다. 선전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없다. 방송 전체가 상업이다. 시청률 운운하지만 시청률을 이유로 방송을 타락시키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런 거짓 방송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나라를 죽였다. 무엇보다도 방송이 반성해야 한다.


근본적 구조개혁이 필요하지만 비정규 문제만이라도 해결하자. 비정규직 선장이라는 것이 다른 나라에는 없다. 직장인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나라는 세상에 대한민국밖에 없다.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아 늘어난 이유도 경제성장, 기업발전, 규제완화 따위의 구호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 월급의 반 정도를 받는 것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저 엄청난 격차를 없애지 못하면 세월호 사고는 다시 터진다. 이런 격차도 대한민국밖에 없다. 대통령 말마따나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것이 비정상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말하듯이 규제가 비정상이어서 그 완화로 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화가 비정상이어서 정상을 위한 규제로 돌아가야 한다. 야만의 비정규, 격차, 범죄, 무능, 무사안일, 안전 불감증, 물질주의, 경제물신, 경쟁주의, 성장 독재 따위를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야만의 돈벌이를 규제해야 한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아직 야만적 무지 몽매에 젖어있는 이 나라에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의 생명과 안전, 자유와 평등, 자치와 참여의 보장이다. 자신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사회질서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엘리트들이 혼란에 빠져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재해 구제에 실패하는 것과 달리, 자율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시민만이 재해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세울 수 있다. 그래야 이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있을 수 있고,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썼다고 나를 용서하지 마라. 결코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불난 남의 집 구경 하듯이 요란스레 떠들어대다가 내일이면 다 잊는 저 허수아비 쓰레기 욕쟁이처럼 굴지도 모르는 나를 제발 용서하지 마라.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