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4년 02월 23일 11:47:08                                            온라인뉴스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애서 코르작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23일 MBC 예능프로그램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전쟁 때문에 굶주리고 외로운 아이들을 보살핀 코르작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코르작은 당시 독일 나치가 폴란드의 유대인 학교를 학살했을 당시 아이들을 감싼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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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TV 서프라이즈> 방송화면 캡처

 

아이들을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태웠을 당시 그는 “아이들이 기차에 타 무서워하면 누군가 손을 잡아줘야 하지 않겠냐. 난 결코 아이들을 떠나지 않겠다”며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코르작은 폴란드의 아동작가이며 교육자였다. 아이들을 사랑했고 그의 이러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해 1979년을 세계 아동의 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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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개 : 〈닥터 코르작〉

하태수 /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신부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닥터 코르작〉은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발생했던 유대인 수난을 배경으로 유대 고아들과 함께하다 죽임을 당한 폴란드 의학자 야누쉬 코르작 박사에 관한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유대인을 대신해 희생된 대표적인 폴란드인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방에서 굶어 죽은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이 그분이다. 전쟁 중이라 다 밝히지 못했으나 대리희생된 익명의 인물들이 적잖이 존재하였으리라. 난세亂世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의로운 이들은 난세와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고 어디서든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부드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연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폴란드인 코르작은 바르샤바에서 200명 유대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독일 의학계에서도 알려진 의학자였다. 1939년 세계대전을 시발점으로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진주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은 예외 없이 유대인 거주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코르작도 고아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간다. 거주지는 어린아이들의 최소한의 생계유지도 어려운 장소였고 들려오는 총성 소리에 고아들은 잠을 설친다. 스테판 여사와 젊은 두 봉사자는 아이들을 돌보고 코르작은 체면을 돌보지 않는 광대 짓을 하면서까지 여유 있는 자들을 찾아 음식과 기부금을 부탁한다. 유대인의회를 찾아가 고아들의 안전을 부탁하지만 의회 사람들의 안전마저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아원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가고 병든 사람들은 길거리와 막사에서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박사는 아이들이 이 불행한 현상들을 보지 못하도록 정문과 밖으로 난 모든 창문을 폐쇄하였으나 이내 닥칠 현실을 외면만 할 수 없어 고아들이 죽음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연극을 마련한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공포로 우는 아이를 가슴으로 안아주고 그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자신의 침대에서 재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박사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에게 탈출을 종용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떠나는 상황에서, 폴란드인이 유대인 거주지에 남아 고아들과 생사를 함께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어느 부인의 요청에 박사는 ?어찌 당신마저 나를 그렇게 보는가. 어미가 그러하듯 나도 그 아이들을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한다. 결국 전쟁이 확대되면서 독일군에 의해 박사와 고아들은 마치 불량한 재고품들이 처리되듯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실리고 그들 모두가 1942년 트레브랑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리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고아들 편에 선 코르작

어린 고아들은 코르작의 보호 아래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우거진 숲과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냇물과 후견인들 속에서 고아들은 부모 없이도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유대인 거주지로 옮겨가야 했던 그들은 두려운 눈길로 서로를 확인하면서 전쟁의 아비규환을 목격한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냉정하고 어둡게만 보이는데, 고아들은 그런 현상들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의 손길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을 놓치면 의지할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만큼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 무자비한 전쟁에서 누군가 보호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대상들이 바로 폭력에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고아들이다. 영화는 코르작 박사가 왜 유대인 고아들을 돌보게 되었고 그들의 죽음에 동참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나 그는 이미 언급된 어린 고아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어린 고아들에게 측은지심을 가졌고 그들에 관한 일에서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코르작은 평소처럼 창문틀에 놓여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 바로 맞은 편에 보초를 서던 독일 병사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보초병은 만만한 듯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총구를 겨누려 한다. 서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이 흐르면서 그의 몸은 얼어붙고 만다. 이때 보초병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해서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 불행한 시대에는 오발탄으로도 사건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르작은 자신이 고아들 편에 서 있는 한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경계선에 머물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코르작

전쟁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코르작 박사에게 최악의 상황은 전쟁보다 오히려 술 취한 사람이 아이들을 때리는 부덕한 행위였다. 그것이 더 직접적으로 고아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폭력은 그들의 영혼에게 독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사랑으로 키워지고 존엄성 또한 지켜지기를 바랐다. 코르작은 유대인의회 책임자에게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최소한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권익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고아들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했지만 제공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는 쉽게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유머와 위트로 아이들을 웃기기도, 또 희망을 주기도 한다. 고아소년 요셉은 폴란드 가정에 위탁된 같은 처지의 소녀 에바를 사랑했으나 전쟁은 그들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절하여 죽고만 싶다는 요셉에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자 때문에 죽기에는 너무나 멋진 남자다.? 요셉은 죽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고아원이란 폐쇄된 공간에서 무료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교육이 아이들에게 필요했으므로, 늦은 밤에 그는 다음과 같은 구인광고문을 작성한다. ?고아원에서 근무할 교사를 구함. 비겁하거나 우둔하지 않아야 함. 월급은 없으며 하루에 두 번 식사를 제공할 수 있음. 그러나 그것마저 없을 수도 있음.? 유머가 넘친다.

삶으로 보여준 부활신앙의 아름다움

코르작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현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충실할 뿐이다. 모두가 떠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자신에게 딸린 고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신념이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화 시작부분에 코르작은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멘트를 한 적이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한다면서 카드놀이와 경마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자신만을 위하면서 희생하는 척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이는 가식적이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희생이라 말할 수 없다.?

슐츠라는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길에서 우연히 불심검문에 걸린 박사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주고, 유대인 부자클럽에 초대하여 즉석에서 기부금을 모아주었다. 유대인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박사를 구하기 위해 독일군을 매수하고 스위스 여권까지 마련한 슐츠는 박사가 보호하는 어린 고아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선생님은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피신하십시오?라고 했다. 박사는 반문한다. ?무슨 할 일, 이것 말고 다른 무슨 할 일??

누구든 죽음 앞에서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만을 보존하고 맡겨진 일을 포기하려 한다면 이는 적어도 부활신앙과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박사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는 가련한 존재들이어서 죽음의 위협에 두려울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박사는 어린 고아들과 함께하는 것이 곧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로 여겼고 그 일에 결코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만일 그가 자유진영으로 도피하여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 고아들은 코르작이 아니더라도 보호되겠지만 그가 아니면 200명의 유대인 고아들은 누가 돌볼 수 있었을까.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일이며 그 선택은 곧 우리가 떠나 온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神을 추구하는 양식은 다르겠으나 동일한 것은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헌신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박사의 생애가 어떻게 마감되었는지를 목격한다.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이 후회 없는 삶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뻐하며 그분께 달려간다. 하느님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 점에서 시대적,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코르작 박사를 ?아름다운 순교자?라 칭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코르작과 200여 명의 고아들의 삶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탄 열차 칸이 수용소로 향하는 앞 칸들과 분리되면서 어느 평원에 홀로 멈추어 선다. 이내 열차 문이 열리면서 코르작 박사와 아이들이 뛰쳐나와 운무로 가리어진 넓은 평원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해방된 모습이었다. 박사와 어린 고아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달려가는 그곳에는 희미하나마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는 하느님의 자리, 구원의 희망을 상징한다. 온갖 위험과 사경을 헤매면서 도달한 장소에 한 그루 나무가 우뚝 서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안전지대, 곧 구원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아이들이 코르작의 손을 잡고 이젠 슬픔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계신 행복한 잔치에 들어간 것이다.

하태수 / 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이며, 예수회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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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아이들
- 지은이 : 야누슈 코르착
- 옮긴이 : 노영희
- 펴낸곳 : 양철북 (2002.12.18)
- 책값 : 8500원

 


 ㄱ. 1942년 8월 6일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터지고 유대사람이 하나둘 끌려가던 1942년 8월 6일, 야누슈 코르착 님은 아이들 손을 잡고 폴란드 거리를 걸었습니다. 고아원 교사 스테파니아 님도 아이들 손을 잡고 걷습니다.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버린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단출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트레블링카 가스실이 마지막역인 화물차에 올랐습니다.


  코르착 님을 아는 동무들은 독일군 손아귀에서 코르착 님이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애를 썼지만, “당신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한데 이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면서 폴란드 거리 곳곳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어서 보살피다가 가스실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에 의사 자격을 얻은 뒤 러일전쟁 때 군의관으로 징병된 코르착 님은 전쟁을 겪은 뒤, “전쟁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국가든 참전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다치고 죽고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아이들이 어른들한테 빼앗기고 잃어버린 ‘우러름’, ‘사랑, ‘믿음’을 되돌려 주고자 애쓴 사람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폴란드사람입니다.


아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단 하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35쪽)


  “아이들을 알려고 하기 앞서 나부터 먼저 알려고 애쓰라”고 말하는 코르착 님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으나 의술만으로는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고 느껴 교육자가 되고, 고아원장이 된 코르착 님입니다. “비밀을 캐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 어린이한테 지켜 주어야 할 권리를 말하고, 몸으로 한껏 지키려 애쓴 코르착 님입니다.


아이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을 때
그 숟가락을 빼앗아 버린다면,
단지 물건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던
손의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38쪽)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 어른일까요. 우리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누리거나 얻도록 힘을 쓰거나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일까요. 아이들 권리조차 지켜 주지 못하면서, 아이들 손가락에서 숟가락마저 빼앗아 버리는 못난이는 아닐는지요.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내갈기거나 손바닥을 펴서 뺨따귀를 때리는 바보는 아닐는지요.

 


  ㄴ. 아이한테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주 알뜰히 ‘좋은 책’을 기꺼이 사줍니다. 돈이 얼마가 들든 그다지 마음쓰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 책들을 다 읽어내고 속으로 삭히는지는 그다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깜냥으로 끝없이 책을 사줍니다. 그런데 이런 ‘책 사주기’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끊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학원교재, 문제집, 참고서, 학습지뿐입니다. 이제는 과외비에 돈 대느라 바쁩니다.


  책이 아닌 문제집과 참고서를 어버이한테서 받는 아이들은 대학바라기만 합니다. 아니, 대학바라기만 하라는 뜻으로 아이들한테 문제집과 참고서를 잔뜩 안기는 어버이입니다. 다른 책 들출 겨를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책은커녕 영화나 연극을 느긋하게 누리도록 이끌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아니, 아이들한테 꽃내음이나 나무내음 맡도록 북돋우지 않는 어버이입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아이들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숲에서 멀어지고 들에서 멀어집니다. 바다와 하늘에서 멀어지는 아이들이요, 논과 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까맣게 모르는 채 교과서를 비롯해서 문제집과 참고서에 코만 박는 아이들입니다.


무슨 놀이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42쪽)


  내 어릴 적에, 내 어머니가 책을 사주신 일은 아주 드뭅니다. 아버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책을 얼마 안 읽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느라 바빴거든요. 놀이란 놀이는 다 하면서 놀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좁은 우리에 틀어박혀서 주인이 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짐승과 오늘날 아이들이 무엇이 다를까 잘 모르겠습니다.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짐승들은 이녁 삶과 달리 ‘사람 눈에는 더럽게 보이고 살도 디룩디룩 찝’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이들은 머릿속에 지식은 많이 들어가지만 사람답게 자라나는 사랑과 꿈은 익히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요.


  책을 푸짐하게 사주는 어버이가 그 책들을 아이와 함께 읽고 즐기나요? 아닙니다. 그런 어버이는 아주 드뭅니다. 어린이책에 담긴 깊고 너른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어버이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아이가 어리니까 사서 읽히게 하는 것’뿐인 어버이가 거의 모두입니다. 교양이니 교훈이니 학습이니, 또 독서훈련이니 글쓰기지도이니 하는 이름에 휘둘려 아이도 어버이도 제자리를 모르고 제길하고 동떨어집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모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사람다운 길을 잃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스스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꿈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이녁 스스로 사랑과 꿈을 한껏 즐기거나 펼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안일조차 안 하면서 큽니다. 아이들은 밥하기나 반찬짓기조차 안 하면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걸레빨기나 설거지를 제대로 못 배웁니다. 아이들은 씨앗 한 톨 심어서 거두는 손길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구경조차 못합니다. 아이들은 꽃내음과 나무내음을 모르면서 어른이 되는데, 어른들도 꽃내음과 나무내음이 이녁 몸과 마음에 어떻게 이바지하는가를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하늘빛을 보지 않아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바람맛을 살피지 않아요. 어버이가 낳아서 아이가 태어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커서 어른이 되면 사랑을 어떻게 하고 꿈을 어떻게 키워 이녁 ‘새 아이들’을 만날 때에 즐거운가를 모릅니다. 아이와 함께 누리는 밥과 옷과 집을 어떻게 건사할 때에 아름다운가를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돈을 벌 생각과 돈을 쓸 생각만 하면서 자라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돈에 얽매이기만 하는 하루를 보내는 아이요 어른입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바탕을 모르지요. 삶을 가꾸는 넋을 모르지요. 삶을 빛내는 눈길을 모르지요.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그 안에는 수백의 다른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난제이고,
서로 다른 과업이며,
서로 다른 염려와 관심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58쪽)

 


  ㄷ. 사람다운 길


  국제연맹은 1924년에 어린이 인권선언을 뽑고 얼마 뒤에 다시 선언글을 만들지만 ‘말’뿐인 껍데기였답니다. 코르착 님은 국제연맹 선언문이 있기 앞서부터,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 호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코르착 님도, 코르착 님네 고아원 아이들도 죽은 지 기나긴 나날이 흘러 1989년, 비로소 ‘어린이 인권협정’이 새롭게 나옵니다.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 ‘어린이 인권’을 법으로 다스릴 장치를 마련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권협정이 있어도 한국에서 살아가거나 자라는 어린이들 모습은 ‘인권을 누리는 모습’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또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온갖 짐과 굴레에 갇힌 채 숨조차 제대로 못 쉬며 허덕여요. “사실은 어린이들은 인류, 국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고, 현재 여기에 있는 사람들”인 줄 어른들이 모르기 때문일까요.


“엄마는 어른이 차를 엎지르면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엎지르면 화를 내요!”
아이들은 불공평한 대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울음을 터뜨리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고 성가신 것으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무시할 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또 칭얼거리고 징징대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쓰려고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53쪽)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손길 내밀어 도울 줄 압니다.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이웃과 동무 모두 어떻게 지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이웃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내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입니다. 교육책이나 육아책 백 권 천 권 읽지 않아도 돼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 자리에 있던 이들이 책을 많이 읽었기에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들 앞에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누리려 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버이와 어른들 곁에서 물끄러미 삶을 지켜보면서 삶을 배우고, 하루하루 꿈을 키웠습니다.


  풀을 베고 열매를 얻으면서 삶을 배웁니다. 풀노래를 듣고 하늘숨을 마시면서 삶을 익힙니다. 냇물이 들려주는 노래와 바다가 베푸는 잔치를 맞아들입니다. 제비춤과 나비춤을 바라보면서 신나는 놀이를 깨닫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잘못을 따지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눈치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56쪽)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립니다. 교사들은 ‘사랑 매’라느니 ‘체벌’이라느니 하면서, 마치 ‘교육’을 하는 듯 내세우지만, 교사들이 하는 짓은 교육이 아닌 ‘훈육’이거나 ‘훈련’입니다. 그저 아이들을 길들일 뿐입니다. 아이들이 주먹다짐과 발길질에 길들이도록 몰아세울 뿐입니다. 어른이라는 핑계로 아이들한테 낮춤말과 반말을 일삼습니다. 어른이라고 을러대면서 아이들을 때리고 꾸짖고 들볶고 괴롭힙니다.


  그런데, 이런 어른들 모습 가만히 보면, 술 마시고 담배 태우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이 다음으로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극장에 가거나 자가용 몰고 관광지 찾아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해요. 우리 어른들은 오늘날 이녁 스스로 수렁에 갇힌 채 허우적거리기만 해요. 즐겁게 웃지 않는 어른이요, 기쁘게 노래하지 않는 어른이에요. 삶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어른이 없어요.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대중가요를 따라부를 뿐이에요. 먼먼 옛날부터 어느 시골 어느 마을이건 누구나 일노래를 삶노래와 사랑노래와 꿈노래로 스스로 지어서 불렀는데, 이제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서도 스스로 삶을 노래하지 않고 사랑도 꿈도 노래하지 않아요.


  사람다운 길은 아주 사라졌을까요.

 


  ㄹ. 흐르는 냇물


  코르착 님이 들려준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한테는 예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어요. 윗물, 그러니까 어른들이 맑고 빛나며 아름다워야 아랫물인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고 따르고 우러르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시원한 윗물일 때에 시원한 아랫물입니다. 따사로운 윗물일 때에 따사로운 아랫물입니다. 착하며 참다운 윗물일 때에 착하며 참다운 아랫물입니다.


  청소년범죄는 청소년이 못나거나 말썽만 일으키기에 터지는 범죄가 아닙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흉내내고 따라하는 범죄입니다. 청소년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터전을 만들고 만 어른들 탓입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재산차별, 생김새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이 곳곳에 퍼진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면서 자랄까요. 이렇게 ‘차별 넘치는 나라’에서 동무들끼리 따돌리고 괴롭히는 짓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무심한 어른은 화가 났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 물건들을 꺼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머니가 늘어진다거나 서랍 속에 복잡하다는 이유로요. 다른 사람의 소중한 재산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다룰 수 있나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겠어요? 그것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휴지 조각이 아니라 소중한 물건이고, 눈부신 꿈의 조각입니다. (131쪽)


  아이들을 아이들답게 받아들이고 껴안으며 토닥거리면서 감쌀 수 있는 마음이 소담스럽습니다. 고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아이들에 앞서 어른부터 스스로 좋아요.


  고운 마음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른 스스로 즐겁습니다.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면, 사회에 어두운 기운 서리지 않아요. 어른 스스로 즐겁게 삶을 누리지 않으니, 이 나라 이 사회 이 마을 이 학교에 갖가지 어두운 기운이 또아리를 틉니다. 어른들 스스로 잔뜩 만들어 놓은 ‘차별’이라는 굴레 때문에 아이들이 슬피 우는데, 이 울음소리를 못 듣거나 안 듣는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낮과 밤, 여름과 가을,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고,
뜰에는 나비가, 하늘에는 새가 있고,
꽃 색깔이나 사람들 눈 색깔이 저마다 다르듯이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차이를 싫어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다양성을 불편해 합니다. (146쪽)


  배움책 《아이들》(양철북,2002)에는 코르착 님이 우리한테 건네는 속깊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길 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허리를 굽히지 말아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서로 같은 키가 되어 같은 눈높이가 되셔요. 아이들은 차별이나 따돌림도 싫어하지만, 허리를 굽실거리거나 알랑거리는 사람도 못마땅해요.


  아이들은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른들도 짐승우리에서 살고 싶은 생각 없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은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고 싶어요. 어른들도 따순 보금자리에서 살 때에 즐거우리라 느껴요.


  사랑받고 싶은 아이들이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아이들이에요. 어른들도 사랑받을 때에 흐뭇하고, 어른들도 이웃하고 사랑을 나눌 때에 하하호호 웃음꽃 터뜨리면서 삶이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리라 느껴요. 아이들과 걸어갈 길에서 씩씩하게 두 손 맞잡으면서 노래해요. 아이들과 가꿀 길을 맑은 눈빛과 밝은 꿈으로 보듬어요. 4337.11.8.달/4346.8.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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