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양민학살의 양상과 실상

 

 

1. ‘양민학살’이라는 용어 선택에 대한 문제제기

 

‘양민 학살이 아닌 민간인 학살’

이제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개념보다는 양민 학살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사용해 왔다. 양민 학살을 굳이 사용하는 것은 거창 학살과 같이 학살당한 자들이 한 결 같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이 무고하게 희생된 ‘양민’이라는 점을 강조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서 이 구별은 용납되지 않는다. 굳이 구별하는 저변에는 양민은 학살되어서는 안 되지만 양민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곧 빨갱이 등은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다.

 

 

잘못이나 지은 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이들이 법률에 따른 정식 재판 절차에 의해 엄밀히 다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비록 전쟁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이는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의 심대한 침해 행위가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후 이 곳 남한 땅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국가의 폭력이 횡행했다. 설사 국가 보안법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식 재판 절차에 의해 사법 처리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학살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 행위이다.

 

 

민간인 학살은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이라는 집합체의 성원(가족을 포함하여)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 교전중의 살인 행위는 제외하며, 재판에 의한 처형행위는 학살에 포함시킨다. 이는 헬렌 페인이 유엔 협약의 제노사이드(genocide) 정의를 재 정의한 “한 집합체 성원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재생산의 정지를 통해 직·간접으로 그 집합체의 신체들을 멸한다는 목적으로 희생자들의 항복 또는 위협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의해 속행되는 행위”라는 넓은 의미의 정의 가운데 살인 행위에 국한하여 한정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공비, 통비, 보도연맹원 등을 제외시켜 ‘양민’으로 범주화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거절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을 가졌다고 해도 양민의 범주에서 제외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여 양민의 범주를 확대하여 민간인으로 통칭한다. 그러므로 양민 학살이라는 용어보다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한 사용이라 하겠다.

 

 

 ※ 참고 : (집단)학살이란?

 

 

국제 사회에서 정의하는 집단학살의 의미

 

집단 살해죄는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르면, 특정 민족, 인종, 종족, 종교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특정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 특정 집단 구성원의 중대한 심신상의 손해를 야기하는 행위,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의 파괴를 야기할 것을 계산하고 특정 집단의 생활 터전에 고의로 해를 가하는 행위, 특정 집단 내에서 출생을 방해하는 조치를 취하는 행위, 특정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이 집단 학살죄는 특정 집단을 완전히 절멸시켜야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갖고 특정 집단에 대해서 위에서 열거한 행위를 할 경우 범죄가 성립된다. 민간인 학살은 비록 제노사이드 협약에서 말하는 특정 민족, 인종, 종족, 종교 집단에 대한 집단적인 살해 등의 잔혹 행위에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일부 희생 사건들은 집단 학살의 사례로 보고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피난민 등에 대해서 ‘흰 옷을 입은 사람은 모두 죽여라.’라는 명령을 했다면 이것은 집단 학살죄에 해당한다.)반인도 범죄는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된 잔혹한 범죄로 인류 양심의 공통분모라는 인식 하에 가해자가 속해 있는 국가의 국내법에 범죄로 규정되어 있든 있지 않든, 전쟁 이전 또는 전쟁 중에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로 민간인에 대해서 자행한 조직적인 살인, 절멸, 노예화, 추방, 고문, 강제 임신, 강제 이주 및 기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박해 행위를 말한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반인도 범죄이다.

 

2. 왜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을 재조명해야 하는가?

 

해방 이후 한반도의 현대사는 국가 권력과 군부에 의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던 전력이 있으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당시 현장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사냥’에 가까운 공수부대의 폭력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행해졌다. 한반도 밖에서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인간의 소행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학살을 자행한 사례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를 겉에 내세워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폭넓게 존재한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국가적 집단 폭력의 정점에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남북한을 통틀어 최소 백만이 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는 전쟁 이후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극히 편향되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학살은 분명히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 파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피학살자 명예회복운동을 불법시하고 주모자를 체포, 사형시키고 유가족들을 연좌제로 몰아 갖은 탄압을 가하였다. 전쟁 중 국군의 잘못을 들춰내는 사람들은 모두 반국가적 행위자로 취급되어 침묵해야 했다. 학살에 대한 연구는 상대방의 정권의 비도덕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높이려는 편향된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다. 군부가 전쟁 전후 자신들이 저지른 반문명적 행위를 은폐, 축소하거나 정당화함으로써 국가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고, 결국 학살의 배경이 된 다양한 문제 상황들은 사회 내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전쟁 당시 학살의 사실이 축소되고 은폐되는 것은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정리하고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21세기에 심각한 장애 요소이다. 게다가 사회 내부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국가, 이념을 내세워 집단적 폭력을 정당화했던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파헤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의 학살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폭력의 정당화와 이에 따른 반문명적 행위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한국 전쟁 전에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작은 전쟁기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이전에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을 작은 전쟁기의 학살이라고 하며, 한국전쟁의 리허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시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8년 5·10 단독정부, 단독선거를 무산시키고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 분단 세력에 맞서 공식적으로 무력 투쟁을 전개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2·7 구국투쟁부터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 전쟁 기간은 주로 제주 4·3 항쟁이나 여순 항쟁과 같은 인민 항쟁, 유격대 투쟁, 38선상의 남북 충돌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민간인 학살은 주로 남부지방인 제주도,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지역에서 인민 항쟁 과정이나 1949년부터 본격화된 유격대 소탕전 과정에서 구사된 견벽청야 작전 등에 의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상황을 지역별로 포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본 발표의 주제가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므로 자세한 사건의 경과는 생략하겠습니다.)

 

1)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정부 수립 직전인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에서 발생한 경찰 폭력을 기점으로 다수의 제주도민이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8년 10월 미군 주도의 군경과 서북 청년단 등에 의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고, 1954년 9월 21일 제주도에 내려진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무장 세력 진압 과정 중에 불법 학살이 무자비하게 자행된 결과,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이 무차별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2) 전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이전에 발생한 전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주로 전남 동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여순사건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학살당한 사람들은 여순사건에 의한 민간인 피학살자들이거나 빨치산 토벌 시기에 학살된 주민이 대부분이다.여순사건 이후 전남 동부 지역에는 이른바 ‘빨치산’ 혹은 ‘반란군’으로 불리는 좌익 무장 세력들이 여러 산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대체로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상황이 그랬다. 여순사건 외에 1949년 화순군 춘양면과 이양면 등지에서도 주민들이 학살당했는데, 여순사건의 파장이 주로 전남 동부 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남 중서부 지역에는 이와 관련된 사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전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6·25 이전 전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여순항쟁과 관련이 있다. 여순항쟁과 직접 관련된 민간인 학살로는 임실에서 여순항쟁 직후 좌익 관련자로 끌려가 학살당한 사례가 있고, 한국전쟁 직전 전주 형무소에서 1,600명 중 1,300여 명의 정치범이 학살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전쟁 직전 우익 단체에 의해 전주 고리개재 구덩이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이 집행된 사례도 있다.

 

4) 경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6·25 이전 경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주로 여순항쟁 및 보도연맹과 관련된 학살이 대부분이다.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 일대의 경남 지역에서는 이른바 ‘빨치산’ 혹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1949년에서 1950년 9월까지 국군의 토벌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과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국가 보안법 관련자와 보도연맹원들까지 경남 지역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최소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으로는 산청, 함양, 거창, 거제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을 꼽을 수 있다.

 

5) 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경북 지역에서는 주로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군경에 의해, 그리고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주월산과 주왕산 일대의 경북 지역에는 이른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을 도와주거나 지지했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부대의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들이 학살을 당했다. 또한 독도 부근에서 자행된 미군에 의한 학살로,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군에 의한 학살 사례가 있음이 밝혀졌다.

 

 

4. 한국전쟁 중 학살의 실상

 

1) 한국군에 의한 학살

 

* 한국군에 의한 작전 중의 학살

 

전쟁 초반 한국군에 의해서도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남한 지역에 고립된 인민군, 빨치산과 국군 간에 산벌적인 전투가 전개되던 1950년 겨울에 주로 발생했다. 19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가 산청, 거창, 함안 지역에 주둔하면서 인민군의 춘계 공세 이전에 빨치산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 명령에 따라 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2대대는 순천에서 산청으로, 3대대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총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들 부대는 본격적인 학살을 벌이기 전에 공비 출몰 지역의 가옥을 태우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1949년 겨울 이후 대규모의 빨치산 토벌, 제주도 4·3 사건 이후 제주도에서의 초토화 작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이 세력을 부식할 수 있는 가옥과 주거지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태워 없애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三盡), 삼광(三光) 작전이었다. 결국 9연대는 산청, 함양, 거창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피학살자의 대다수는 전투 능력이 없는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었다.2월 8일, 군인들이 지리산 중턱의 산청군 금서면 가현 부락에 나타났다. 이들은 마을을 포위한 뒤 집집마다 돌며 사람과 가축을 몰아내고 불을 질렀다. 가족, 베 등 돈 될 만한 물건은 따로 모은 뒤 동네 사람들을 모조리 마을 앞 산제당 골짜기로 몰아댔다. 10미터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주민들이 발버둥대자 군인들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면서 주민들을 순식간에 골짜기로 밀어냈다.

 

이어 4열 횡대로 앉으라고 명령한 다음 소총으로 장전한 군인들이 주민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부락민 12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오직 6명만이 생존했다.가현 부락을 쑥대밭으로 만든 군인들은 이웃 방곡 부락으로 내려갔다. 이후 이웃의 방곡, 점촌, 자혜, 화계, 화산, 주상리에서 학살이 반복되었다. 2월 8일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군인에게 학살당했으며, 그 중 남자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젊은 남자들은 미리 피신했기 때문에 육칠십을 넘긴 고령자가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는 10살 미만의 어린이도 10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2월 10일 대대장 한동석의 지휘 아래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에 출동했다. 이들은 먼저 청연 부락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피난을 가고, 마을에는 노인과 부녀자들만 거주하고 있었다. 군은 이 마을 주민 76명을 마을 앞의 논에 집결시킨 다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날 청연 부락의 참변 소식은 이웃 여섯 개 마을에퍼졌다.

 

군인들은 와룡리 주민들에게 ‘공비들 때문에 위험하니 피난 가야 한다.’며 이들을 면소재지에 위치한 신원 초등학교로 몰아갔다. 가는 도중 이들은 행렬을 끊어서 뒷줄을 탄량골 골짜기로 밀어 넣고는 ‘군인 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한 다음, 나머지 사람들을 집단 총살했다. 이 무렵 신원 초등학교에 수용된 520명은 이웃 박산골로 몰아가 총살했다.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는 오직 3명만이 생존했다. 앞의 산청에서 그러했듯이 일부 군인들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기도 했고, 젊은 여자들은 끌고 나가 욕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주민을 집단 살해한 다음에 불에 태워 흔적을 없애려 했고, 상부에는 공비를 토벌한 것으로 보고했다.

 

흔히 ‘거창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실제로는 거창, 산청, 함양 등지에서 발생한 2·8학살을 포함하여 주민 약 1,500명이 국군 9연대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에 관한 투서가 계속 날아오자, ‘공비 협력자 187명을 군법 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자 이승만 정권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동시에 해임하고, 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1951년 7월 27일부터 12월 16일 사이에 열린 대구의 고등 군법회의에서 재판장 강영훈 준장은 “애국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국군 작전의 근본정신과 투항하는 적군을 의법 처우하는 전쟁 도의를 소홀히 하여 즉결 처분하라는 명령을 부하 부대에 하달함으로써 천부의 인권을 유린했으며, 부대장도 일부 피의자를 경솔히 총살하여 명령 범위를 이탈한 것”으로 판결을 내리고, 김종원을 징역 3년, 오익경을 무기, 한동석을 징역 10년에 처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풀려났다.

 

앞에서 언급한 거창, 산청 사건 이전인 1950년 겨울 소백산맥 자락인 전남 함평,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남원에서는 공비 토벌 작전을 감행하던 11사단 9연대 소속 군인들이 대강면 강석리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90명을 대검, 일본도, 소총으로 난자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서 70명은 총살당했으며, 19명은 일본도로 목이 잘리는 참극을 당했다.

 

남원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이후 12월 6일 전남 함평에서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불갑산 지역인 월야면 정산리 동촌 마을을 시작으로 1951년 1월 12일까지 3개면 9마을의 500여 명의 주민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다른 전남 지역의 산악면 산정리,장성군 황룡면에서도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그나마 지금까지 확인된 이상의 사례들은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한두 명의 피해자 유족들이 끈질기게 사건의 전모를 추적한 경우여서, 이렇게 알려진 것은 전체 윤곽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단지 우연한 계기로 밝혀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군, 경, 우익 단체에 의한 부역 혐의자 학살

 

전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치안 부재 상황이다. 특히 한국전쟁처럼 전선이 계속 이동하고, 점령 담당 세력이 바뀌는 내전의 상황에서 군과 경찰, 좌우 양 민간인 간의 보복적 충돌은 거의 피할 수 없다. 사실상 한국 전쟁시 발생했던 학살 중 그 규모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으나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이 ‘국가’가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경의 부역자들에 대한 보복, 좌우 양측에 가담한 민간인 사이의 사적인 보복이었다.

 

대체로 1950년 7월 이후 인민군이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한 시기에 전쟁 이전에 좌우충돌 경험의 연장선에서 점령군의 위세에 편승한 지방의 좌익들이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경찰 가족,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그 이후 미군과 국군이 다시 그 지역에 진입하면서 인민군 치하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협력한 사람들을 한국의 경찰, 우익 청년단체, 혹은 우익 측 피해자들이 보복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다시 진입한 이승만 정권은 ‘적 치하에 부역한 자를 적발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4일 부역자 처리를 위한 공식 기구인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가 계엄 사령관 아래 설치되어 부역자 검거와 처리를 전담했다. <대한 경찰전사>에는 당시 부역자를 이념적 공명과 실천을 함께 하는 적극분자, ‘반정부 감정 포지자’로서 소극적인 공산분자, 대세에 부화뇌동하는 분자, 강압 밑에 피동적으로 부역한 소극분자 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정부 감정 포지자까지 부역자로 분류함으로써 사실상 경찰이 자의적으로 부역자로 규정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적극적인 부역자는 대부분 월북하고 그들의 가족이나 친척들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부역자 검거와 처리가 사실상 사적인 보복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인민군 치하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민간인과 사설 단체의 보복적 살해가 비일비재했으며, 심지어 군인과 경찰도 부역자 가족의 재산을 뺏기도 했다.

 

이러한 보복적 살해와 재산 탈취를 예상하여 국회 법사위는 사형(私刑) 금지법을 서둘러 제출했다. 처음에는 ‘군경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승만 정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12월 1일 공표되었다. 그러나 이 법안이 공표될 무렵에는 이미 광범위한 사적 보복이 진행된 때이며, 이 법의 제기 자체가 당시에 부역자들에 대한 사사로운 보복이 만연했음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자수한 사람과 검거된 사람을 포함하여 당국에 확인된 총검거자 수는 55만 915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중에서 실제 사형 집행을 당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정 문정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레고리 핸더슨은 당시 전국적으로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약 1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1·4후퇴 이후 서울 지역을 다시 점령한 인민군 측은 형무소, 경찰서, 우익 단체 등에 의해 총살, 타살된 사람이 4만 3,590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경찰의 주도로 이루어진 불법적인 부역자 처벌의 대표적인 예는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다가 국군이 다시 들어오자 좌익들에게 가족을 잃거나 피해를 본 태극단과 치안대의 우익 조직이 경찰과 함께 부역자 색출에 나서게 되었다.

 

고양 경찰서장이던 이무영은 가족이 인민군에게 죽었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권총으로 직접 살해하기도 했고, 급기야 1950년 10월~11월에 고양시 고봉산 기슭의 금정굴에 끌고 가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현재 금정굴에서는 여성의 유골 10구를 포함한 최소 153구의 유골이 발굴된 바 있는데, 가족들은 학살자가 최소 500명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와 같은 유형의 부역자 처벌은 인근 파주, 강화의 갑곶 나루터에서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도 광범위하게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복 지역에서 자행된 부역자 학살은 잠시 동안의 인민군 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여러 우익 청년 조직이 선봉에 섰다. 강화의 경우 대한 정의단, 일민주의 청년단, 민주청년 반공 결사대, 향토단 등이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이후 수복이 되자 강화 치안대, 국군 환영 준비 위원회, 비상시국 대책회 등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활동 중에는 ‘적색분자의 악행과 동태 조사’ 항목이 있고, 수복 후의 강화 향토방위 특공대의 활동에서 보면 ‘6·25 당시 부역 행위를 하다 북괴군과 후퇴하여 달아난 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는 항목이 있는데, 이들은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사실상 국가 권력의 대행자 역할을 하게 된다.

 

전남북 지역에서도 이러한 불법적인 부역자 처벌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조사된 바로는 나주군 봉황면, 장흥군 장평면, 담양읍 등지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 특히 전남 해안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군경이 적에게 부역할 위험성이 있는 주민들을 서둘러 학살한 사례도 있다. 1950년 7월 말에서 9월 초에 이르는 동안 일명 ‘나주 부대’로 불리던 경찰 부대가 인민군 복장을 하고 동네에 들어와 환영하던 주민들을 사살한 일이 있었다.

 

해남, 완도 등지에서도 이러한 일이 많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지역의 이웃 주민들 간의 보복 살육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 일제 시기부터 소작쟁의가 많았던 전남 지역이다. 전북 지역도 그러했지만 전남 지역의 경우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군인들이 물러간 이후 주민들 사이에서 보복 학살이 많이 발생했다. 이 보복 학살은 단순히 좌·우익 이념의 구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별, 씨족적인 대립과 갈등이 중첩되어 진행되었다.

 

 

한편 9·28 수복 이후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하자 북한 지역에서도 사적인 보복이 만연하게 되었다. 일부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보복 행위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원주민으로 조직된 임시 치안대가 멋대로 보복을 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는 것이다. 이승만도 이러한 보고 살해가 남한 정권의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자, 이를 제지하고 애매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역자들에 대한 마구잡이 처벌과 학살은 사실상 군과 경찰, 방첩대 등 국가 기관 종사자의 묵인과 방조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부역자는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정치적 분위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 북측에 의한 학살

 

전쟁 초기 북은 남한점령정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도모하였다. 정치보위국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 여맹원, 민청원, 자위대 등의 사회단체들이 가세하였다. 숙청작업은 주로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며, 정권기관은 공식적으로 고문 등의 만행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숙청 대상의 기준만 제시되었을 뿐, 형량 구형의 구체적 기준이 일선 기관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소한 혐의만으로도 사형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체포에 저항했다 등의 이유로 인해 ‘즉결처분’이 이루어진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숙청의 대상은 주로 지주, 경찰, 공무원들이었으며, 보복적 차원에서 그 가족들이 희생양이 된 경우도 있었다.

 

‘숙청’이라는 ‘공식적’ 방법을 통한 학살 이외 북측에서 자행한 학살에는 전쟁 이전 탄압받던 보도연맹 등의 지방 좌익 세력이나 빨치산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이 있다. 실제 북한의 한반도이남 점령 기간 이루어진 대부분의 학살은 이들에 의해 보복적 차원에서 이루어져다. 인민군의 통제력이 있었을 때는 괜찮았으나 인민군이 철수하고 행정적 지배가 시작될 무렵의 치안 공백상태에서 보도연맹의 가족들이 도망가지 못한 우익들에 대해 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있다. 전쟁 초에 북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한 예로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자행된 학살을 들 수 있다.

 

1950년 7월 20일 108명의 우익인사, 25명의 경찰, 150명의 군인 그리고 920명의 일반인에 대해 잔혹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들은 공무원, 마을 이장, 반공 유지, 경찰관, 군인 가족 등이었다.전쟁 초기 인민군 중심의 정권기관은 법령을 중심으로 처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공식적으로 만행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법과 재판 및 절제적 처형은 지켜지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바뀌게 되자 인민군 전쟁사령부에서는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잡혀있던 수감자들을 북으로 후송하거나 ‘적당히 현지에서 처리’ 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학살을 허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남한 곳곳의 교도소나 내무서 등에 수감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가령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1,724명의 우익인사가 모두 학살당했다.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유엔군이 곳곳에 진주하게 되자 빨치산들이 유엔군을 환영한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시기 벌어진 학살 중 가장 참혹한 사례는 전북 옥구에서 발생했다.

 

1950년 9월 27일부터 29일 사이 미면 미제마을 에서 우익인사 117명을 죽창, 농기구 등으로 살해하였고, 신촌마을에서 우익인사 248명이, 원당리 마을에서 30명이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신풍리 축동마을 우물 등에 우익인사 43명이 수장되었고, 신풍리 유운마을에도 우익인사 등 136명이 수장되었다. 이틀 동안 무려 574명을 학살한 것이다.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때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많은 학살이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지역에서도 기존의 반동세력에 대한 검속을 더욱 강화하였는데, 정치보위부에서 이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자 이들이 북한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남을 것을 우려하여 결국 반혁명인사들을 학살하였다. 평양에서는 약 2천 5백여 명이, 함흥에서만 모두 약 1만 2천여 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북측에 의해 행해진 학살은 비록 원칙적 수준에서 머무르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정권기관에서 고문과 근거 없는 즉결처분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는 등 일정 부분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지방 좌익이나 빨치산 등이 보복적 차원에서 비적법성과 야만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러한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어졌다.북측에 의한 피학살자 수는 공식추계에 의하면 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 등으로 합계 128,936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당시 통계국장이 시인했듯이 ‘공산당의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상당한 자의성을 내포하고 작성된 것이 사실이다. 이 통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시 북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희생자 수가 남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희생자 수 보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3) 미군에 의한 학살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군에 의한 집단 학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충북 연동군 황간읍 노근리에서의 학살이다. 1950년 7월 25일 주민 약 500여 명이 미군의 지시에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다음날인 26일 피난민들이 노근리에 도착했을 때 미군은 길을 차단하고 이들을 언덕 위의 철로 위로 올려 보냈다. 그 후 두세 시간 뒤에 미군 전투기 두 대가 나타나 난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 소사를 가하는 한편, 철로의 좌우 산에서도 미군의 무차별총격이 가해졌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철도 아래의 수로용 터널에 피신하자 여기에도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당시 주민으로써 확인된 사망자는 89명에 이르나, 대다수가 신원파악이 어려운 피난민이었으므로 사망자는 더욱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노근리 학살사건에서와 같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대상은 주로 피난민들이었다. 미군은 이들을 학살하는데 전투기나 박격포, 기관총, 소이탄 등의 중화기를 동원하였다. 영국 특파원 톰슨은 기계화병력이 “거의 무장하지 않은 적, 하늘의 항공기에 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형태의 학살은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 졌다기 보다는 전쟁 초기 한반도의 남쪽 전역에서 이루어졌다.미군은 직접적 사격 등을 통한 학살 이외에도 군 작전을 이유로 대규모의 민간인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1950년 8월 3일 일어난 낙동강변의 왜관교와 덕숭동 다리 폭파로 인해 다리위의 피난민 수백 명이 숨졌다.

 

당시 1기갑 사단장이었던 게이 소장이 ‘이 개XX들 다 날려버려’라고 하며 다리 폭파를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 있다. 게이는 훗날 북한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에서 다리 폭파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였으나 실제로 인민군이 낙동강변에 나타난 것은 나흘 후인 7일 무렵이었다.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편의상 노근리와 같은 규모의 학살이 접수된 60여 곳에서 자행되었다고 하면 약 2천 4백여 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미군의 학살은 대부분 신원확인이 어려운 불특정 다수의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대규모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민간인 희생은 이 수치를 훨씬 웃돌 것으로 보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이 한반도의 북쪽에 진주함에 따라 40일간의 북한 점령기간 동안에는 남한에서와는 다른 직접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북한 측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이 40일간의 기간 동안 약 17만 2천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 의한 학살 문제가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자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대표가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의 보고서의 일부를 살펴보면 미군이 황해도 신천에서 밀폐된 창고에 사람들을 가두고 일체 물과 식량을 공급하지 않아 어린이들과 노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이 굶어죽었고, 노동당원 가족을 죽을 때 까지 고문하여 살해했다는 등의 현장 증언 내용이 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북한지역에 대해 이루어진 무차별 폭격 역시 수많은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51년 7월 정전협정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폭격은 계속 이루어졌으며 정전이 실효된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전 까지도 지속되었다. 폭격은 북한 전역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인명살상용으로 제작된 네이팜탄과 시한폭탄을 민간건물에 까지 다량 투하함으로써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생겨났다. 가령, 동해안 최대 도시인 원산의 경우 미 해군 함정이 41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속적으로 포격했는데 당시 원산의 상황을 미 해군 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5. 학살이 이루어진 배경

 

1) 외재적 배경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의 표면적인 이유를 통해 학살이 이루어진 원인을 분석해 보면 크게 군사작전으로서의 학살, 처형으로서의 학살, 그리고 사적 보복 행위로서의 학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군사작전으로서의 학살

 

군사작전이라는 명분하에 학살이 자행된 전형적 사례는 전쟁 이전의 제주도 4․3항쟁의 진압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벌군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미명하에 백여 곳의 중 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웠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빨치산 활동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현지 군․경의 말단 지휘관에게 좌익이나 부역의 혐의가 가는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작전 수행 중 조직적으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전 수행으로서의 학살은 전쟁 발발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국군의 후퇴, 유엔군의 북상과 중공군의 개입 등으로 전선이 계속 변하게 되자 잔류 인민군이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격대에 의한 기습을 우려한 국군과 미군은 군사작전 수행을 위해 이들이 활동하는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모두 적으로 간주, 학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특히 전쟁초기의 남한 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은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주로 공군의 폭격이나 중화기를 사용하여 자행되었다. 이러한 학살의 방식과 당시의 정황 증거들을 고려할 때 미군의 학살은 의도적으로 철저한 계획 하에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많은 인민군들이 군복을 벗고 마을이나 피난민 행렬에 숨기도 했기 때문에 학살은 게릴라들에 의한 지상군 손실을 줄이려는 미군 사령부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당시 미군 명령서에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모두 죽여라’, ‘의심나는 사람들은 모두 사살하라’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으며, 현장 사령관중 한 명은 ‘전투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작전 수행이라는 명분으로 국군이 자행한 학살은 잔류한 인민군 및 빨치산과 국군 간의 산발적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겨울에 주로 일어났다. 이른바 ‘견벽청야’, 즉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철저히 파괴하여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작전에 따라 유격대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작전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학살은 사단장 이상 군 고위층의 지시 하에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적에게 협조하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이 각 예하 부대에 하달되어 비전투 민간인을 적으로 분류하고 작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 처형으로서의 학살

 

전쟁발발 직후 남북한 모두 군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계엄 상황을 선포하였다. 이 상황에서 국가권력은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민간인들조차 적으로 간주하여 물리력으로 처단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전시상황에서 방위체제를 확보하고 주민들의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측에서는 남한을 점령한 직후 인민재판을 통해 우익인사나 지주, 미군정에 협력한 인사 등을 처형하였으며, 퇴각시 남북한 전역에서 수많은 ‘반혁명분자’들을 ‘처리’하였다. 남한 역시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처형하였고, 전쟁 기간 내내 적에 부역한 혐의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주민들을 군․경이 ‘즉결처분’하였다.

 

전쟁 상황에서 군이 치안과 재판을 담당하게 되면서, 남북한 모두 군의 명령에 기초하여 ‘잠재적 적’을 대량 학살하였다. 한국전쟁이 가진 정치 헤게모니 투쟁으로서의 성격과 계급 투쟁적 성격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절멸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명확한 소속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양 국가의 구성원이 ‘잠재적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처형으로서의 학살’은 이러한 잠재적 적에 대한 의심과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보복으로서의 학살

 

사적 보복으로서의 학살 위험성은 남북한의 급격한 이념적 지형 변화와 이에 따른 사상탄압이 행해지던 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법의 정지, 국가권력의 부재, 치안의 부재와 전선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전시상황이 이러한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나게 하였다. ‘국가’가 바뀌는 과정에서 군․경 부역자과 여기에 가담한 민간인들에 대해 보복이 대단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전쟁 초기에는 지방 좌익들이나 국민보도연맹 피해자 가족들이 경찰,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원 등을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또 그 이후 국군이 진주하면서 이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다시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한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양쪽의 국가권력은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보복적 학살을 금지했다. 좌익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사적 테러를 중지할 것을 공포하였고 김일성도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이지만 아무런 법적 수속이나 심사도 없이 되는대로 숙청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과오입니다”라고 밝혔다.

 

남한 정부는 1950년 9월 「사형(私刑)금지법」을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공식석상에서 “보복을 중지하고 애매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이 말단 지방 행정조직까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권력은 사적 보복을 막으려는 의지도 없었고 오히려 지방 자위대에게 공식적 역할을 부여하거나 ‘반란분자의 철저한 말살’을 위해 사적 테러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복적 학살은 이념적 대립과는 거의 무관하게 보복의 악순환만을 가져왔다.오히려 국가지도부에서 직접 사적 보복행위를 가하기도 했다. 가령 북한의 서울지도부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승엽은 ‘간첩을 잡는다, 반동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실제로는 자신의 친일 경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살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기간 좌․우익간의 상호 학살은 그 출발점에서 분명히 계급 갈등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4․3 항쟁 당시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 청년조직이 북한에서 당한 앙갚음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주도민에게 했듯이, 일정한 시점 이후 이념이나 계급 갈등적 요소는 약화되고 오직 사적인 증오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적 보복은 남북한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으며, 비문명적인 증오의 발현이 국가권력에 의해 정당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2) 내재적 배경

 

위에서 언급한 학살의 표면적 배경만으로는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이 왜 그렇게 대규모로, 그것도 대부분이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기 매우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학살의 주체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배경적 요소들을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 구조적 배경

 

모든 전쟁이나 폭력사태, 내전에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전쟁이나 폭력은 항상 특정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데, 단순히 적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제거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주로 학살이 발생한다. 즉, 전쟁이 국가 건설이나 혁명과 결합되는 경우이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사회주의적 국가 건설과 자유주의적 국가 건설 노선의 대립, 반제․반봉건주의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친일․보수 세력 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좌․우 갈등은 그렇게 심각한 양상을 띠지 않았다. 문제는 미․소의 분할점령에 의해 남과 북에서 서로 상이한 정치지형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북한의 ‘혁명노선’과 남한의 ‘현상유지 노선’의 대립으로 이어지면서 양자 간 갈등이 증폭되었다는데 있다. 각 정치세력들은 상대방을 타도하고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 비방과 테러를 일삼았고, 이러한 공격적 행동이 보복을 통해 돌아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북한 지역의 이른바 사회주의개혁 노선을 통한 반혁명세력 숙청은 그 반작용으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폭력단체의 형성을 촉진했고, 남한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불법화, 미군정의 좌익 탄압 등은 단순한 정치 폭력 대신 군사적 투쟁인 유격대 활동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이 점차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폭력과 학살은 남북에서 모두 국가 건설의 대의라는 명분하에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군사문화의 전통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은 대단히 잔인하게 이루어 진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한국 군․경이 자행한 학살은 극동지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그것과 대단히 유사한 양상을 띠었으며 그 원인에 있어서도 일본 군사문화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일제강점기 때의 경찰과 군인이 미군정에 의해 다시 기용되어 한국군의 주축을 형성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군은 식민통치 과정에서 철저한 무자비와 폭력, 억압을 자행하는 통치방식을 택했고, 이러한 행위는 오로지 천황에게만 책임을 질 뿐 국민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절대군주제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철저한 계급 분화와 이에 따른 지배-예속의 문화에 익숙했고, 사관학교에서의 일방적인 교육으로 인한 이념적, 국가주의적 편향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의 핵심을 구성했던 장교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군대 내의 엄격한 상하 관계와 규율에 중점을 두었을 뿐 군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공공연히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냈는데, 가령 초대 욱군참모총장 이응준은 ‘우리의 상관, 우리의 전우를 공산당이 죽인 것을 명기하자’는 내용의 선서를 아침마다 전 부대에서 낭독하게 하였다. 많은 수의 급조된 장교들은 고등학교 수준의 지식을 갖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군대와 국민의 관계, 군대의 근본적 존재 이유 등에 대한 성찰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기 역시 대단히 흐트러져 있어 장교들은 즉결 처분권을 남용하여 사소한 일에도 병사나 민간인을 총살하는가 하면, 전쟁의 위기의식으로 무인 우대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작전 지역의 민간인들에게 향응을 베풀 것을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집단적 테러를 가했다. 또한 공비토벌 작전에서 전공을 높이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공비를 사살했다고 보고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사병들은 군대 내의 엄격한 지배-예속 문화에 의해 상관의 명령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 실행했다.

 

- 극단적인 이념적 담론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 피해자들은 대부분 이데올로기의 대립과는 무관한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은 ‘한 사람이 빨갱이면 그 가족이나 친족도 처벌할 수 있다’는 사고의 희생양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남북한에게 모두 상대방을 ‘반민족 집단’, ‘괴뢰’로 몰아붙이는 극단적 담론은 정치적 갈등과 폭력을 적대적으로 증폭시킨 문화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남북 모두 사용한 ‘민족담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고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이념적 문제와 결합시켜 극단적이고 단순한 이념의 양극화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극단적 담론 구조는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즐겨 사용한 ‘반란’, ‘부역’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난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반역적 사상’으로 간주하였고, ‘민중 내의 반역적 사상을 뿌리 뽑고 반도를 소탕하여 어떤 법령에건 절대복종하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천명하였다. 좌익 세력을 반란군으로 칭하며 이들에 대한 진압을 ‘토벌’이라고 하였다. ‘반역’이라는 담론은 왕조시대에 사용된 개념으로써 이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강요된 충성에 대한 거부 행위인 만큼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저항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반역자/민족 배반자 = 빨갱이 =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극단적 담론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 역시 ‘이승만 역도’, ‘반역자’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김일성은 ‘매국노’와 ‘반역자’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조국’을 해방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남북 모두 민족담론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반민족’으로 모는 극단적 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더욱 비참했던 이유는 이러한 극단적 담론이 전통적인 가족주의, 혈연주의와 연관되면서 연대책임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욱 확대되면 상대방 전체를 인종적으로 상종할 수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게 된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은 사실상 ‘혈통이 다른’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전쟁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극단적인 이념적 담론은 사실상 전통적 가족주의나 종족주의,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6.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평가

 

· 한국전쟁기의 학살의 모든 과정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진통, 국가 수립을 향한 일종의 정치 혁명,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 내전과 한반도에 이해관계가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국제전의 부산물이다.민간인 학살은 넓은 의미로 보면 ‘잔혹 행위’이자 ‘살인’이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했다는 의미에서 다른 범죄보다도 더 큰 책임이 있는 문제이다. 또한그 의도에 있어서도 한두 개인의 범죄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대 범죄 행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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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행된 학살은 국가의 조직적 계획과 의도, 관료적 집행 과정을 통해 고도로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즉 권력의 장악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것이 계획적이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전쟁 전후의 모든 학살은 주로 공권력에 의해 주도된 것이고, 사적 보복의 양상을 지니는 경우도 국가의 묵인, 결국 전쟁이라는 정치적 환경, 경찰과 군의 실질적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즉 전체 피해 규모로 보면 공권력의 직접 개입에 의한 학살이 더 컸으나 전반적으로 이 학살은 독일의 유태인 학살보다는 일제의 남경 학살처럼 공권력의 좌익 척결 의지와 가족과 친인척의 피해로 인한 증오감과 보복심에 추동된 현장적 대응이 훨씬 더 압도했다. 그래서 한국전쟁기의 학살은 피해 규모면에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못 미친다고 해도 폭력성과 잔인성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학살보다도 잔인했다.

 

여기서 잔인성은 좌우익의 갈등의 심도, 권력의 폭압성 등과 비례한다. 이승만 정권의 극도의 위기의식, 월남자를 비롯한 남한의 기득권 세력의 공포와 위기의식, 남한을 점령했다가 패주하게 된 인민군의 다급함, 지방 좌익의 복수심, 피해 입은 경찰, 우익 가족의 원한 등이 맞물려 학살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남한의 이승만 정권 수립은 ‘극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했던 구 식민지 세력의 부활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억압 기구인 일제의 군대와 경찰이 그대로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일본 군대의 문화가 일본군 출신으로 구성된 한국군에게 그대로 답습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4·3항쟁 당시나 한국전쟁 당시에 민간인끼리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한 이후 학살하거나 강간한 이후 학살하는 등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이는 일본군이 남경대학살 당시 사용했던 방법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건국 후의 한국 경찰은 과거의 일본 경찰과 달리 검을 휴대하지 않았으나 군인들은 일본도를 공공연히 소지하여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당시부터 민간인 처형에 사용하기도 했다. 군과 경찰의 이러한 야만적 고문과 학살 방법은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에서와 1980년 5·18 당시에 또다시 재현된 바 있다.

 

7. 남은 문제들과 과제

 

*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로 남은 문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죽은 사람 - 이유 없는 죽음

· 산 사람 - 처절한 가난

· 남은 사람 - 강요당한 침묵과 단절

 

한국은 피학살자들을 세 번 죽인 셈이 된다. 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하여 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은 것이 세 번째이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60년 4.19 직후 대구에서 전개된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빨갱이’ 운동으로 취급하여 이들이 스스로 작성한 자료를 모두 뺏고, 주모자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49년 문경지역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거

 

창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사유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인 행동으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는 ‘생존’을 위해 침묵하였으며, 좌익의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계속 여당만을 지지해 왔고, 그들의 자녀들은 오히려 ‘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하여 생존자나 유족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무슨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기에 가족모두 죽은 것도 모자라 살아남은 사람도 이토록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한국전 당시의 대량학살은 이미 전쟁 당시 외국의 언론에 일부 알려졌고, 북한은 미군과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당시부터 계속 공격을 취해오기는 했다. 그러나 전쟁 전후 학살은 여전히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으며 사실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학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베트남 미라이 촌의 민간인 학살, 90년대 이후 르완다나 코소보에서 발생한 학살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한국 전 당시의 민간인학살은 외국인에게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전 당시의 학살은 군부정권이 들어서고 엄혹한 반공체제가 구축됨으로써 주로 좌익 측에 의한 우익 인사의 학살 사실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면 사실 좌익에 의한 학살의 규모나 양상 역시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대한민국은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국가기관의 책임이 드러난 경우에만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마지못해 인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국가는 불순분자나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일부 전후 세력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국정을 혼란케 할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이들의 명예회복 요구를 묵살하면서, “총력안보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 국군의 신뢰도를 해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희생자와 전 국민이 애석한 일이나 평화가 정착된 후 조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한다”는 공식입장만 되풀이하였다. 중앙의 중요 언론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도 이 문제는 피해갔다. 일부 기자와 작자들의 사명감에 의해 약간의 사실이 발굴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학계에서도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과제

 

1) 정부의 기본입장 정립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

 

민간인 학살 문제는 분명히 전쟁범죄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국제적인 전쟁 규범, 그리고 국내에서의 법을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법리의 차원에서만 해결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전 당시 민간인 학살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유엔 혹은 국제적인 전쟁범 처벌 법규의 적용을 받기도 어렵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책임자인 한국정부, 그리고 미국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50년 7월 14일 이후 발생한 미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비롯한 공비 토벌 과정에서의 학살사건도 당시의 군사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학살의 최고의 책임 주체는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학살이 아닌 대다수의 학살의 경우는 당시 주권국가로서 한국정부가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작전 수행의 전 과정에 미국이 개입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설사 미국이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시인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국회와 정부, 그리고 한국인들의 집합적인 의지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정부가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요구와 공감대의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수의 국민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한 상황에서라면, 그리고 국민들이 좌익에 대한 불법적인 학살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기는 했으나 지금 시점에서 또다시 거론하는 것이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국민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역사적 기억이 완전히 왜곡되어 왔으며, 다분히 반공주입식 일변도의 교육이나 그간의 냉전적 분위기 하에서 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공개와 조사 작업이 선행된다면 국민의 의식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전체적인 진실규명이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부분적으로 조사를 실시해 왔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부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언론, 인권단체나 지식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려는 노력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2) 국회차원에서의 특위구성과 특별법 제정

 

이미 지난 10여 년 전부터 제주도 4.3 사건 단체들과 지역 언론은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한 3만 명의 주민 중 대부분은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줄기차게 주장하여 특별법 제정에까지 성공하였고, 거창사건의 경우 이미 사건 발생당시부터 700여명의 주민이 대부분 노약자와 부녀자였다는 점이 밝혀진 바 있다. 작년에는 AP통신에 추적에 의해 영동 노근리의 피학살자들이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1960년 4.19 직후 국회에서 이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마친바 있으며, 80년대 말 이후 [말]지, [한겨레신문], [항도일보] 등에서는 전쟁 중 민간인 피학살자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한국정부는 48년에서 49년에 걸쳐서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과 거창, 산청 등지의 학살사건에 대해서만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 혹은 명예회복 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노근리 등지의 미군범죄에 관해서는 그냥 미국 정부가 하는 것을 따라가는 시늉만 하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의 학살 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침묵하고 있다. 15대 국회에서는 전남 함평, 고양 금정리, 문경 석달동 등지의 유족들이 학살 사건에 대한 정부 측의 조사 혹은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이제 15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이 과제는 다시 16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현재 제주 4.3 사건, 거창사건 등에 한해서만 특별법에 제정되어 있다. 그러나 ‘거창사건 등’의 경우 특별법은 “유족들에게 가해진 불명예에 대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붐으로써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제 1조의 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먼 ‘명예회복’에 치우쳐 있다. 즉 군의 공비토벌 작전은 정당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인식 속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각처의 피학살 유족들은 이미 수차례나 행자부, 국방부 등에 자기 문제의 피해사실에 대한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국방부 측은 “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사 자료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국가 배상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의 경과로 적절한 배상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만 해 주었다. 그리고 국회차원에서의 특별법 제정이 바람직하므로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협조 하겠다‘는 천편일률적인 대답만 했다. 이러한 반응은 국회 혹은 정부 차원에서 전체적인 진상규명을 할 의지를 갖지 않는 데서 초래된 예상된 반응들이었다.

 

3) 국가의 정보 공개

 

미군의 폭격에 의해 피해를 본 익산, 단양, 마산, 창녕 등지의 경우나 거창, 산청 등 국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서 마을 거주민 전원이 학살당한 경우에는 피해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자신의 억울함으로 호소해왔고, 문제해결에서도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보도연맹 혹은 좌익의 혐의로 수감, 처형된 사람들의 경우 남은 가족들이 그 동안 ‘빨갱이’ 가족으로서 차별과 탄압을 너무 심하게 받아왔고, 여전히 정부나 주변에서도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나서지 않고 있다.

 

즉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이승만의 초법적인 명령이 그 이후 50년 동안 통용되는 동안 이들은 거의 숨죽이고 살아왔으며, 드러내놓고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지도 않을뿐더러 피해를 입을까봐 후손에게조차 발설하지 않고 살아왔다.실제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의 가장 큰 부분은 국민보도연맹 관련 피해자나 예비검속 등으로 인한 피해자, 그리고 수복과정에서 적에게 협력한 혐의로 피해당한 부역자들이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관련자나 예비구금자의 거의 대부분은 적극적인 좌익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이야말로 사상적인 전향을 표명한 사람들이므로 국가가 아무리 전시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을 구금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엄청난 배신행위이다. 그리고 설사 이들이 좌익에 동조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명령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처형한 것은 범의 위반이며, 일종의 국가 범죄행위이다. 이번 경북도의회 조사팀도 이 점을 의식하여 “조심스럽고 관심 있게 접근하였다‘는 전제하여 이 부분에 대한 처리방안도 제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국가의 기밀과 관련된 극히 중요한 자료를 제외하고 전쟁 시 토벌작전 관련 각종 문서들, 군사재판에 관한 자료들, 초토화 작전에 대한 명령 지휘 계통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보유하는 비밀문건 등은 각 피해자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구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일괄적으로 수집하여야 한다.

 

4)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 피해자 명예회복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인간성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 집단학살 죄(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를 구성하여 국제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행위에는 개인책임 뿐만 아니라 국가책임도 뒤따르게 된다.따라서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사살이 확인 되는대로 국가는 이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비록 과거정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대통합의 차원에서 현 정부가 국가를 대표해서 사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학살의 책임자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의 차원에서 그치고 처벌하지는 말아야 한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 대부분도 일종의 피해자이며,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따라서 민족 대화합의 차원에서 모두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 참고 문헌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강정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양태 분석]

고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보고서]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김주환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권영진, “6․25살상 다시 본다” [역사비평] 1990년 봄호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다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주한미군 범죄백서 :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개마서원

===========================================================================================     한국전쟁과 양민학살*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 정 구

1. 머리말

 

최근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미국 AP통신의 발표가 있자 한국전쟁 중에 저지르진 양민학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 학살사건이 세계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또 자유와 민주주의의 화신인 미국이 어떻게 양민을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한국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놀라기 보다 이 번을 계기로 한국전쟁의 진실, 특히 미국의 행위에 대한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이러한 양민학살에 대하여 일부의 문제제기가 있어 왔지만 전혀 사회적 및 국제적 쟁점이 되지 못하다 미국계 통신사가 대대적으로 발표하자 금방 쟁점이 되는 스글픈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1)

 

한국전쟁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는 틀에 박힌 정답이 있어왔다. 곧, 전쟁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고 전쟁에 관련된 모든 잘못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고, 남한은 희생자에 불과하고 미군과 남한군은 거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담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한완상사건이나 최장집사건이나 {태맥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사건처럼 빨갱이 동조세력으로 몰려 중도하차, 사회적 매장, 법적인 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반인륜적인 범죄적 행위에 대한 진실은 은폐된 채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는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였다. 이 결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문제까지도 은폐하는 자폐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동 티모르에 파견된 한국군에게도 또 이러한 사실이 발생하고 또 은페라는 죄악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제 이 번을 계기로 이러한 근거 없는 성역은 허물어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진상은 규명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에 관련된 양민학살은 그것이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졌건, 또 남한군, 북한인민군, 이승만정권 등에 의해 저질러졌건 과거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의 차원에서 철저히 매듭지어져야 한다. 이 글도 이러한 역사바로세우기의 출발로서 문제제기를 하고 이를 문제의 지속화를 위한 단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양민할살에 대하여 미군의 노근리학살사건보다는 한국전쟁 중 저지러진 양민학살의 모집합 또는 큰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포괄적 구도 속에 노근리 양민학살이라는 부분집합을 자리매깁하여야만 노근리학살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다.

 

2. 전쟁 중의 양민학살에 대한 포괄적 양상

 

한국전쟁 중에 저지러진 양민학살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포괄적으로 정리해 보겠다. 이를 단계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전쟁'시기인 1948년 2.7구국투쟁에서 6.26전쟁까지의 양민학살이 있었다. 이 전쟁기간은 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 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2) 이 기간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민항쟁에서 발생하였고 또 유격대소탕전의 과정에서 청천벽력작전을 구사하였으므로 주로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학살을 당하였다.

 

둘째는 6.25전쟁 초기의 양민학살이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주로 평택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만정권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학살, 노근리나 이리역 폭파사건과 같은 미군들에 의한 체계적 학살, 북한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 토착 공산세력과 인민군에 의한 남한 양민학살(남한 정부의 공식적 발표는 약 129,000명이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수복과정에서 전쟁 중 부역자혐의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등이다. 대체로 남한에 대한 양민학살은 전선이 남쪽 땅에 형성되었던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전선이 1951년 봄 이후는 중부에 전선이 고착되므로 단양의 곡계골과 같은 지역에서도 미군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주로 남한 땅에서의 양민학살 사건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제2전선인 빨치산에 대한 소탕작전 과정에서 저질러진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이다.

 

셋째는 미군과 남한군이 50년 10월 1일 38선을 월북한 이후 북한을 점령한 역 4-50일 동안 저지른 북한양민에 대한 학살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172,000여명의 학살이 주로 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나 실제의 학살은 미군, 남한 국방군,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저질러졌다.

 

넷째는 전쟁이 51년 6월이 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착화됨에 따라 남한에서의 집단적 양민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3) 미군의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수십만의 북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3. 작은전쟁과 양민학살

 

한국전쟁의 시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8년 남한의 좌익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무산시키고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 등 분단세력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무력항쟁 선언인 2.7구국투쟁부터이다. 이 시점부터 50년 6.25전쟁까지 인민항쟁,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38선 무력충돌 등으로 무려 10만 명의 인명이 죽음으로 몰렸다. 이미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통일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6.25전쟁 이전에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민학살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작은전쟁 전후 양민학살의 전재과정을 당시 남로당 함양군당원 하종구 씨의 진술 등을 통해 파악해본다.

 

1947년 7·27인민대회 뒤부터 좌익계 사람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인민대회 이후 대청(대한민주청년동맹, 명예회장 이승만), 서청(서북청년단, 위원장 선우기성), 족청(조선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 등이 주동이 되어 좌익탄압에 나섰지요. … 총만 안 들었지 몽둥이, 쇠스랑, 자전거 와이어 등을 들고 습격을 감행했어요. 이런 우익테러에 의해 함양에서도 많은 생목숨이 죽어갔습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구장인 하종기가 죽었고, 내 삼촌인 하경식도 우익청년단한테 맞아 죽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요? 우린 그냥 맞기만 했어요. 당시 중앙당에서 "폭압이 온다, 폭압이 와도 우리는 대항해서 싸우지 마라. 공위를 빨리 열어야 하니까, 우리가 맞서 싸우면 방해가 될 것이다. 우익테러에 대해서는 도전도 하지 말고 도발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각 지방 당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8년 2월 7일이 밝아왔다. 천왕봉에 쌓아둔 달집을 태운 봉화를 신호로 2·7구국투쟁은 시작되었다. 함양군 곳곳에 전기가 두절되었고 교량이 폭파되었다. 당원들 중 일부는 복수심에 불타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인 서청, 대한원들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 얘긴즉 남도부를 따르는 우루목 사람들이 '악질경찰' 정명길을 잡으려고 추격했다는 것이었다. 정명길은 일제시절부터 경찰을 하던 사람으로 당시는 함양경찰서 경무계(뒤에는 지서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추격을 받은 정명길은 함양군 수동면 쪽으로 도주했다. 정명길은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그를 추격하던 남로당원들은 되돌아와서 경찰서를 접수해버렸다.4) 이렇게 시작한 작은전쟁은 곧, 이어 4·3항쟁, 여순항쟁5)의 대대적인 인민항쟁으로 이어진다.

 

1) 4·3항쟁과 양민학살

 

4·3항쟁은 제주도민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통일투쟁이었고, 또 도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특성 외에도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실체 희생자의 80%이상이 무고하게 또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양민학살이라는 특성을 띤다.

 

4·3항쟁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를 주도한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6) 항쟁발발 초기부터 미국은 경비대장 김익렬에세 딘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인 CIC의 고급장교를 통하여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국제적으로 범죄시 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촉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김익렬,1994: 312-314). 이에 제주도 미군사령관을 강경파인 브라운으로 교체하고 또 경비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하여 한 달여 만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물론 직접적인 행동대는 이러한 미군정이 양육하고 또 그들의 철저한 앞뢜이와 하수인이 된 친일파 지배하에 있는 경찰과 경비대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 미군정의 하수인 집단인 경찰과 군대 및 테로청년단을 고스란히 인수받은 이승만정권은 해안선 5km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지역으로 지정하여 48년 11월부터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승만정부 하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은 그 책임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부 수립 9일 만에 미국은 한국과“주한미군은 대한민국 국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는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였고 게다가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동시책임은 면할 길 없다.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는 미군정과 이승만 양자의 필요에 의해서 행해졌다. 미군정의 경우 5·10선거를 실제의 내용이 아무리 허구일지라도 겉으로 보기에 무리없이 치러 남한에 이승만 단독정권을 세워 조선의 분단을 확정시키고 유엔에 공인시키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다. 그래서 군정장관인 딘소장과 그 하수인 조병옥은 4·3항쟁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또 '소련연방화 책동'이니 '국제공산주의자와의 연계' 등으로 매도하여 이를 빌미로 긴급히 무력진압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이로써 5·10선거를 마무리 짓고 조선의 분단을 제도화시키려 하였다.

 

이승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3항쟁 때문에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됨에 따라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고,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고, 유엔의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고,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어 이정권의 정통성 상실이 백일하에 노정 되었다. 이에 초토화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항쟁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결과 최소한 약 2만5천에 가까운 양민이 학살되었다.

 

2) 여수군민항쟁

 

앞에서도 밝혔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미군은 48년 10월 중순 여수주둔 14연대 1대대에 제주항쟁의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오후 8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장병의 대다수인 3000여명이 봉기에 참가하고 여수의 좌익들이 인민대회를 열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통치권 행사를 함으로써 단순한 군인봉기가 아닌 민군봉기로 발전하였다. 이에 2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23일 함포사격이 시작되어 한달 동안 육해공군 합동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색출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색출작업은 전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주로 "머리가 짧은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 바닥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자 등"의 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어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의 이재민 구호자료로 발표된 자료는 이 과정에서 여수를 포함한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한다.7)

 

여순군민항쟁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개입은 하우스만이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하우스만 회고록"({한국일보} 1990년 11월 연재분)라는 회고에서 밝혔다. 그의 증언은 아래와 같이 이미 주권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군작전권을 미국이 자의대로 행사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고문단장 특사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 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진압사령부에 급히 파견되었다. … 다만 내가 공식적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 사령부가 효율적 진압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영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던 것만 여기서 밝힌다"({한국일보} 1990. 11. 14).

 

반란군은 좌익민중들과 연합하여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진압군에 격퇴당하여 지리산 등의 산악으로 들어가 2.7구국투쟁이후 형성된 야산대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한의 133개군 중 무려 118개 군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어 작은전쟁은 지속되었다. 물론 이 유격대 전쟁과 토벌전쟁에서, 특히 최덕신 등이 행한 청천벽력작전 등에 의하여 수많은 양민이 피살되고 그들의 집과 재산은 파괴되었다. 이 작은전쟁의 인명피해는 무려 10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영민피살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의 2만5천 여순항쟁에서 행방불명이 된 4300여명 대부분이 양민일 가능성이 높아 최소한 3만명 이상일 것이다.

 

4. 6.25전면전쟁과 양민학살: 보도연맹, 유격전과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작은전쟁에서 북한이 전쟁을 확대하고 곧 이어 미국이 27일 전쟁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고 28일에 한강 북방을 미공군과 해군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 곧 전면전쟁으로 진입했다. 이어 7월 5일 오산에 미국의 지상군이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전쟁과 양민학살은 진행되었다. 미군과의 오산전투를 치르기 이전, 곧 서울 점령전투에서나 직후는 별로 양민학살이나 대량의 살상이 전게되지 않았다.유성철의 회고와 같이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 1일부터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8) 이 시점, 곧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에서부터 양민학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양민학살 유형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 학살, 6.25발발시 형무소에 있는 죄수에 대한 집단적 처형, 국민방위군사건, 노근리나 이리역같은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인민군과 토착 공산세력에 의한 학살, 수복과정에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제2전선 주위의 양민학살사건인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 등이다.

 

1) 보도연맹월 학살

 

대표적인 양민학살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에서부터 시작된다. 보도연맹은 1949년 11월 28일자 권순열 당시 내무부장관의 담화문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세력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오도돼 반역도당에 가입, 활동했을지라도 대한민국의 충성된 국민임을 염원하고 실천에 옮긴 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관용, 관대하게 용서해 줄 용의가 있음을 언명해 둔다." 보도연맹원 가운데 생자의 한 사람인 우흥원 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무고한 양민이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를 준겠다기에 손도장을 찍었다"("역사기행―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을 가다", {내일신문} 1994. 11. 2, 44쪽).

 

경남 진양군 대각면에서 이루어진 학살에 대한 증언은 전쟁초기에 이뤄진 학살의 유형을 짐작케 한다. 그 당시에 공무원 제쳐놓으면 모두 좌익 아닌가. 좌익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전쟁 후 3∼4일 후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면에서 한 40∼50명이 훈련을 받았다. 2차에 걸쳐 사람들이 죽었다. 1차는 수곡면에서 4∼5명되었는데 먼저 잡아가 버렸다. 거물급이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이었다. 2차는 몇 차례 소집훈련을 한 후 하루는 훈련하던 사람들을 모두 묶었다. 죽은 사람이 40∼50명 되었다. 명석(진양군 명석면) 근처의 골짜기에 몰아넣고 일제사격을 해 죽였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기간중에 시체를 찾으러 마을사람들이 갔으나 여름이라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9)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약 25-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곧, 보도연맹에 연류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하는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을 부추겼다.

 

2) 형무소 수인의 집단 학살

 

이러한 보도연맹 외에도 6.25전면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세력 등이 수 없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재판중인 통일일꾼이었던 손병선이 재판정에서 개진한 모두진술은 민간인 학살의 체험과 통일일꾼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숫자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정부 공식 기록문서가 공개되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저의 아버지는 8·15해방 이후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 후에는 고향인 충북 영동에서 부산의 산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제가 23살 되던 이때에 동대신동의 산 위 저희마을 옆 초량 공동묘지에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미제 G.M.C.트럭이 한차 가득히 부산형무소에서 처형된 사상범들을 싣고 와서 가마니로 덮어놓은 것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이 모든 비극이 해방이후 조국이 분단된 까닭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10)


3) 토착공산세력과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한 양민학살

 

남한에서 공산집단에 의한 피학살자 수는 공식추계에 의하면 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 등으로 합계 128,936명이라고 한다.11) 또 남한당국이(당시 공보처 통계국) 공식적으로 발표한 인민군에 의한 남한 민간인 피랍자 수는 82,595명이다. 그러나 1959년 외무부 정보국장 이수영의 주재로 열린 피랍자명부 파악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이수영은 이 명단을 국제적십자사에 그대로 보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러한 오차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보처 통계국장은 납북인사 82,595명의 통계는 공산당의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비 민간인인 군인과 경찰을 포함시켰고, 인명중복이 있었고, 행방불명자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피랍인사 위주의 통계가 아님을 밝혔다. 결국 82,595명은 군인, 경찰 등 비민간인과 행방불명자까지 고의로 포함시켜 조작된 수치임을 실토했다.12) 이러한 통계의 자의성때문에 자료의 신뢰성이 낮아 추정하기가 힘들다. 당시 북한은

9·28 당시 미군과 남한군에 의해 피랍된 숫자가 14,112명인 것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통보했다.

 

전쟁의 경우 개인적 수준에서 양민학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개연성은 매우 높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 범죄행위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공식집단에 의하여 조장과 묵인 아래 행해졌느냐 하는 점이다. 남북의 대조적인 점은 북은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해 세계여론에 공식적으로 호소하여 그 진상을 공개적으로 조사할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국제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미국이나 남한은(필자가 알기로는) 북한의 학살·만행을 말로는 규탄하면서도 국제진상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언에 의하면 양민학살의 경우 북한인민군보다 남한군이 훨씬 더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험적인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지만 일본군출신 위주로 구성된 남한군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할 때 유격대출신 위주로 구성된 인민군이 연역적으로도 이는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이다.

 

4) 수복과정에서 남한 군인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6.25전면전을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인민군보다는 남한의 국방군이나 경찰의 횡포에 대하여 많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할리데이와 커밍스도 뒷받침하고 있다. "컷포스는 이 시기 이승만 군대의 활동은 '전투라기보다는 대량학살'이라고 결론짓는다. 한 미대사관 직원은 1950년 9월 이승만정권의 남한에서는 '아마도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숫자는 전쟁 전기간에 걸쳐, 남북한을 통틀어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최고치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13). 이 미국대사관 직원이 말하는 10만 명 수준은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전해 준다. 또 당시 어느 한 목격자의 증언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잘 그리고 있다.

1950년 …늦은 가을… 미아리 뒷골목에선 한낮인데도 하나는 군인 또 하나는 청년 이렇게 두 젊은 사내가 젊은 아낙 한 분을 야구방망이만한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살인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 뜨문뜨문 지나던 사람들은 그 몸서리치는 만행이 역겨워 고개를 모로 꼬며 가고 또 멀리 마루턱에선 지그시 창문을 닫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끔찍한 장면을 헛기침 소리로 나무라건만 그런들 두 사내가 끄떡이나 하랴. 더욱 우악스럽게 그 연약한 아낙을 내려치고 있는 것이었다. 헉하고 후려갈기면 마치 들판에 홀로 선 강냉이 대처럼 풀썩 꼬꾸라지다가도 아, 그게 웬일이던가. 그렇게 쓰러졌던 아낙은 피를 머금은 채 마치 두억신처럼, 너무나 원통히 죽는 것을 못 참아 마침내 관속에서 그냥 관채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달려드는 원한의 두먹신처럼 일어서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분이 북쪽으로 갔는지 남쪽으로 갔는지 내 어찌 아느냐"고 항변한다. … 이렇게 몽둥이 들고 내려치기를 서른 번 남짓 마침내 지는 해와 함께 그 몽둥이찜질 소리도 그 아낙의 비명소리도 더 이상은 아니 들려왔다(백기완, 1994, 121∼122쪽).


세계 최장기 사상범으로 수감 45년만에 석방된 김선명씨의 경우 "50년 김씨가 월북하자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국군에 총살당했고, 살아남은 김씨 가족들은 그 피해의식에 짓눌려 아예 김씨를 잊으려 했다. 그의 어머니(92)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아직도 아들이 북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그의 수감사실을 숨겨온 것이다."14)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보복성 양민학살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단학살의 경우 유족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고, 설사 유족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피해 유가족이 노령으로 인하여, 또 학살이 산간지역 등에서 일어난 경우 6-70년대의 도시화의 진척으로 도시이주 등으로 인하여 공동대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전반적으로 피해 유가족 당사자에 의한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되지 않아 양민학살이 은폐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빨갱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천벌'에 의해 낙인찍히고, 탄압과 불이익, 4.19이후 진상규명운동에 참여하였던 당사들이 대부분 옥살이를 한 경험 등으로 인하여 학살사건 등은 대부분 묻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지극히 일부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으나 4.19이후와는 달리 지금은 대부분의 피해 당사자나 유족이 죽거나 노쇠하고 또 반세기가 지나 각기 전국으로 흩어져 살기 때문에 유족회 등의 구성이 힘들어 진상규명은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렇게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난 보기가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에 있는 금정굴의 유골발굴작업이다.

"[9월] 29일 한국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골이 발굴됨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가 비로소 확인됐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극심했던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전국 곳곳에서 숱한 양민학살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첨예한 남북 대치상황 속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정굴 사건도 그 한 예이다.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 위원장 김양원(43)씨는 "유족들 중에서도 `자칫 또 빨갱이로 몰리는 게 아니냐'며 사건 자체를 공개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유골 발굴은 지난 93년부터 3년여 동안 진실을 밝히려 애쓴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와 유족회의 힘겨운 노력의 결과이다.... 93년 10월 진상규명위는 고양경찰서에 당시 사건에 대한 수사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시작으로 국회 내무위와 청와대 등에 무수히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로부터 돌아오는 회신은 "근거 없음"이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당시 사망자가 1천 여명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우익단체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금정굴에서 1백 여명의 좌익인사들을 처형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15)

 

5) 제2전선주위의 양민학살 사건

 

정희상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남북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16)

 

거창양민학살 사건,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 실태조사특위' 위원장인 최강선의 글, 또 산청·함양 양민 705명에 대한 국군의 학살 보도 등17)을 보면 제2전선주의의 양민학살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2전선의 양민학살은 6.25전쟁 이후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작은전쟁 당시에도 유격전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49년에는 대대적인 유격대 토벌이 남한군에 의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도 청천별력작전 등에 의해 문경, 함평, 영광 등과 같은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형과 사촌동생의 주검 밑에 깔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문경 양민 학살사건' 유족회장 채의진(63)씨는 10월 13일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6.25이전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문경주민들이 학살당했다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6개월쯤 전인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자 43명, 여자 43명 등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어린이와 노인, 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다.(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 비망록).18)


유족회쪽은 “아직도 공비들에 의해 주민들이 숨진 것으로 호적부 등에 기록돼 있을 만큼 진상이 철저히 은폐돼 왔다”며 “미국의 비밀문서가 공개된 이후에도 국방부에서는 자료가 없어 당시 사건을 알 수 없다며 발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시사저널}이 "문경 양민학살 사건 은폐된 진실 밝혀냈다"({시사저널} 1995. 3.23.)의 보도가 있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25이전에도 이승만정부의 양민학살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달부락 주민 124명 가운데 86명이, 그것도 여자 41명, 국민학생 10명, 갓난애기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동네에 인기척이 없으니까 군인들은 화가치민 말투로 '국방군이 와도 환영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빨갱이 마을이다'라고 투덜거리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이 뛰쳐나오니까 모이라 해놓고 그냥 총을 쏴댔다. 군인 한 명이 '당신뜰도 여기 있으면 죽여버릴 테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해서 얼른 돌아왔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이승만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 텖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공비는 애매한 양민을 대낮에 죽이는 일은 없었다. 공비가 죽였다면 약탈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 군인들이 학살했다는 애기는 들었지만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50년 1월 1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현장을 방문해 유족들에 위로 연설까지 했으나 그 이후 이 사건은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되고 당시 문경경찰서장과 지서주임은 '공비 출몰 총살'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한다.

 

6) 남한전선에서 미군의 양민학살

 

6.25전쟁 초기 미군의 남한 땅에서 양민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경상남도 진주출신의 어느 ? 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비군 비행기가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지역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에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양민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초기에는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커밍스는 그 당시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좌익이라는 미군의 판단 때문에 이러한 양민학살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전언이므로 추후 확인할 예정임).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남한 정부에 대한 큰사랑 없이 공산당에 대한 혐오와 불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즈}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19)


이러한 미군들의 전쟁 범죄적 파괴와 양민살상은 지방사의 구석구석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한 지방신문은 이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도천면 어만리 천변에서는 백주에 피난민 대렬에 피신한 인민군으로 인해 [유엔군]의 기총사격으로 사망한 군민도 적지 않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응어리 진 가슴은 호소할 길 없는 울분으로 메워져 있다."20)


이 번에 세계적인 쟁점으로 된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의 양민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자 정은용씨의 진술은 전쟁중 미군의 남한 내 양민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및 범죄성을 잘 말해 준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 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 나는 '작전'과 '복수'가 함께 이뤄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피난민으로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크게 당한 직후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21)


이러한 정은용씨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의 보도는 이를 확인하였다.


◇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문):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당시 기관총 사수였던 노먼 팅클러는 “우리는 그들을 전멸시켰다”고 증언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그냥 피하려했던 민간인'들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중위로 참전했던 로버트 캐롤 예비역 대령도 “상부로부터 민간이나 군인 그 누구도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7연대 소총수들이 인근 진지에서 피난민을 향해 발포했다”고 말했다. 캐롤은 이어 “첫날에는 북한군이 없었으며, 대부분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참전 병사들은 또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으며, 유진 헤슬먼은 “챈들러 대위가 `모두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대령으로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88)는 “총격사건에 관해 알지 못하며 그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고 발뺌했으나, 참전 병사들은 “헤이어 대령이 당시 작전을 하급자에게 위임해 놓았다”는 상반된 증언을 했다. 역시 참전 병사인 텔로 프린트는 “나와 다른 병사들도 미군의 공습을 받게 돼 피난민들과 함께 배수로로 몸을 숨겼다”며 “누군가가, 아마도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미군의 양민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라북도의회'의 99년 10월 20일자 '익산시 폭격 진상규명 대 정부 촉구결의안'이다.

우리 전라북도 내에서도 미군에 의한 익산역(당시 이리역) 전투기폭격과 송학 등 주변일대를 중심으로 무차별하게 기관총을 발사하여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통동런사를 보면 1950년 7월 11일 미군기의 오폭으로 익산역 직원과 승객 등 54명이 현장에서 전원 숨졌고, 300여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익산역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를 입증하는 증언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익산 송학동 주변일대를 미군전투기가 30-40분 동안에 걸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발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그에 다른 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제 여러 곳에서 밝히지 못하여 엉어리져 있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방방곡곡에서 자행된 미군의 학살에 대한 증언이 일부 나오기 시작하였다.22)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과 사천군 곤명면에서도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초막골로 피란갔던 양아무개(79·창녕군 유어면 광산리)씨 등 주민들은 5일 “50년8월 초 새벽 4시께 마을 뒷산 비들재 고개에서 인민군 2명이 따발총을 들고 내려오자 미군이 1시간 여 동안 마을을 향해 총을 쏘아 피난민 100여명이 숨지고 집 40여 채가 불탔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양아무개(42·부산시 서구 대신동)씨도 “지난 82년 작고한 부친에게서 피란 시절 미군에게 무차별 총격을 받아 많은 양민들이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인근 유어면 진창마을 14집의 제삿날이 음력 7월11일로 같은 날인 것으로 미뤄 외지로 나간 유가족들을 합치면 100여명이 주민들이 그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에서도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숨지거나 다쳤다는 주장이 나와 사천시가 진상조사에 나섰다. 주민들은 지난 50년 7월29일 새벽 인민군을 태운 트럭 20여대가 위장하고 있던 서포~단성 국도에서 폭격기 20여대가 폭탄을 떨어뜨려 이마을 주민 54명이 숨지고 47명이 크게 다쳤다고 밝혔다. 이밖에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황점순(74·여)씨들도 “지난 50년 8월11일 오전부터 주민 100여명이 모여 있던 재실을 향해 미군들이 집중 총격을 가해 83명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인민군이 쳐들어온다'며 경찰과 미군의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어디로 어떻게 피란을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인민군 정찰대로 보이는 2~3명이 재실 옆 대밭에서 미군 진지를 향해 총을 쏴 미군 1~2명이 죽자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해 주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최소한 '학살'이 아니었다 하드라도 오인사격이나 보복사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23)


또 충북 영춘 곡계굴에서도 1951년 1월 20일 4백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당시 폭격장면을 직접 목격한 김옥이씨의 증언은 "폭격 있기 하루 전에 피난민들이 굴에서 나오는데 한 3-4백 명은 족히 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다시 모두들 그 굴로 들어갔다. 그러자 말자 미군정찰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가더니 30분쯤 있으니까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해댔다."24) 미군의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도 이러한 만행이 체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1950년 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면적인 후퇴를 감행할 때 원자폭탄이 투하된다는 소문을 퍼뜨려 고의적으로 이산가족을 대거 양산하는 등 여러 종류에 걸치고 있다.

 

지난 14일 거제 제6포로수용소가 있던 용산마을 부근 농지에서 경지정리 작업을 하던 중 큰 병속에 넣어진 채 비옷에 쌓여있는 이들 문서를 발견해 거제군 공보실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가운데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이라는 제목의 편지는 속옷을 찢어 만든 가로 80cm, 세로 1백20cm크기의 광목에 잉크로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는 등의 내용을 적고 편지 끝 부분에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쓰고 있다. 이와 함께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한겨레신문}, 1992년 12월 19일 15쪽).


또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인 도드가 포로들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포로들이 도드에게 요구한 4개 조항 가운데 제1조항이 "폭행, 모욕, 고문에 의한 심문, 혈서의 강요를 중지하고 위협, 학살 독가스와 세균무기 실험중지, 국제법에 의한 전쟁포로의 인권과 생명의 보장"을 제기하고 있어 미군의 범죄행위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암시한다.25)

 

5. 북한지역 양민학살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의 양민학살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4-50일 가량 점령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고 둘째 시기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정전협상에 들어간 51년 6월 이후 정전일 마지막까지 자행된 북한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이다.

 

1) 미군강점기간 북한 내 학살과 만행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를 보면 40여일 강점기간동안 미군의 지휘, 감독과 직접적인 적대행위에 의해서 아래의 표가 보여주듯이 172,000여명의 북한주민이 학살되었다한다. 이 숫자는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

 

학살방법 또한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이고 있다.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땅크로 깔아 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방법을 꺼리낌없이 감행했다" 고 한다.26) 이 잔인한 미군의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시적강점시기 공화국북반부의 일부지역에서 감행한 미제의 학살만행

지방이름
학살한 수
지방이름
학살한 수
평양
15,000
평천
3,040
신천
35,383
연안
2,450
안악
19,072
재령
1,400여명
은률
13,000여명
장련
1,199
해주
6,000여명
락연
802
벽성
5,998
평산
5,290여명
송화
5,545
로산
1,385
온천
5,131
봉산
1,293
태탄
3,429
송림
1,000여명
사리원
950여명
희천
850여명
안주
5,000여명
양양
25,300여명
강서
1,561
철원
1,560여명
남포
1,511
원산
630
개천
1,342
함주
648
순천
1,200여명
단천
532
박천
1,400여명
선천
1,400여명
정주
800여명
초산
900여명
* {조선전사} 26권 129-130쪽

이 강점기간동안 파괴.약 탈행위도 엄청났었다. 5,000여 개의 학교, 1,168개의 병원 및 정휴양소, 260여개의 극장 과 영화관, 675개의 과학연구기관 및 도서관, 수많은 민간주택, 6개의 박물관, 문화유물 6,709전 약탈, 수십만 톤의 양곡, 60%이상의 전체 집짐승, 안악, 룡강의 국보급 고분 등을 파괴 및 약탈했다고 한다.

 

이러한 미군의 '범죄'행위에 대해 세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했다.27) 다음은 이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와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에 제시된 증언을 중심으로 미군의 학살행위를 살펴보겠다. 펠톤은 평양과 황해도를 중점적으로 조사하였고 또 이 황해도가 가장 참상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이곳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28)

 

이들 조사단이 황해도에서 처음 확인한 곳은 19,000여명이 살해되었다는 안악이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어른과 어린이들이 함께 가두어 며칠동안 물과 음식도 일체 공급하지 않고 심지어는 누울 수조차 없도록 사람을 많이 가두었던 간이 수용소였다. 그곳은 농가의 창고였었고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곳으로 단지 지붕과 담 사이에 있는 길다란 좁은 구멍으로 공기가 통할뿐이었다. 여기에 수 백명이 억류되어 죽었고 몇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 가운데 한사람은 안악 세산리 172번지에 사는 김산연노인으로 자초지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미군이 점령한지 며칠후에 아무 영문도 모르고 남자, 여자성인과 어린이들로 꽉찬 이곳 창고에 그는 수감되었다. 대략 열흘 쯤 뒤에 어떠한 이유인지도 모른 채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의 모든 가족이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다. 얼마 뒤에야 그의 부인, 아들, 며느리, 2살난 손자가 끌려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인의 시체는 찾지 못했어나 "아들과 며느리가 밧줄로 함께 묶여서 죽어 있었다. 아무런 상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산채로 매장 당한 것 같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정당이나 침략에 항의한 적이 없었다. "미국사람들은 신사라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인은 기독교도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는데!" 펠톤이 그 노인에게 기독교인이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니까 그제야 "나는 일생동안 기독교를 믿어왔소.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일컫는 자들이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을 본 이후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군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연약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Felton 1953, 133-35).

 

유사한 내용의 기독교인에 대한 혐오감을 고 마태오 신부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29)

 

삼촌, 방금 삼촌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을 그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미국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지요. 그런데 전쟁 중에 행한 그들의 행동은 조금도 그리스도인 답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전쟁의 짓거리라고 그런 만행을 한마디로 합리화할 수도 있겠지만,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낟알이 여물기만 기다리던 전답의 곡식을 불살라 버리고 또 아무런 군사시설이 없는 농촌의 평화스러운 새벽에 폭격으로 진동시켜 할아버지와 여러 형제가 화염에 싸여 죽게 한 것도 미국 군인의 소행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미움을 배웠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안악군 송화리 117번지에 살다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여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린이 다섯과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 이 창고는 약 300여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난 어린이는 밟혀 죽었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네 어린이들이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창고 근처에 죽은 어린이와 어른의 시체를 묻은 묘지가 있었고 그 넘으로는 완전히 어린이만 수용했던 수용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수용소는 최근 미군의 고성능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나중에 주위의 주민들에 들어니 이 수용소와 묘지들 주위의 모든 지역을 미군들이 자주 폭격했다고 한다. 미군이 저질른 죄악에 대한 증거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폭격을 계속한다고 주민 들은 이야기한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일행은 그 지역에 움푹 파인 폭탄구덩이를 피하기 위해 종종 우회로로 둘러가야만 했었다 (Felton 1953, 146-47).

신천에서 35키로메트 떨어진 김지리에 살던 조선로동당의 활발한 당원이었던 변동난의 어머니 김연의 이야기.

 

아마도 내 죽은 딸이 이 애미가 여기와서 당신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 같아 여기 왔소. 그 애는 당신들과 같이 이 세상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위해 걱정하고 노력하는 여자였소." 그 딸은 미군이 진입하자말자 곧 체포되었다. 면회를 한번 갔을 때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숨겨 간직하고 있던 공화국국기를 건네주며, 자기는 곧 살해될테니 "슬퍼하지 말고 조국이 언젠가는 해방될테니 그때까지 국기를 잘 숨겨두었다가 해방이 되는 그날 가장 높은 곳에 그 국기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며칠후 이승만의 병사하나가 미군장교의 명령데로 내딸과 엎고 있던 어린애의 몸을 총검으로 한꺼번에 찔렀다고 자랑했다. 내 외손자도 함께(Felton 1953, 147-48).

 

법률가협회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미국군대가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 들어온 바로 그 날에 우말재의 가족에 대해 끔직한 범죄가 감행되었다. 미국인들은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우말재가족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 우말재의 며느리는 미국장병들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다. 미국인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끌어 맨 다음 젖을 베고 국부에다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 이 범죄에는 약 20명의 미국장병이 참여하였다(김주환 1989, 187).

1950년 10월 25일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국군인은 김창두라는 사람에게 끔찍한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국인들에게 강간당하였다.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였으며 또한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김주환 1989, 188).

 

 

해주시에서 미국병정들은 지방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을 고문하였던 바 이 여성은 증인과 같은 감방에 구금되어 있었다. 조사단원들이 심문한 증인의 진술에 의하면 미국군대는 그 여성에게 장시간에 걸친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젖을 베었다(김주환 1989, 188).

2) 전쟁 소강기 북한 영민학살

 

1951년 초여름부터 전선은 대체로 38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 소강상태란 지상전 전투행위의 소강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공중전과 해상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던 미군의 공습이나 해상함포사격등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선아닌 후방에서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 생업의 현장에 대한 해상. 공중포격에서 북한의 주민들은 살해되고, 생존수단을 파괴당하는 끔직한 전쟁체험을 하였다. 더구나 51년 7월 이후 정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민간인과 비군사 민간시설에 대한 살상과 폭격행위는 계속되었고 정전이 실효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직전까지도 지속되었다.30)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이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는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 철저히 파괴되었다. 나는 전부,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 값을 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으니까.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31) 신의주의 폭격상황을 조카 홍윤으로부터 소상히 들은 홍동근목사는 이렇게 전한다.32)

 

 

1950년 가을, 미군폭격기 B-29가 80대 이상 연 사흘 신의주를 폭격하고 특히 소이탄으로 폭격하여 전 도시를, 집과 사람을 불로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신의주 20만 사람의 삼분지 이의 사람이 타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한다. 문자 그대로 무차별 야만적 폭격을 하여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불태워버렸다. 거기 내 작은 형님과 형수님과 철이가 불에 타 죽었다. 또 수 없는 동족의 부녀자들이 불타고 내 배움의 고향이 재가되어 없어졌다. 큰 형님 말씀이 그 불기둥으로 신의주의 밤이 붉었고 낮에도 타는 연기로 하늘이 먹구름이 되었다 했다. 이를 위해 맥아더가 한국 백성들에게 '맑은 일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었던가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폭격이 동해안 최대도시인 원산의 경우 정전 1분전까지 계속되었다. 미 해군함정이 원산을 41일 동안 밤낯 없이 연속적으로 포격했으며, 현대미해군사상 최장일인 861일 동안 포위 공격했다. 미해군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기술했다.33) 1953년 3-4월경 평양과 원산의 전후 상황을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34)

 

 

평양시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평양시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더 흔했다. 아니 살아있는 사람도 반쯤은 죽어 있었다. [...] 전쟁 후 원산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곳도 평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평양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라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듯이 공격을 했는데 나도 그런 일을 당해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평양에 대한 초기의 대대적인 공습은 서울이 중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 1951년 1월 3일에 행해졌다고 국제여맹시찰단 펠톤은 말한다(Felton 1953, 116-17). 폭격은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15분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처음에는 소이탄, 다음에는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리고는 다시 더 많은 량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조직적인 구조작업은 불가능했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난파된 잔해 속에 깔려 구조 받지 못하고 질식사 또는 압사했다. 국제여맹 조사단이 방문한 5월까지 시체들이 치워지지 못한 체 남겨져 있었다. 수만 명의 주민이 불에 타 죽었다. 그날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가운데는 시내의 대부분 병원들이 포함되었다.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적십자 표시를 해놓은 병원들도 미군의 폭격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북한 외무상은 유엔에 이 잔악한 야만성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더 이상 파괴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는데도 미군의 폭격은 오늘날까지도 밤낯 연속으로 계속되어 이미 완전히 파괴된 모습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바꾸고 있다. 때때로 우리들은 시한폭탄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시한폭탄이 10분 간격으로 연속 폭발하였는데 이 폭탄들은 1주일 전에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도시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나야 했다. 평양의 인구도 50만에서 약 5만으로 줄어들었다. 농촌이라고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굴이나 지하방공호에서 혈거인과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은 가공스런 살상을 저질렀다. 높은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조그만 산탄으로 사방에 퍼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를 태워버리고 사람의 살에 붙어서 몸을 불태워버린다. 시한폭탄은 철저한 인마살상용이다. 공습에 희생되거나 다친 이웃, 친지, 가족을 구조하기에 정신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이 구조대를 살상. 파괴하는 것이다. 장마철에 평양근처의 저수지 댐을 폭파시켜 농토와 관개시설과 주위 주거지 소실, 화학전과 세균전의 감행35),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 민간재산의 고의적 파괴, 대규모 폭격작전인 '교살작전', 500대 이상의 비행기를 동원해 북한전력공급의 90%를 차지했던 수풍댐과 발전소의 파괴 등 미군의 야수적 전쟁범죄로 인해 북한의 전 영토와 중부지역이 거의 완전 초토화되었다 (커밍스와 할리데이 1989, 174).

 

 

북한 쌀의 3/4을 생산하는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평양근교의 5개 댐에 대한 폭격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모내기가 끝난 장마철에 댐을 폭파시킴으로써 이 인위적인 대홍수는 27마일의 계곡과 평야를 휩쓸어버리고, 범람한 대동강 물은 평양시와 인근 주거지역에 인명과 재산, 그리고 생존의 기초인 쌀 생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를 두고 몇 명되지 않는 양심적인 서양사가들은 "그 같은 종류의 행위가 자행된 경우가 1944년 네델란드에서의 나치의 만행인데 그때는 뉴른베르그 회의에서 전쟁범죄로 다뤄졌었다" 라고 기술한다 (커밍스와 할리데이 1989, 198). 자유와 평화의 탈을 쓰고 저질러진 야수적 만행과 이를 국제문제화하지 못하는 철저한 '힘의 국제정치'의 부도덕성이 노골적으로 자행된 대표적인 경우가 이 '추악한 전쟁'인 한국전쟁인 것이다. 이러한 범죄적 폭격의 흔적은 1955년까지도 그대로 목격된다.

 

 

평양역에 도착할 때까지 퍽 여러 번 정거하였지만 한 개의 역사도 제대로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철도 연변에서도 도시나 마을 같은 것을 한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황야 속의 무인지대를 달음질치는 듯한 느낌이고, 기차가 멈추는 곳마다 산기슭에 몇 개의 토담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리원만은 옛날에는 여기도 하나의 도시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만한 벽돌집들의 허물어진 형체가 남아있고, 멀리 학교교사인 듯한 새 건물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도 ... 인간 도살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서울-부산간을 몇 번씩 왕복하면서도 이런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는데, 나는 개성서 평양까지 오는 동안에 전쟁 중에 감행된 처참한 발자국들을 보면서 전쟁의 무서운 파괴력 앞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6)

 

 

공습과 포격에 의해 죽고 부상당한 무고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대부분 서방의 언론들은, 특히 미국의 유피통신을 필두로 해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외면하거나 왜곡된 당국의 발표를 확대 복제해 내는데 그쳤다. 특히 세계의 여론이 정전협정을 조속히 완결 짓도록 미국에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에 이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전쟁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로 공습과 폭력행위를 빈번히 일삼았던 미국을 서방언론들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도, 하려는 의지도 보여주지 못했다. 회담을 결렬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폭력행위에 대해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거의 부인했지만,

 

 

후에 공식적인 미군사에서 미국은 중립지역에 대한 포격과 기관총사격 그리고 회담 중에 있었던 공산 측 대표단의 경호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한 수많은 위반사항을 인정하였다. 1952년 봄에 행해진 위반사항에 대해서 공식적인 미군사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UN군 대표들이 이와 같은 비난들 중 일부에 대해서 책임을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UN군 대표들이 시종일관 수세에 처할 만큼 많은 위반사항들이 있었던 것이다.'37)

 

 

이상과 같은 양민학살과 파괴행위에 대해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보고서는 이 것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작위적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쟁범죄이었다고 규정짓고 세계법정에 출정시켜 책임자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사단은 미국정부와 미군의 최고사령부지도자들의 완전한 승인과 계획 없이는 이 대부분의 범죄들이 감행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본 조사단은 이 사람들과 이들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전선의 모든 지휘관들과 국제법에 위반되는 명령을 수락하고 집행한 모든 개별적 병사들을 고발한다(김주환 1989, 206).

 

 

전쟁피해는 막대하였다: 최소한 인구의 12-15%가 죽임을 당했고38), 5천여 개의 학교, 260여 개의 극장과 영화관, 1천여 개소의 병원, 2천8백만펴방메트의 주택 등이 파괴되었고, 25만두의 소, 38만두의 돼지, 37만 정보의 농지피해, 관개시설 특히 저수지 댐의 파괴로 인해 1953년의 알곡생산은 1949년에 비해 88%로 감소되었으며, 8촌7백 여동의 공장과 생산설비 등이 파괴되어 1949년에 비해 1953년은 전력공업은 26%로, 연료공업은 11%, 야금공업은 10%로, 화학공업은 23%로 감소되었으며, 철광석, 선철, 강철, 조동, 조연, 전동기, 변압기, 유산, 화학비료, 카바이드, 가성소다, 세멘트 등 생산시설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39)

 

 

7. 맺음말

 

그 동안 노근리 주민들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난 60년 10월 미군이 설치한 소청심사위에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심사위의 포리백만 법무대위는 회신문(문서번호 FCC/802/60/228)에서 증거와 시효를 들어 거절했다. 주민들은 같은 해 12월과 94년 7월, 10월에도 미국 정부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 97년 8월에는 청주지검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신청했으나 기각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법무부에 낸 신청도 역시 증거와 시효를 이유로 기각됐다. 주민들은 올해 초에도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미 국방성에 질의했으나 “자료가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통신사가 관련자 증언과 공식기록을 확인하자 노근리학살사건은 국제적 쟁점이 되고 사회문제화 되었다. 미국정부는 이제까지의 부인일변도 자세에서 진상조사에 응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진상규명이 이들의 선의와 자의에 맡겨졌을 경우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다. 유가족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언론에 의존할 수도 없다. 핵심은 시민단체의 주도로 유가족, 시민, 국제 인권 및 평화단체가 연대하여 공동대응을 추구하여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미군양민학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국이나 한국정부의 진상규명에 이 단체가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노근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 여기서 북한에서의 양민학살, 국방군과 경찰에 의한 양민학살에 이르기까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진상규명이 확대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관련자 처벌, 배상, 사죄, 재발방지책 강구, 역사기록 남기기 등으로 매듭 지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최근 서해교전을 강제한 남한의 반이성적인 언론과 이에 부화뇌동한 정치인이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전쟁광적인 모습은40) 한국전쟁에서 저질러진 미군 등에 의해 저지르진 양민학살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제대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당시 북한이 자제하기 않고 바로 옆에 있는 옹진반도의 미사일을 발사했더라면 그 결과는 엄청난 참화로 귀결될 뻔하였음을 상기할 때 모골이 송연할 수 밖에 없다. 또 한 때 극좌적인 주사파를 지향하였다 투항·변절한 김영환과 같은 북한인권론자 무리들이 대북전쟁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철부지의 어린애 같은 소리인지를 그들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서 우리는 지난 94년의 영변핵위기 당시 미국에 의해 기도된 전쟁일보직전의 상황과41) 99년 금창리핵위기를 근거도 없이 조장한 미국과 일본의 전쟁광들에 의하여 우리의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동시에 대만이 독립을 선포할 경우 중국의 무력개입, 이에 따른 미국과 일본의 무력개입과 더불어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중국과 전쟁을 치르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제대로 주시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세울 때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땅에서 전쟁의 씨앗을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역사교훈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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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이 글은 강정구 선생님의 홈페이지에서 퍼 온 글입니다(http://sociology.dongguk.ac.kr/kang)

1) 최병수·정구도, "6·25動亂 初期 忠北 永同地區의 民間人殺傷事件에 관한 硏究(Ⅰ)- 老斤里의 美軍 對良民 集團殺傷事件을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1. <한겨레신문>, 1994. 5. 4(수) 사회면 기사.
2. Arirang TV in Korea, 1997. 6. 25 방영.
3. <세계일보>, 1997. 8. 25(월) 사회면 기사.
4. <동아일보>, 1997. 8. 26(화), 사회면 기사.
5. 한겨레신문, <<한겨레21>>, 제174호, 1997. 8월. pp.44-46. 6. CNN in the U.S.A, 1997. 9. 8. Arirang TV 방영내용 중심 방영. 7. MBC, 1998. 7. 28 방영. 프로명 <시사매거진 2580> 8. KBS, 1998. 7. 29. <뉴스> 프로에서 합동위령제 취재 방영. 9. 동아일보사,<<News+>>제145호, 1998. 8월. p. 10. 1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와 인권위원회, 계간<<인권>>,1998년 여름호(9월), 제43호, pp. 52-58.


2)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5단계의 소단계로 분류하여 분석적으로 접근한 글은 강정구, "미국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1994 여름호 참조. 이를 일부 수정하여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에 같은 제목으로 실렸다.

3) 물론 이 기간에도 빨갱이 혐의로 재판과 같은 적법한 절차도 없이 권력기관에 의한 자의적 학살이 개별적 수준에서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노가원, {남도부}(상), 월간 말, 1993, 176∼179쪽

5) 여순군민항쟁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개입은 하우스만,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하우스만 회고록", {한국일보} 1990년 11월 연재분을 참고할 것. 그의 증언은 아래와 같이 이미 주권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군작전권을 미국이 자의대로 행사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고문단장 특사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 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진압사령부에 급히 파견되었다. … 다만 내가 공식적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 사령부가 효율적 진압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영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던 것만 여기서 밝힌다"({한국일보} 1990. 11. 14).

6) 김종원(64·서귀포시 강정동)씨는 매년 2차례의 제삿상에 4·3으로 희생된 형제자매와 친척 등 15명의 신위를 한꺼번에 모신다. 당시 처참한 상황을 14살 소년 나이에 토끼눈으로 지켜본 그는 “그때 일을 마음 속에 묻어두려고 해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고 말한다.“49년 1월 갑자기 우리 가족이 피신한 곳에 토벌대가 들이닥쳤어요. 어머니, 남동생과 같이 있었는데 나는 도망갔지만 동생은 총맞아 죽고, 어머니는 붙잡혔어요. 어머니는 토벌대가 끊은 동생의 머리를 들고 토벌대를 따라 서귀포까지 간 뒤 행방불명되고…. 당시에 어머니 마음이 어뗐겠습니까”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2월에는 여동생(11)마저 토벌대의 손에 숨지고, 누나(17)는 도망갔지만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나머지 아버지 형제 가족들도 마을 부근 굴속에 피신했다가 토벌대에 발각돼 모두 희생됐다. <한겨레신문> 1998.4.1

7) 안종철,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실태조사 보고서 제1집: 여수지역 편} 1998.

8)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유성철·이상조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정}, 한국일보사, 1991, 92쪽

9) 정진상, [한국전쟁과 계급구조의 변동], 한국산업사회연구회 창립10주년기념논문집, {계급과 한국사회}, 한울, 1994, 118쪽).

10) 반핵평화운동연합, {손병선 의장 모두진술}, 서울, 1992, 2쪽

11) {북한 30년사}(김학준, {한국전쟁}, 박영사, 1989, 345쪽에서 다시 옮김. 또한 권영진, [6·25살상 다시 본다], {역사비평} 1990년 봄호, 302쪽에서도 재인용되어 있음

12) 대한민국외무부 외교문서 제1회 공개자료:분류번호 729.5 일련번호 146, "한국전쟁시 피납치인 명부관계, 1954" 마이크로 롤번호 G-0001, 후레임번호 1065-1138).

13) 커밍스와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90, 148쪽

14) "[사면] 8.15 석방 김선명씨는 누구인가" {한겨레21} 1995. 8. 11

15) {한겨레신문} 1995. 9. 30

16) 정희상,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6·25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발굴 르뽀}, 돌베개, 1990;이태섭, [6·25와 이승만의 민중통제체제의 실상],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참조.

17) "50년 고양서 부역혐의자 대학살", {중앙일보} 1993. 9. 23; 최강선, "6·25양민학살 이제는 밝혀야 한다"; 산청·함양 양민 705명에 대한 국군의 학살은 각각 {한겨레신문} 1994. 1. 8;1993. 6. 7

18) "양민 죽이고 공비소탕 허위보고" {한겨레} 99.10.13

19) {뉴욕타임즈}, 1951년 2월 21일자; I. F. Stone, {비사 한국전쟁}, 신학문사, 1988, 276쪽에서 다시 옮김.

20) [6.25특집기획: 피 맺힌 恨 쌍교산 초막골] {비사벌신문}, 경남:창녕, 1991년 6월 27일.

21) 오연호,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백여명 학살 사건" {말} 1994년 7월호, 44쪽, 이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실화소설 형식으로 쓰여졌다. 정은용,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다리, 1994.

22) 최근까지 보고된 미군의 양민학살 주장은 아래와 같다. 경북고령군 고령교 피난민 다수사상, 충북 단양군 영춤면 상2리 약 300명 사망, 경북 울릉군 독도 1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보문면 신성리 약 50명 사망, 충북 예천군 판교면 판교리 10명 사망, 충북 영동군 황간면 121명 사망, 전북 익산군 익산면 이리역54명 사망, 경북 구미 형곡동 100명 사망, 경북 의성군 금성면 17명,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교 폭파 피난민 다수 사상, 경북 포항시 60명, 경남 함안군 군북면 30명 사망,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30명, 경남 사천시 곤명면 50명 사망, 경남 마산시 진전면 83명 사망,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춘 80명 사망 등이다.

23) 창녕·사천서도 양민학살 있었다" {한겨레} 99.10,05; 월간 {말}도 마산의 양민학살을 "마산 곡안리 재실에서 쓰러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월간 {말} 1999년 11월 호

24) "제2의 노근리--충북 영춘 곡계골의 4백원혼: 미군이 피란민 시체더미 촬영해갔다. 학살의 증거를 공개하라" 월간 {말} 1999년 22월 호

25) 시성문.조용전, [중국인이 본 한국전쟁: 판문점 담판] (서울: 한백사, 1991), 256쪽

26) {조선통사(하)}, 417쪽

27) 미국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것은 로동당의 정책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김일성은 당중앙위 제3차전원회의에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에서 감행한 모든 죄악을 국제적으로 날카롭게 또 무자비하게 폭로하는 사업을 일층 열성적으로 일층 광범하게 전개하여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놈들이 인류역사상 유례가 더문 온갖 야수적 식인종적 만행들을 세계 인류앞에 더욱 국제적으로 폭로하여 우리의 친우들에게는 미제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강화시키고 적의 진영에 속한 자에게도 미제에 대한 의아심을 조장함으로써 이 야수들을 더욱 철저하게 고립시켜야 하겠읍니다." 김일성, [현정세와 당면과업],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자료집}2, 99쪽.

28) 아래의 기술은 다음에 대부분 의존한다: Monica Felton, That's Why I Went, Lawrence & Wishart, 1953;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보고서". 김주환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29) 고 마태오 신부, {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 (서울: 중원문화, 1988), 111쪽

30) 북한의 남일과 미국의 해리슨이 정전조약에 서명한 12시간 이후부터 모든 지상, 해상, 공중의 전투행위는 중지하게 되어 있었다. 군사적 좌절감에 빠진 미국은 정전협정 서명후 발효까지의 12시간 동안에 이러한 패배감과 분노를 타락하고 야만스런 보복행위로 표출시켰다. 하나는 정전서명 1시간 20분 직후 미국 세이버 젯트기 4대가 중국영토 100Km내에 있는 민간비행장 에 침투해 소련 민간항공기를 폭격해 15명의 승객과 6명의 승무원을 살상했다. 또 하나는 정전발효 30분 직전에 중폭격기 편대가 평양시를 마지막으로 강타한 일이다. 울분에 휩싸인 야만적인 광기와 '자유와 평화의 사도'라는 야누스적인 미국의 모습에서 참모습은 오히려 전자가 아닌가 여겨지는 행위이다. Alan Winnington & Wilfred Burchett, Plain Perfidy, London: The Britisch-China Friendship Association, 1954, p.55

31) 스톤 앞의 책, 334쪽

32) 홍동근, {미완의 귀향일기} (서울: 한울, 1988), 119쪽

33) 브루스 커밍스와 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158-9쪽

34) 김진계 구술.김응교기록 보고문학, {조국: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상권, (서울: 현장문학사, 1990) 182쪽

35) 화학전과 세균전의 논의에 관해서는 김주환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에 수록된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 보고서]와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에 대한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를 참조할 것. 보다 자세한 논의는 강정구,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동국대학교사회조사연구소, {동국사회연구}, 창간호 1992. 또한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역사비평, 1996) 제2부 2장에 수록되어 있음.

36) 김낙중.김남기, {굽이치는 임진강: 민족통일의 갈망을 안고 임진강을 건너간 한 젊은이의 열정과 고난} (서울: 삼민사, 1985), 169쪽

37) 커밍스와 할리데이, 앞의 책, 163쪽; 정전협정을 고의적으로 결렬.지연시키기 위한 미국의 이중속임수와 서방언론의 무비판적 수용에 관한 훌륭한 글로는, Alan Winnington & Wilfred Burchett 앞의 책

38) 존 할리데이, [북한의 수수께끼],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83쪽

3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통사(하)} (1958간행) 서울:오월, 1989년 영인간행, 468-69 쪽; 또한 전쟁파괴상황에 대해서는 박창옥, "1954-1956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에 관한 보고", 김준엽.김창순, {북한연구자료집}, 제2집, 서울: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528-29쪽

40) 이에 대해서는 강정구, "김대중정부 통일정책의 평가와 전망" {진보평론} 창간호, 1999

41) 1999년 8월 KBS의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면담에서 당시 핵대사였던 갈루치는 '몇 분만 늦었더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핵폭탄적 발언은 당시 한반도가 얼마나 일촉측발의 순간이었는지를 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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