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달동 양민집단학살 참살자 86위 제63주기(20) 합동위령제

봉행 및 추모 행사   

 

일 시 : 2012122411:00~12:00

장 소 : 문경시민문화회관 2층 다목적실

주 관 : 문경 석달동 양민집단학살 참살자 위령사업 추진위원회

후 원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동방문화진흥회

()제주 4.3 평화재단

대한민국 평화재향군인회

새날희망연대

자비의 집(서울)

 

식  순 

사회 : 주정헌(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 

1부 합동위령제

- 전통제례

· 독축 : 김주태(주식회사 오주물산 대표)

· 초헌 : 채의진(유족대표)

· 아헌 : 김원웅(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 종헌 : 정희상(시사주간지 시사IN 탐사보도 전문기자)

 

2부 추모() 행사

- 참살 영령들에 대한 묵념

- 내빈소개

- 참살실상 및 경과보고

- 유족대표 인사

- 추도사

김원웅(전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 단재 신재호선행 기념사업회 회장)

이이화(역사학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공동상임대표)

김영훈(전 제주시장, 제주 4.3 평화재단 이사장)

- 추도시

김회정(여류시인)

- 헌 화

- 폐 식

 

축     문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단기 4345, 서기 20121224

산간 오지 석달 마을에서

석달마을 주민 여든여섯 분이

국군들에게 집단 학살 당한지

어언 63주기를 맞이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아니 티끌만한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참으로 억울하게 참살되신 영령들께

문경시민들을 아울러

대한민국 전 국민들을 대표하여

13세의 어린 나이에

참살 현장에서 형님과

사촌동생 주검에 깔려서

기적적으로 화를 면한

채의진은 삼가 고하나이나.

 

오호! 애재

오호! 통재

영령들께서 너무도 억울하게

참살 당한지 어언 63

63년 전 19491224

그 날은 해와 달이 빛을 잃었었고

천지가 제자리를 잃었었고

산자들은 넋을 잃고

그토록 밝으신 임들의 모습 찾을 길 없었고

그토록 맑으신 음성 들을 수 없었으니

저희들의 삭막한 심정을 무엇으로 비교하오리까.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치며

스스로 마음 가눌 길 없었나이다.

임들의 육신은 비록 멸하였다하나

임들의 본신은 멸함이 없이

당당한 법신이 항상 머물고

맑고 밝은 마음은 만고에 태평하시어

영원토록 임하시니라

 

바라옵건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대자 무량 공덕을 이룩하시며

이 땅의 인연 버리지 마시옵고

찬란한 빛으로 돌아오시어

뭍 중생을 제도하는 큰 뜻을 밝혀주옵소서

맑은 술과 포과로서 영위전에 올리오니

기쁜 마음으로 음향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추도사>

안타까운 마음으로 혼령을 위로합니다

이이화(역사학자)

 

우리 후손들은 문경 석달마을 양민집단학살에 희생당하신 혼령에게 다시 위로의 자리를 조촐하게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몇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올해에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일도 있었고 실망을 안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경 석달마을의 양민집단학살 진상규명 결정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아 혼령에게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를 드렸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재판에 승소를 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고 그 판결에도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첫 횃불을 붙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아직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방해를 하거나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탄압해온 세력이 새로 정치권력을 잡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설득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또 많은 민주인사들과 인권운동가들은 지난 진실화해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라 이루어진 과거사 정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진상규명기본법을 개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진한 진상규명과 진실한 명예회복 그리고 배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리라 믿습니다.

원통하신 86혼령이시어, 시련이 아직도 거듭되고 있지만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새 입법의 국회 통과와 계속되는 정당한 재판의 결과를 지켜보아 주소서. 그리고 다음 위령제에는 새로운 축제가 되도록 힘을 보태주소서.

올 겨울은 너무나 춥습니다. 지하에 계신 혼령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편안하게 잠드시고 다음 해에 다시 대화를 나누소서.

20121224

이 이 화

 

 

<추도사>

문경 석달리,역사의 진실을 간구하는 지성소(至聖所)

김원웅(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스산한 시절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진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의 진실과 싸우다가 분열되고 무너지는 민족공동체가 될런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며칠전에 치룬 선거를 보면서 우민(愚民)정치가 가장 나쁜 정치이다.우민정치가 폭군정치보다 나쁘다라고 설파한 플라톤의 주장이 상기됩니다. 히틀러를 뽑은 것도 민주주의에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도 상기됩니다. 생물학자 안드레이스 바그너가 생명을 읽는 패러독스(Paradox)”란 책에서 이성적으로 보면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게 정상임에도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것을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런 결과는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의 역사와 싸워야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낼수 있는 세력이 우리 공동체에는 있습니다.그들은 도올의 표현대로 하면 불의라도 박박 우기면 역사의 정의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그런 거짓세력은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동 만으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공영방송의 장악 만으로도 힘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종편도 만들었습니다. 민중들은 여기에 맞서 나는 꼼수다라는 21세기의 의병으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가난하고 못 배운자들이 자신을 배반한 선택이었습니다.기득권층의 박박우기는 거짓논리에 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넘어갔습니다. 이들이 자기 배반의 선택을 한 것이 그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이란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일본을 조국이라고 세뇌하고 독립군을 잡는 것이 조국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세뇌했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 석달리, 63년 전 바로 이들 거짓세력이 저지른 불의의 현장입니다. 이 작은 골짜기는 역사의 우주입니다.나락 한올 속에도 우주가 있듯이 석달리에도 우주가 있습니다. 석달리의 진실을 국민 모두가 뼈저리게 인식하게 될 때에 참된 민주주의가 꽃 필 것입니다.

석달리는 우리 공동체에게 역사의 진실을 간구하는 지성소입니다.

 

역사는 끝내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역사에는 이성의 길을 찾아가는 네비게이션(Navigation)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민족 대한민국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0121224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 원 웅

 

 

 

 

 

 

<추도사>

문경석달동 양민학살참살 원혼들을 위무하며 

김영훈(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먼저 문경석달동 양민집단학살참살자 86위 제63주기 합동위령제를 맞이하여 삼가 옷깃을 여미며 희생자 영령님들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더불어 억울하게 부모형제를 잃고 기나긴 세월을 고통 속에 견디어 오신 유가족님들께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드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19491224, 이름조차 짓지 못한 젖먹이를 포함한 어린이와 부녀자 등 불가항력의 문경 석달동 양민 86명을 처참하게 참살했습니다. 전시에도 있어서는 안 될 천인공노할 만행이 평상시의 백주대낮에 벌어졌으니 어찌 통탄치 않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참극 속에 희생자들을 제대로 신원조차하지 못했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침묵의 세월을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유족님들의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진실 지키기와 희생자 명예회복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었습니다.

유족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지난한 투쟁으로 진실화해기본법이 제정됐고, 결국 2007년 정부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집단학살사건으로 진실규명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점은 2008년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이 원고패소와 항소를 거듭하는 우여곡절 끝에 올해 5월 국가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 국가배상이 희생자 영령님의 억울한 죽음과 유족님들의 고통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어온 유족님들에게 많은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오랜 기간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오늘 합동위령제 준비를 위해 애쓰신 석달동 양민참살자 위령사업 추진위원회 채의진 상임대표님을 비롯한 유족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억울하게 돌아가신 석달동 86위 희생자 영령님들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20121224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김 영 훈

 

 

 

<추도시>

돌당골 86영령의 부탁

                                                                                              글. 김회정(시인)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돌당골마을

 

첫눈 내릴까요

우리 아가 고운 꿈결처럼

엄마 젖 같은 하얀 소복 눈이

샛골 따라 소막골 지나

돌당골까지 내릴까요

 

마을 사람 더러는 장에 가고

더러는 나무하러 산에 가고

아이들은 방학하러 학교 갔어요

아랫목 화롯불같은 우리 할머니

대청마루 같은 우리 할아버지

주월산처럼 마을을 지켜주십니다.

 

아아! 그러나

19491224일 정오 무렵

마수처럼 들이닥친 국군 70여 명에 의해

한순간 모든 걸 빼앗겼습니다.

질러, 질러, 불질러! 이 동네 집들을

모조리 불질러!

마을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 무자비한 총질에

마을사람 86 명이 총살되었습니다.

지게에 볏가마니 지고 오던 청년들이 죽고

방학하고 돌아오던 아이들도 죽고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논바닥에 산비탈에 모아놓고 죽였습니다

엄마도 죽이고 젖 빨던 아가도 죽이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죽였습니다.

살았나

죽었나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고 또 죽이고 확인하고 또 죽였습니다

 

63년이 흘렀지만 아픔과 슬픔을 달랠 길 없어

86 영령 피투성이 되어 구천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바람결에 한 맺힌 울음소리

비오면 빗줄기에 피맺힌 울음소리 들려옵니다.

시쳇더미 속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분들은

살았지만 사는 게 아닙니다

돕기는커녕

생존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 수색하고

구속하고 괴롭혀 죽이려 했습니다.

 

국민행복추진을 한다구요

올해도 곧 첫눈이 온다구요

메리 크리스마스가 내일이라구요

석달리 돌당골 논에 산비탈 그늘에

허옇게 쏟아지는건 눈이 아녀요

솜사탕같은 눈이 아녀요

어매요, 아배요, 형아야 내 동무야

할매요, 할배요 왜 거기 허옇게 쓰러져 내립니까

아재요, 아주매요 왜 거기 허옇게 내려 쌓입니까

살아남아 불에 그슬린 소들이 미쳐 날뛰고

시체를 먹은 개들은 뻘건 주둥이로 날뜁니다.

 

63주기 86영령 앞에서 대한민국 , 국가에게 묻습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대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인들 70여 명을 보내 무자비하게 살해한 석달사건을 모릅니까?

30년동안 비밀에 부쳐 미군 비밀문서 G2에 거짓으로 꾸몄습니까

왜 미군이 거짓서류를 가지고있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은 벙어리처럼 오랜세월 입다뭅니까

추모제 지내라 몇 푼 주고 입을 꾹 다문 국방부는

군인정신이 있습니까?

 

대한민국과 국방부는 감히 하늘같은 주권자 86명을 죽여놓고

어찌하여 63년동안 왜곡시킨 채 은폐하고 있습니까?

국민 지켜줘야 할 국방부는 86명이나 죽여놓고

죽지못해 사는 생존자와 국민을 아직도 조롱합니까

 

63주기 86영령 앞에서 대한민국, 국가에게 또 묻습니다

 

국가는 무엇이며 그 존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가보안법은 누굴 위한 법입니까

그 참혹한 살륙의 날에 착한 국민을 왜 지켜주지않았습니까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아무런 죄없는

돌당골 민초들을 총살시켜놓고 공비들 만행이라고

왜곡시켜 미군사령부에 허위로 보고하고

전세계에 거짓으로 알리고 참살자들 호적도

거짓으로 꾸미고 지금껏 정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과연 정상적인 나라 맞습니까

살륙의 날, 마을 어른들 부녀들, 젖먹는 아기들

새끼 벤 암소, 갓 태어난 송아지와 닭도 개도 죽었습니다.

 

들어보세요

사람들아, 살아있어 사람들아

돌당골 86 영령이 날마다 밤마다 부르짖는 소리를!

우리 여기 아직 죽지 않았소

우리는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헤메고 있소

정말 나무너무 억울하고 너무너무 원통하오

천손의 고향을 더럽힌 괴한을 꺾어

하루바삐 우리 원한을 풀어주오

아무리 수억조,경을 보상금으로 내놓는대도 소용없소

우리 이 차가운 논바닥에서 피투성이로 뒹굴고

이 그늘진 비탈산에서 63년 울고 웁니다.

 

제발! 원한을 갚아주오

국방부처럼 입다물지말고

국가권력처럼 외면하지 말고

원수를 갚아주오

원수를 갚아주오

제발! 하루빨리!! 

20121224

김 회 정 낭송

 

 

 

 

 

 

 

 

<유족의 변> 

,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오늘은 지금부터 63년 전인 우리나라가 36년간의 일제 강점 식민치하에서 해방 된지 4년이 지난 서기 19491224일 제가 태어나서 성장한 저의 고향인 문경시 산북면 석달동(일명 돌당골)에서 국군에게 천진한 마을 주민 86명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너무나도 원통하게 집단으로 참살당한지 꼭 63주기가 되는 참극의 바로 그 날입니다.

63년 전 바로 오늘 정오경에 국군 제2사단(사단장: 송호성 준장), 25연대(연대장: 유해준 중령), 2대대(대대장: 권정식 대위), 7중대(중대장: 유응철 대위)2소대(소대장 대리: 안택효 중사)3소대(소대장: 유진규 소위) 장병 69명이 느닷없이 산간벽지인 저희 마을 석달동에 들이닥쳐 국군이 왔는데도 반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트집 잡아서 24가구의 초가집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마을 주민들 모두에게 빨갱이라는 망측스런 누명을 뒤집어 씌어서 마을 주민 전체를 남녀노유 가림 없이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아무런 죄도 없는 아니 티끌만한 잘못도 없는 천진하고 순박한 마을 주민 86명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12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습니다.

63년 전 바로 오늘 저희 고향 석달동에서 잔학한 국군의 만행으로 참살된 86명 중에는 돌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름도 지어지지 않은 젖먹이 아기 5명이 포함된 5세 미만의 어린이 11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였으며 65세 이상 82세까지의 노인이 10명이었고 여자가 절반인 42명이었습니다. 참살자들 중에는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일찍 귀가하던 초등학교 학생도 마을 뒤 산모퉁이에서 2학년인 채영해는 왼쪽 머리가 반쪽 떨어져 나간 채, 3학년인 김병영은 왼쪽 팔이 살한 점 없이 뼈만 앙상히 남은 채, 6명이나 참살 당했습니다. 그리고 24가구 중 전 가족이 몰살된 집이 5가구, 여자 1명만 생존했거나 남자 1명이 생존했어도 고령이어서 대가 끊긴 집이 11가구나 되었습니다.

,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19491224일 잔학한 국군의 만행으로 저질러진석달동양민집단대학살이 있을 당시 석달동에는 빨갱이는커녕 그들과 내통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래전 언젠가 석달동 서쪽 주월산(해발 813m)에 빨치산 수명이 은거한다는 소문과 이웃 동네 청장년 2~3명이 그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그 해 연초에 석달동 청년 3명이 그들과 내통했다가 탄로되어 경찰에 잡혀가서 대구지법 상주지원에서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이었기 때문에 그들 3명 외 어느 누구도 빨치산과 내통하는 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이웃마을이나 관에서도 다 인정했습니다. 석달동 주민들은 마을이 형성 된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산간벽지에서 배우지 못한 탓으로 세상사를 모르고 자손대대로 물려받은 농사일을 주업으로 조상의 묘를 돌보며 오직 관령에만 순종하며 이웃끼리 오순도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건만 그런데 도대체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밝은 대낮에 아니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19506256.25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 19491224일은 6.25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전시가 아닌 평시였습니다. 아니 전시에도 이런 끔찍한 만행이 일어나서는 안될텐데 더구나 전시도 아닌 평시에 그것도 적국의 군대가 아닌 우리 아군이,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우리 국군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는커녕 아무런 죄도 없는 아니 티끌만한 잘못도 없는 자국의 선량한 민초들에게 어떻게 감히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그 때 아비규환의 그 참극의 현장에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형님과 사촌동생(국교2) 시신 밑에 깔려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장본입니다.

그런데 국군의 만행으로 저질러진석달동양민집단대학살에 대하여 지자체와 국가의 사후 수습책 또한 가관입니다. 그러니까 국군 2개 소대 병력이 느닷없이 석달동에 들이닥쳐서 마을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티끌만한 잘못도 없는 천진하고 선량한 석달동 주민들을 남녀노유 가림 없이 86명을 학살하고 난 바로 그 다음 날인 1225일 문경경찰서에서 수명의 경찰관이 문경군청과 산북면사무 직원 수명과 사진사를 대동하고 학살 현장에 와서 사진을 찍고 해방 후 폐광이 된 마을 인근에 위치한 중석광굴에 피신 중이던 생존 중상자들은 병원으로 옮겼으나 피투성이인 채 이리저리 엉켜있는 참살 시신들은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그래서 참살당한 3일째인 1226일 친인척을 찾아서 흩어졌던 몇 안되는 생존 유족과 친인척 그리고 이웃동네 주민들이 힘을 합쳐서 참살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수의도 없이 관도 없이 참살당시 입은 옷 그대로 새끼줄로 일곱매끼 묶어서 가까운 산에 매장하고 어린이와 미성년자와 연고가 없는 자 그리고 시신이 불에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분들의 시신 37구는 참살현장 인근 텃밭에 가매장 했습니다. 그리고 몇 안되는 생존자들은 집들이 모두 불타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잠잘 곳도 없어서 모진 목숨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멀리 친인척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3주가 지난 195011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부 참모장인 신태흥 소장과 이정희 문경군수와 이의승 문경경찰서장을 대동하고 30여대의 군용 짚차 군용 트럭 장갑차의 호위를 받으며 석달동 사건 현장에서 약 4km 떨어진 김룡국민학교까지 와서 몇몇 생존 유족들을 접견하고 위로금 100만환을 이정희 문경군수에 전달하고 갔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국군의 만행으로 저질러진석달동 양민집단 학살에 대하여 언론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언론의 입을 봉쇄했으며 신성모 국방장관이 1950117일 석달동 참살자들을 접견하고 간 후 내부적으로는 이의승 문경경찰서장과 이기용 산북지서장을 직위해제하고 학살관련 부대장인 제2사단장 송호성 준장과 제3사단장 이응준 소장, 25연대장 유해준 중령, 7대대장 권정식 대위 등을 직위해제 등으로 문책했으나 대외적으로는석달동양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언론을 통해 공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왜곡 보도케 하고 피학살자들의 호적부에도 공비들의 만행으로 왜곡해서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후 학살의 원흉인 이승만 정권은 물론이거니와 1960419일 학생의거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집권한 민주당의 윤보선과 장면 정권 때를 제외하고 5.16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8년간 독재 정권을 지속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때는 물론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 독재 정권 때는석달동양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입도 뻥긋 못하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동안 저는 크게 한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었고 크게 한번 소리 내어 외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말부터 이 땅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자 저는 이제는 때가 왔구나 싶어서 21년간 봉직하던 교단을 팽개치고 사회로 뛰쳐나와서 크게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크게 소리 내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사고사 당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노환으로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도 남은 가족의 애통함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먼저 세상을 떠난 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도리인데 하물며 저는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머니, 형님, 형수, 누나, 제가 양자인 숙모, 사촌누나, 사촌 여동생, 사촌 남동생 등 9명 가족을 한날 한시에 우리 국군들에게 참살당하고 난후 그동안 저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간의 저의 삶은 삶이 아니라 그리움과 슬픔과 분오와 고독과 절망과 증오와 저주로 얼룩진 통한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제가 1986918일 남들이 좋다고 하는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직을 느닷없이 팽개치고 너무나도 억울하고 너무나도 원통하게 참살되신 우리 마을 석달동 주민들의 해원과 신원을 위해 미친 듯 뛰어 다닌 지 어언 26. 그동안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부서와 국회 등에 탄원서를 수없이 제출하면서 사회를 향해 외친 저의 외침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하늘을 꿰뚫었지만통한의 메아리로 되돌아왔을 뿐이었습니다. 그 실례로 원혼들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16년 동안이나 두발을 깎지 않고 버티어 보기도 했으며, 국가 사회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20년 넘게 빨간색 모자를 쓰고 다니지만 그동안 얻어진 성과라면 5년 반 전인 2007626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진실규명결정이 내려진 것뿐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는석달동양민집단학살에 대해서진실규명결정을 내리면서 다음 사항들을 정부에 권고 했습니다.

 

. 국가의 사과와 피해구제

문경 석달 사건은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등이었던 비무장 민간인들을 어떠한 선별 절차나 법적 근거 없이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집단학살한 것은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될 명백한 죄과이다.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었고 사실과 전혀 다르게 빨갱이로 낙인찍혔던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 이후 현재까지 반세기 이상이나 죄인처럼 살아온 유족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국가는 과거 국군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 및 국민들에게 진솔하게 사과하여야 한다.

국가는 현재 생존한 부상자들에 대해 그 부상이 사건으로 인한 부상임을 확인한 이후 이에 대한 의료비를 최대한 지원하여야 한다.

국가는 사건 관련 유족들의 생계 상황을 파악하여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생계비를 지원할 것을 권고한다.

 

. 화해 조치

국가는 사건 관련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이후 지속적으로 위령제를 봉행할 수 있도록 재정적이고 제도적인 지원을 지방자치단체와 협의·분담하여야 한다.

 

. 기록 정정

호적은 기재 사항에 대한 공시·공중 기능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개 사항이 일응(一應) 진실하다는 추정을 받는다. 현재 사건 희생자들의 제적부상에는 이들이 사건 현장인 석달마을에 출몰한 공비에 의해 총살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전혀 다르다.

국가는 새롭게 규명된 진실에 의거하여 법적 절차를 통해 사건 관련 희생자들의 호적을 사실대로 정정하여야 한다.

 

. 평화인권교육

국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잘못 기록된 공식 역사 기록이 있다면 그것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국가는 모든 국민들에게 진실규명 된 이 내용을 적극적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아울러 국가는 문경 석달사건 조사결과보고서의 내용을 평화와 인권교육 등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권고사항이 이루어진 것은 한가지도 없습니다.석달동양민집단학살참살자 제적등본엔석달동사건은 공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기록된 그대로이다. 19491224일 국군의 만행으로 저질러진석달동양민집단학살당시 13(음력 1936420일생)이던 저의 지금 나이는 만 76세입니다. 그동안 세상살이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탓으로 3년 전에 관절염(수술), 위암(수술)이 덮쳐서 투병중이지만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63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하게 참살된 저의 마을 석달동 주민 86위의 원혼들의 통한을 꼭 풀어 드릴 것을 영령들께 굳게 다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첨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5년 반 전인 2007626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진지 14개월 지난 2008710일 저와 조카와 외사촌과 생질 등 4명이 국가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1(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패소 당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항고하여 또 패소(2009. 7. 31) 당했으나, 대법원에 상고하여 승소(2011. 9. 8)함으로서 국내에서 최초로 소송을 통해서 배상금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12. 12. 24

유족대표 채 의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