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 정 구


최근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미국 AP통신의

발표가 있자 한국전쟁 중에 저지르진 양민학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 학살사건이 세계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또 자유와 민주주의의 화신인 미국이 어떻게

양민을 학살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한국전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놀라기 보다 이 번을 계기로 한국전쟁의 진실,

특히 미국의 행위에 대한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이러한 양민학살에 대하여 일부의 문제제기가

있어 왔지만 전혀 사회적 및 국제적 쟁점이 되지 못하다 미국계 통신사가 대대적으로

발표하자 금방 쟁점이 되는 스글픈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1)





한국전쟁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는 틀에 박힌 정답이 있어왔다.

곧, 전쟁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고 전쟁에 관련된 모든 잘못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고, 남한은 희생자에 불과하고 미군과 남한군은 거의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담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한완상사건이나 최장집사건이나

{태맥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사건처럼 빨갱이 동조세력으로 몰려 중도하차,

사회적 매장, 법적인 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까지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반인륜적인 범죄적 행위에 대한 진실은 은폐된 채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는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였다. 이 결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문제까지도 은폐하는 자폐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동 티모르에 파견된 한국군에게도 또 이러한 사실이 발생하고 또 은페라는

죄악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제 이 번을 계기로 이러한 근거 없는 성역은 허물어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진상은 규명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에 관련된 양민학살은

그것이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졌건, 또 남한군, 북한인민군, 이승만정권 등에

의해 저질러졌건 과거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의 차원에서 철저히 매듭지어져야

한다. 이 글도 이러한 역사바로세우기의 출발로서 문제제기를 하고 이를 문제의

지속화를 위한 단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양민할살에 대하여

미군의 노근리학살사건보다는 한국전쟁 중 저지러진 양민학살의 모집합 또는

큰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포괄적 구도 속에 노근리 양민학살이라는

부분집합을 자리매깁하여야만 노근리학살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다.





2. 전쟁 중의 양민학살에 대한 포괄적 양상





한국전쟁 중에 저지러진 양민학살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포괄적으로

정리해 보겠다. 이를 단계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전쟁"시기인 1948년 2.7구국투쟁에서

6.26전쟁까지의 양민학살이 있었다. 이 전쟁기간은 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 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2) 이

기간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민항쟁에서 발생하였고 또 유격대소탕전의 과정에서

청천벽력작전을 구사하였으므로 주로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학살을

당하였다.





둘째는 6.25전쟁 초기의 양민학살이다. 무엇보다 전쟁 초기

주로 평택이남에 있던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만정권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학살, 노근리나 이리역 폭파사건과 같은 미군들에 의한 체계적 학살, 북한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 토착 공산세력과 인민군에 의한 남한 양민학살(남한 정부의

공식적 발표는 약 129,000명이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수복과정에서 전쟁 중

부역자혐의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등이다. 대체로 남한에

대한 양민학살은 전선이 남쪽 땅에 형성되었던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전선이 1951년 봄 이후는 중부에 전선이 고착되므로 단양의 곡계골과 같은

지역에서도 미군의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주로 남한 땅에서의 양민학살 사건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제2전선인 빨치산에 대한 소탕작전 과정에서 저질러진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이다.





셋째는 미군과 남한군이 50년 10월 1일 38선을 월북한 이후

북한을 점령한 역 4-50일 동안 저지른 북한양민에 대한 학살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172,000여명의 학살이 주로 미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나 실제의

학살은 미군, 남한 국방군,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저질러졌다.





넷째는 전쟁이 51년 6월이 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착화됨에 따라 남한에서의 집단적 양민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3) 미군의 북한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북한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수십만의 북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3. 작은전쟁과 양민학살





한국전쟁의 시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8년 남한의 좌익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무산시키고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 등 분단세력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무력항쟁 선언인 2.7구국투쟁부터이다. 이 시점부터 50년 6.25전쟁까지

인민항쟁, 야산대와 유격대 투쟁, 38선 무력충돌 등으로 무려 10만 명의 인명이

죽음으로 몰렸다. 이미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통일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6.25전쟁

이전에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민학살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작은전쟁 전후 양민학살의 전재과정을 당시 남로당 함양군당원

하종구 씨의 진술 등을 통해 파악해본다.





1947년 7·27인민대회 뒤부터 좌익계 사람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인민대회 이후 대청(대한민주청년동맹, 명예회장 이승만), 서청(서북청년단,

위원장 선우기성), 족청(조선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 등이 주동이 되어 좌익탄압에

나섰지요. … 총만 안 들었지 몽둥이, 쇠스랑, 자전거 와이어 등을 들고 습격을

감행했어요. 이런 우익테러에 의해 함양에서도 많은 생목숨이 죽어갔습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구장인 하종기가 죽었고, 내 삼촌인 하경식도 우익청년단한테

맞아 죽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요? 우린 그냥 맞기만 했어요. 당시 중앙당에서 "폭압이 온다, 폭압이 와도

우리는 대항해서 싸우지 마라. 공위를 빨리 열어야 하니까, 우리가 맞서 싸우면

방해가 될 것이다. 우익테러에 대해서는 도전도 하지 말고 도발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각 지방 당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1948년 2월 7일이 밝아왔다. 천왕봉에 쌓아둔 달집을

태운 봉화를 신호로 2·7구국투쟁은 시작되었다. 함양군 곳곳에 전기가 두절되었고

교량이 폭파되었다. 당원들 중 일부는 복수심에 불타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인

서청, 대한원들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 얘긴즉 남도부를 따르는 우루목

사람들이 "악질경찰" 정명길을 잡으려고 추격했다는 것이었다. 정명길은 일제시절부터

경찰을 하던 사람으로 당시는 함양경찰서 경무계(뒤에는 지서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추격을 받은 정명길은 함양군 수동면 쪽으로 도주했다. 정명길은 어디론가

잠적해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그를 추격하던 남로당원들은 되돌아와서 경찰서를

접수해버렸다.4)





이렇게 시작한 작은전쟁은 곧, 이어 4·3항쟁, 여순항쟁5)의

대대적인 인민항쟁으로 이어진다.





1) 4·3항쟁과 양민학살





4·3항쟁은 제주도민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통일투쟁이었고, 또 도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민중적 항쟁이라는

특성 외에도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실체 희생자의

80%이상이 무고하게 또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양민학살이라는

특성을 띤다.





4·3항쟁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를 주도한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6)

항쟁발발 초기부터 미국은 경비대장 김익렬에세 딘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인 CIC의

고급장교를 통하여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국제적으로 범죄시 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촉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김익렬,1994: 312-314). 이에 제주도 미군사령관을

강경파인 브라운으로 교체하고 또 경비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하여 한 달여

만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물론 직접적인 행동대는 이러한 미군정이 양육하고 또 그들의 철저한

앞뢜이와 하수인이 된 친일파 지배하에 있는 경찰과 경비대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 미군정의 하수인 집단인 경찰과 군대 및 테로청년단을 고스란히

인수받은 이승만정권은 해안선 5km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지역으로

지정하여 48년 11월부터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승만정부

하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은 그 책임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부 수립 9일 만에 미국은 한국과“주한미군은 대한민국 국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는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였고

게다가 당시 제주도에는 최소한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그리고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동시책임은 면할 길 없다.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는 미군정과 이승만 양자의

필요에 의해서 행해졌다. 미군정의 경우 5·10선거를 실제의 내용이 아무리

허구일지라도 겉으로 보기에 무리없이 치러 남한에 이승만 단독정권을 세워

조선의 분단을 확정시키고 유엔에 공인시키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다. 그래서

군정장관인 딘소장과 그 하수인 조병옥은 4·3항쟁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또 "소련연방화 책동"이니 "국제공산주의자와의 연계" 등으로 매도하여

이를 빌미로 긴급히 무력진압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이로써 5·10선거를 마무리

짓고 조선의 분단을 제도화시키려 하였다.





이승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3항쟁 때문에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됨에 따라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고,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고, 유엔의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고,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어

이정권의 정통성 상실이 백일하에 노정 되었다. 이에 초토화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항쟁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결과 최소한 약 2만5천에 가까운 양민이 학살되었다.





2) 여수군민항쟁





앞에서도 밝혔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지만 여전히 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미군은 48년 10월 중순 여수주둔 14연대 1대대에 제주항쟁의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오후 8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장병의 대다수인 3000여명이 봉기에 참가하고 여수의

좌익들이 인민대회를 열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통치권 행사를 함으로써 단순한

군인봉기가 아닌 민군봉기로 발전하였다. 이에 2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23일

함포사격이 시작되어 한달 동안 육해공군 합동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색출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색출작업은 전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주로 "머리가

짧은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 바닥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자 등"의 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어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의 이재민 구호자료로 발표된

자료는 이 과정에서 여수를 포함한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한다.7)





여순군민항쟁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개입은 하우스만이 "한국

땅서 35년, 미군장교의 증언:하우스만 회고록"({한국일보} 1990년 11월 연재분)라는

회고에서 밝혔다. 그의 증언은 아래와 같이 이미 주권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군작전권을 미국이 자의대로 행사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나는 주한미군고문단장 특사자격으로, 그리고 육군으로

이름이 바뀐 국방경비대 사령관 고문자격으로 중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급히

설치된 여순반란사건 진압사령부에 급히 파견되었다. … 다만 내가 공식적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 사령부가 효율적 진압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진압사령부의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영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던 것만 여기서 밝힌다"({한국일보}

1990. 11. 14).





반란군은 좌익민중들과 연합하여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진압군에

격퇴당하여 지리산 등의 산악으로 들어가 2.7구국투쟁이후 형성된 야산대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한의 133개군 중

무려 118개 군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어 작은전쟁은 지속되었다. 물론 이 유격대

전쟁과 토벌전쟁에서, 특히 최덕신 등이 행한 청천벽력작전 등에 의하여 수많은

양민이 피살되고 그들의 집과 재산은 파괴되었다. 이 작은전쟁의 인명피해는

무려 10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영민피살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의 2만5천 여순항쟁에서 행방불명이 된 4300여명 대부분이 양민일 가능성이

높아 최소한 3만명 이상일 것이다.





4. 6.25전면전쟁과 양민학살: 보도연맹, 유격전과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작은전쟁에서 북한이 전쟁을 확대하고 곧

이어 미국이 27일 전쟁에 개입할 것을 선언하고 28일에 한강 북방을 미공군과

해군이 포격을 시작하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 곧 전면전쟁으로 진입했다.

이어 7월 5일 오산에 미국의 지상군이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전쟁과 양민학살은

진행되었다. 미군과의 오산전투를 치르기 이전, 곧 서울 점령전투에서나 직후는

별로 양민학살이나 대량의 살상이 전게되지 않았다.유성철의 회고와 같이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 1일부터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8) 이 시점, 곧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에서부터 양민학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양민학살 유형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 학살,

6.25발발시 형무소에 있는 죄수에 대한 집단적 처형, 국민방위군사건, 노근리나

이리역같은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인민군과 토착 공산세력에 의한 학살, 수복과정에서

남한군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제2전선 주위의 양민학살사건인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학살 등이다.





1) 보도연맹월 학살





대표적인 양민학살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에서부터

시작된다. 보도연맹은 1949년 11월 28일자 권순열 당시 내무부장관의 담화문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세력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오도돼 반역도당에

가입, 활동했을지라도 대한민국의 충성된 국민임을 염원하고 실천에 옮긴 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관용, 관대하게 용서해 줄 용의가 있음을 언명해 둔다." 보도연맹원

가운데 생자의 한 사람인 우흥원 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무고한 양민이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비료를 준겠다기에 손도장을

찍었다"("역사기행―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을 가다", {내일신문} 1994. 11. 2,

44쪽).





경남 진양군 대각면에서 이루어진 학살에 대한 증언은 전쟁초기에

이뤄진 학살의 유형을 짐작케 한다.









그 당시에 공무원 제쳐놓으면 모두 좌익 아닌가.

좌익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렇게 이야기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전쟁 후 3∼4일 후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면에서 한 40∼50명이 훈련을 받았다. 2차에 걸쳐 사람들이 죽었다.

1차는 수곡면에서 4∼5명되었는데 먼저 잡아가 버렸다. 거물급이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이었다. 2차는 몇 차례 소집훈련을 한 후 하루는 훈련하던 사람들을 모두

묶었다. 죽은 사람이 40∼50명 되었다. 명석(진양군 명석면) 근처의 골짜기에

몰아넣고 일제사격을 해 죽였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기간중에 시체를 찾으러

마을사람들이 갔으나 여름이라 썩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9)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약 25-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곧, 보도연맹에

연류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하는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을 부추겼다.





2) 형무소 수인의 집단 학살





이러한 보도연맹 외에도 6.25전면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세력 등이 수 없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재판중인

통일일꾼이었던 손병선이 재판정에서 개진한 모두진술은 민간인 학살의 체험과

통일일꾼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숫자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정부 공식 기록문서가 공개되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저의 아버지는 8·15해방 이후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 후에는 고향인

충북 영동에서 부산의 산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제가 23살 되던 이때에 동대신동의

산 위 저희마을 옆 초량 공동묘지에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미제 G.M.C.트럭이

한차 가득히 부산형무소에서 처형된 사상범들을 싣고 와서 가마니로 덮어놓은

것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이 모든 비극이 해방이후 조국이 분단된 까닭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10)







3) 토착공산세력과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한 양민학살





남한에서 공산집단에 의한 피학살자 수는 공식추계에 의하면

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 등으로 합계 128,936명이라고 한다.11)

또 남한당국이(당시 공보처 통계국) 공식적으로 발표한 인민군에 의한 남한

민간인 피랍자 수는 82,595명이다. 그러나 1959년 외무부 정보국장 이수영의

주재로 열린 피랍자명부 파악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이수영은 이 명단을 국제적십자사에

그대로 보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러한 오차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보처 통계국장은 납북인사 82,595명의 통계는 공산당의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비 민간인인 군인과 경찰을 포함시켰고, 인명중복이 있었고, 행방불명자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피랍인사 위주의 통계가 아님을 밝혔다. 결국 82,595명은 군인,

경찰 등 비민간인과 행방불명자까지 고의로 포함시켜 조작된 수치임을 실토했다.12)

이러한 통계의 자의성때문에 자료의 신뢰성이 낮아 추정하기가 힘들다. 당시

북한은 9·28 당시 미군과 남한군에 의해 피랍된 숫자가 14,112명인 것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통보했다.





전쟁의 경우 개인적 수준에서 양민학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개연성은 매우 높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 범죄행위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공식집단에 의하여 조장과 묵인 아래 행해졌느냐 하는 점이다. 남북의 대조적인

점은 북은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해 세계여론에 공식적으로 호소하여 그 진상을

공개적으로 조사할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국제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미국이나 남한은(필자가 알기로는) 북한의 학살·만행을 말로는 규탄하면서도

국제진상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언에 의하면 양민학살의 경우 북한인민군보다 남한군이 훨씬 더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험적인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지만 일본군출신 위주로

구성된 남한군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할 때 유격대출신 위주로 구성된 인민군이

연역적으로도 이는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이다.





4) 수복과정에서 남한 군인과 경찰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6.25전면전을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인민군보다는

남한의 국방군이나 경찰의 횡포에 대하여 많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할리데이와 커밍스도 뒷받침하고 있다. "컷포스는 이 시기 이승만 군대의 활동은

"전투라기보다는 대량학살"이라고 결론짓는다. 한 미대사관 직원은 1950년 9월

이승만정권의 남한에서는 "아마도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숫자는 전쟁 전기간에 걸쳐, 남북한을 통틀어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최고치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13).

이 미국대사관 직원이 말하는 10만 명 수준은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전해 준다.





또 당시 어느 한 목격자의 증언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잘 그리고

있다.









1950년 …늦은 가을… 미아리 뒷골목에선 한낮인데도

하나는 군인 또 하나는 청년 이렇게 두 젊은 사내가 젊은 아낙 한 분을 야구방망이만한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살인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 뜨문뜨문 지나던 사람들은

그 몸서리치는 만행이 역겨워 고개를 모로 꼬며 가고 또 멀리 마루턱에선 지그시

창문을 닫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끔찍한 장면을 헛기침 소리로 나무라건만

그런들 두 사내가 끄떡이나 하랴. 더욱 우악스럽게 그 연약한 아낙을 내려치고

있는 것이었다. 헉하고 후려갈기면 마치 들판에 홀로 선 강냉이 대처럼 풀썩

꼬꾸라지다가도 아, 그게 웬일이던가. 그렇게 쓰러졌던 아낙은 피를 머금은

채 마치 두억신처럼, 너무나 원통히 죽는 것을 못 참아 마침내 관속에서 그냥

관채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달려드는 원한의 두먹신처럼 일어서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분이 북쪽으로 갔는지 남쪽으로 갔는지 내 어찌 아느냐"고 항변한다.

… 이렇게 몽둥이 들고 내려치기를 서른 번 남짓 마침내 지는 해와 함께 그

몽둥이찜질 소리도 그 아낙의 비명소리도 더 이상은 아니 들려왔다(백기완,

1994, 121∼122쪽).







세계 최장기 사상범으로 수감 45년만에 석방된 김선명씨의

경우 "50년 김씨가 월북하자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국군에 총살당했고, 살아남은

김씨 가족들은 그 피해의식에 짓눌려 아예 김씨를 잊으려 했다. 그의 어머니(92)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아직도 아들이 북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그의 수감사실을 숨겨온 것이다."14)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보복성 양민학살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단학살의 경우 유족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고,

설사 유족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피해 유가족이 노령으로 인하여, 또 학살이

산간지역 등에서 일어난 경우 6-70년대의 도시화의 진척으로 도시이주 등으로

인하여 공동대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전반적으로 피해 유가족 당사자에

의한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되지 않아 양민학살이 은폐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빨갱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천벌"에 의해 낙인찍히고, 탄압과 불이익,

4.19이후 진상규명운동에 참여하였던 당사들이 대부분 옥살이를 한 경험 등으로

인하여 학살사건 등은 대부분 묻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지극히 일부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으나 4.19이후와는 달리 지금은 대부분의 피해 당사자나 유족이

죽거나 노쇠하고 또 반세기가 지나 각기 전국으로 흩어져 살기 때문에 유족회

등의 구성이 힘들어 진상규명은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렇게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난 보기가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에 있는 금정굴의 유골발굴작업이다.









"[9월] 29일 한국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골이 발굴됨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가 비로소 확인됐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극심했던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전국 곳곳에서 숱한 양민학살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첨예한 남북 대치상황

속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정굴

사건도 그 한 예이다.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 위원장 김양원(43)씨는 "유족들

중에서도 `자칫 또 빨갱이로 몰리는 게 아니냐"며 사건 자체를 공개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유골 발굴은 지난 93년부터 3년여 동안 진실을 밝히려 애쓴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와 유족회의 힘겨운 노력의 결과이다.... 93년

10월 진상규명위는 고양경찰서에 당시 사건에 대한 수사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시작으로 국회 내무위와 청와대 등에 무수히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로부터 돌아오는 회신은 "근거 없음"이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당시 사망자가 1천 여명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우익단체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금정굴에서 1백 여명의 좌익인사들을 처형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15)







5) 제2전선주위의 양민학살 사건





정희상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남북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16)





거창양민학살 사건,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 실태조사특위"

위원장인 최강선의 글, 또 산청·함양 양민 705명에 대한 국군의 학살 보도

등17)을 보면 제2전선주의의 양민학살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2전선의 양민학살은 6.25전쟁 이후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작은전쟁 당시에도 유격전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49년에는 대대적인

유격대 토벌이 남한군에 의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도 청천별력작전

등에 의해 문경, 함평, 영광 등과 같은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형과 사촌동생의 주검 밑에 깔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문경

양민 학살사건" 유족회장 채의진(63)씨는 10월 13일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6.25이전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문경주민들이 학살당했다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6개월쯤 전인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자 43명, 여자 43명 등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어린이와 노인, 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다.(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 비망록).18)







유족회쪽은 “아직도 공비들에 의해 주민들이 숨진 것으로

호적부 등에 기록돼 있을 만큼 진상이 철저히 은폐돼 왔다”며 “미국의 비밀문서가

공개된 이후에도 국방부에서는 자료가 없어 당시 사건을 알 수 없다며 발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시사저널}이 "문경 양민학살 사건 은폐된

진실 밝혀냈다"({시사저널} 1995. 3.23.)의 보도가 있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25이전에도 이승만정부의 양민학살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달부락 주민 124명 가운데

86명이, 그것도 여자 41명, 국민학생 10명, 갓난애기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동네에 인기척이

없으니까 군인들은 화가치민 말투로 "국방군이 와도 환영하지 않는 것을 보니까

빨갱이 마을이다"라고 투덜거리며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이

뛰쳐나오니까 모이라 해놓고 그냥 총을 쏴댔다. 군인 한 명이 "당신뜰도 여기

있으면 죽여버릴 테니까 빨리 돌아가라"고 해서 얼른 돌아왔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이승만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 텖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공비는 애매한 양민을 대낮에

죽이는 일은 없었다. 공비가 죽였다면 약탈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 군인들이 학살했다는 애기는 들었지만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50년 1월 1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현장을 방문해 유족들에 위로 연설까지 했으나

그 이후 이 사건은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되고 당시 문경경찰서장과 지서주임은

"공비 출몰 총살"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한다.





6) 남한전선에서 미군의 양민학살





6.25전쟁 초기 미군의 남한 땅에서 양민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경상남도 진주출신의 어느 ? 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비군 비행기가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지역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에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양민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초기에는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커밍스는 그 당시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좌익이라는 미군의 판단 때문에 이러한 양민학살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전언이므로 추후 확인할 예정임).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남한 정부에

대한 큰사랑 없이 공산당에 대한 혐오와 불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즈}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19)







이러한 미군들의 전쟁 범죄적 파괴와 양민살상은 지방사의

구석구석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한 지방신문은 이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에 도천면 어만리 천변에서는

백주에 피난민 대렬에 피신한 인민군으로 인해 [유엔군]의 기총사격으로 사망한

군민도 적지 않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응어리 진 가슴은 호소할

길 없는 울분으로 메워져 있다."20)







이 번에 세계적인 쟁점으로 된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의 양민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자 정은용씨의 진술은 전쟁중 미군의 남한 내 양민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및 범죄성을 잘 말해 준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 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 나는 "작전"과 "복수"가 함께 이뤄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미군이 대전에서 피난민으로 가장한 인민군 유격대에 크게 당한 직후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21)







이러한 정은용씨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의 보도는 이를 확인하였다.









◇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문):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당시 기관총 사수였던 노먼 팅클러는 “우리는 그들을 전멸시켰다”고

증언했으며, 일부 병사들은 `그냥 피하려했던 민간인"들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중위로 참전했던 로버트 캐롤 예비역 대령도 “상부로부터

민간이나 군인 그 누구도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7연대 소총수들이 인근 진지에서 피난민을 향해 발포했다”고 말했다. 캐롤은

이어 “첫날에는 북한군이 없었으며, 대부분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참전 병사들은 또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으며, 유진 헤슬먼은 “챈들러 대위가 `모두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대령으로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88)는 “총격사건에

관해 알지 못하며 그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고 발뺌했으나, 참전 병사들은

“헤이어 대령이 당시 작전을 하급자에게 위임해 놓았다”는 상반된 증언을

했다. 역시 참전 병사인 텔로 프린트는 “나와 다른 병사들도 미군의 공습을

받게 돼 피난민들과 함께 배수로로 몸을 숨겼다”며 “누군가가, 아마도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미군의 양민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라북도의회"의

99년 10월 20일자 "익산시 폭격 진상규명 대 정부 촉구결의안"이다.









우리 전라북도 내에서도 미군에 의한 익산역(당시

이리역) 전투기폭격과 송학 등 주변일대를 중심으로 무차별하게 기관총을 발사하여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통동런사를 보면

1950년 7월 11일 미군기의 오폭으로 익산역 직원과 승객 등 54명이 현장에서

전원 숨졌고, 300여명의 중경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익산역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를 입증하는 증언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익산 송학동 주변일대를 미군전투기가 30-40분 동안에 걸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발사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그에 다른 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제 여러 곳에서 밝히지 못하여 엉어리져 있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방방곡곡에서 자행된 미군의 학살에 대한 증언이 일부 나오기 시작하였다.22)

경남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과 사천군 곤명면에서도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초막골로 피란갔던 양아무개(79·창녕군 유어면 광산리)씨

등 주민들은 5일 “50년8월 초 새벽 4시께 마을 뒷산 비들재 고개에서 인민군

2명이 따발총을 들고 내려오자 미군이 1시간 여 동안 마을을 향해 총을 쏘아

피난민 100여명이 숨지고 집 40여 채가 불탔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양아무개(42·부산시

서구 대신동)씨도 “지난 82년 작고한 부친에게서 피란 시절 미군에게 무차별

총격을 받아 많은 양민들이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인근 유어면 진창마을

14집의 제삿날이 음력 7월11일로 같은 날인 것으로 미뤄 외지로 나간 유가족들을

합치면 100여명이 주민들이 그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경남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에서도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숨지거나 다쳤다는 주장이 나와 사천시가

진상조사에 나섰다. 주민들은 지난 50년 7월29일 새벽 인민군을 태운 트럭 20여대가

위장하고 있던 서포~단성 국도에서 폭격기 20여대가 폭탄을 떨어뜨려 이마을

주민 54명이 숨지고 47명이 크게 다쳤다고 밝혔다. 이밖에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 황점순(74·여)씨들도 “지난 50년 8월11일

오전부터 주민 100여명이 모여 있던 재실을 향해 미군들이 집중 총격을 가해

83명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인민군이 쳐들어온다"며 경찰과 미군의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어디로 어떻게 피란을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인민군 정찰대로 보이는 2~3명이 재실 옆 대밭에서 미군 진지를 향해 총을 쏴

미군 1~2명이 죽자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해 주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당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최소한 "학살"이 아니었다 하드라도 오인사격이나 보복사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23)







또 충북 영춘 곡계굴에서도 1951년 1월 20일 4백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당시 폭격장면을 직접 목격한 김옥이씨의 증언은

"폭격 있기 하루 전에 피난민들이 굴에서 나오는데 한 3-4백 명은 족히 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다시 모두들 그 굴로

들어갔다. 그러자 말자 미군정찰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가더니 30분쯤 있으니까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해댔다."24) 미군의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도 이러한 만행이 체계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1950년 11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면적인

후퇴를 감행할 때 원자폭탄이 투하된다는 소문을 퍼뜨려 고의적으로 이산가족을

대거 양산하는 등 여러 종류에 걸치고 있다.









지난 14일 거제 제6포로수용소가 있던 용산마을

부근 농지에서 경지정리 작업을 하던 중 큰 병속에 넣어진 채 비옷에 쌓여있는

이들 문서를 발견해 거제군 공보실에 신고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가운데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이라는 제목의 편지는 속옷을 찢어 만든 가로 80cm,

세로 1백20cm크기의 광목에 잉크로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는 등의 내용을 적고 편지 끝

부분에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쓰고

있다. 이와 함께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한겨레신문}, 1992년 12월 19일 15쪽).







또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인 도드가 포로들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포로들이 도드에게 요구한 4개 조항 가운데 제1조항이 "폭행,

모욕, 고문에 의한 심문, 혈서의 강요를 중지하고 위협, 학살 독가스와 세균무기

실험중지, 국제법에 의한 전쟁포로의 인권과 생명의 보장"을 제기하고 있어

미군의 범죄행위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암시한다.25)





5. 북한지역 양민학살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의 양민학살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4-50일 가량 점령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고 둘째 시기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정전협상에 들어간 51년

6월 이후 정전일 마지막까지 자행된 북한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이다.




1) 미군강점기간 북한 내 학살과 만행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를 보면 40여일 강점기간동안 미군의

지휘, 감독과 직접적인 적대행위에 의해서 아래의 표가 보여주듯이 172,000여명의

북한주민이 학살되었다한다. 이 숫자는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





학살방법 또한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이고 있다.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눈알을 빼며 귀와 코를 도려내며 산채로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며 피부를 벗기며 불에 달군 쇠로 지지며 산 사람을 땅크로 깔아

죽이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야수적 학살방법을

꺼리낌없이 감행했다" 고 한다.26) 이 잔인한
미군의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