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9 11:12수정 : 2013.02.09 14:59

 

조각가 니코스 디모풀로스의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의 조각상. 칼라브리타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옛 칼라브리타 초등학교 뜰에 설치돼 있다.

그리스 산간마을에서 제주의 비극을 떠올리다

머릿글-그리스 내전 현장에서 제주 4·3을 보다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신화의 나라’, 파란 지붕에 하얀 벽체의 건물이 아름답게 들어선 산토리니섬, 그리고 지난 1~2년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그리스 경제 위기다. 현재의 그리스는 외신을 타고 나오는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싸움,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항의하는 시위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긴 과거, 내전과 반공극우독재정권으로 점철됐던 비극의 근·현대사, 점령 시기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르고 있다는 경제 위기. 신화 속에 살아 숨쉬는 영광은 짧았고,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20세기 중반 그리스와 한국은 너무나 닮았다. 제국주의 침탈 이후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다. 그리스는 독일의 침탈을, 한국은 일본의 침탈을 경험했으며, 이런 경험은 해방 이후 두 나라에서 정치·사회적 갈등의 심화와 확대를 가져왔다.

1944년 10월 해방을 맞은 그리스와 1945년 8월 해방된 한국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상황’에 노출돼 있었으며, 양국은 외세의 개입에 전면적으로 휘말렸다.

냉전체제 형성기의 그리스와 남한에서는 국가 건설 과정에서 좌·우익 세력이 충돌했고 미국의 적극 개입으로 반공·우익정권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와 남한, 특히 제주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그리스는 1941년 4월 나치 독일에 점령된 뒤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 불가리아 등 3개국의 분할 점령통치에 놓였다. 점령통치는 가혹했고, 이에 맞선 그리스인들의 민족해방투쟁은 치열했다. 점령 시기인 1943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좌·우파 사이의 무력충돌은 내전의 기원이 됐다. 내전은 1946년 3월부터 1949년 10월까지 꼭짓점을 찍었다. 그리스 내전으로 희생된 이는 10만~15만여명으로 추정되고, 강제로 흩어져야 했던 주민은 70만여명에 이른다. 마을 2000여곳이 점령 시기 독일군의 대게릴라전으로 초토화됐다. 1940년대의 그리스는 전쟁과 점령, 내전과 학살로 점철됐다. 재건과 발전은 힘들었고, 심리적 상처는 너무나도 깊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31일 4·3 사건 발생 55년 만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는 자리에서 ‘국제적 냉전’이 몰고 온 사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듯이, 제주 4·3도 냉전체제 형성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스 내전 때는 좌·우파가 치열한 무력투쟁을 전개했다면, 제주에서는 군·경이 일방적으로 벌인 진압전투였다. 미국은 제주 4·3의 발발부터 사실상 끝난 1949년까지 거의 모든 사건의 전개과정을 기록하고 보고했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도 제주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의 관점에서 그리스가 소련의 지중해 진출을 막고 중동으로 가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전략적 요충지였듯이, 1945년 10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제주도에 왔던 미군은 “지도를 대충 보더라도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라고 빗댔다. 그는 “우리가 지금 충분히 강력하면, 우리가 그리스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들(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선다면, 그들은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시기와 거의 비슷한 무렵,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이 뜨거웠던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제주도를 ‘동양의 그리스’로 비유하고 주목했다. 외신도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한 시점의 제주 4·3 사건과 그리스 내전의 전개과정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관심을 표명했다.

제주 4·3을 20년 넘게 취재해온 기자는, 2012년 8월 그리스 내전의 기억을 드러내주는 현장을 밟았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카피언덕에 조성된 추모공원에서 바라본 칼라브리타의 모습이다. 1943년 12월13일 독일군은 그리스 무장저항단체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칼라브리타의 12살 이상인 남성 498명을 카피언덕에서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칼라브리타는 이후 오랫동안 ‘무남촌’이 됐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 산의 나라, 협곡의 길 그리스는 ‘산의 나라’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협곡과 산등성이들. 협곡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난 도로, 나귀와 노새들만이 다녔던 길, 교통수단이 없던 60~70여년 전 그리스의 산간마을들은 소규모 공동체들이었다. 전깃불이 들어오자 입김을 불어 끄려고 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지형적으로 서로의 왕래가 사실상 어려웠던 이런 곳에서 고대 폴리스(도시국가)가 형성된 것은 아닐까.

펠로폰네스의 칼라브리타로 가려고 택시기사 디미트리(61)와 동행했다. 차를 몰던 그가 말을 건다.

“나는 아테네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도 크레타 출신이에요.”

“그래요? 크레타 출신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있죠?”

“아테네의 대통령 베니젤로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있지요. 매우 좋은 섬이에요.”

‘아, 베니젤로스가 크레타 출신이었지!’ 국회의사당 오른쪽에도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아테네의 국제공항 이름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다.

코린트운하를 지나자마자 도로 양쪽에 농업지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상징 올리브나무와 감귤나무(만다린)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받은 감귤류를 외국에 수출한다고 한다. 고속도로 양쪽으로는 협죽도가 꽃을 피우고 멀리 지중해를 오가는 화물선도 눈에 들어왔다.

칼라브리타로 가는 길이 갑자기 좁아졌다. 나무가 우거져 차창을 때리더니 산악지대가 펼쳐지고 조그마한 길들이 선처럼 보인다. 거대하고 웅장한 협곡과 계곡이 나타났다.

칼라브라타로 가는 길목에서 지중해 바다를 배경으로 가로놓인 거친 산악지형을 보면, 왜 게릴라투쟁에 적합한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산간마을들은 또다른 그리스다. 내전 시기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은 산간마을에 ‘자유 그리스’를 구축했다. 일종의 해방구였다. 제주 4·3 때 무장대가 토벌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중산간 깊숙한 곳을 해방구로 삼았듯이, 그리스의 깊숙한 산간마을들은 해방구였다.

그리스 정부군은 해방구로의 진격을 두려워했다. 내전 시기에는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이 그리스 산악지대에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투표가 이뤄졌고, 각종 위원회가 구성됐으며, 인민법정도 운영됐다. 사실상 폴리스, 도시국가였다. 해방 이전 점령 당시 독일군도 해방구에 함부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산간마을로 진입하다 각종 저항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잠시 멈춰 산악지형과 지중해를 바라봤다. 까마득하다. 발밑을 내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계곡이다. 아테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제주 4·3 사건 때 중산간 주민들이 오름에 올라 해안마을을 보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산에 나무가 별로 없다. 소나무나 올리브나무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 숲이 우거지지는 않았다. 디미트리가 몇 년 전 대화재로 나무들이 모두 불에 탔다고 했다. 그리스의 산불은 종종 국내 언론에도 보도된다. 그리스 산이 벌거벗은 이유는 산불 때문이다.

독일군 점령 시기부터 활동한 그리스 무장저항단체인 민족인민해방군 소속 칼라브리타 독립대대원들의 모습이다.

■ 카피언덕으로 가는 길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살 어린 소년은 자기가 가는 길을 알았을까? 가는 길은 황량했다. 이름 모를 풀 사이로 크지 않은 키의 올리브나무들이 듬성듬성 이어졌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칼라브리타의 카피언덕. 발 아래로 그림 같은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얀색 벽과 갈색 지붕의 집들은 사진에서 보던 스위스의 산골마을 모습과 비슷한,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펠로폰네스 남동쪽 아키아지 지방의 산간지대에 있는 칼라브리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최대의 민간인 학살장소 가운데 한 곳이다. 추모기념물이 들어선 곳이 학살현장이다.

4개의 대리석 벽면에 희생자의 나이와 이름, 연혁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12살, 14살 어린 희생자들도 여럿 보인다. 큰 무덤으로 조성된 곳에는 위패봉안소 같은 곳도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 같은 느낌이다. 봉안소 안에는 방문객들이 꽂아놓은 향이 타고 있었다. 향을 꽂고 잠시 추도 목례를 하며 죽어간 이들을 생각했다. 향로에는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봉안소 위로는 무덤이 있고, 하얀색 글씨로 “전쟁은 그만” “평화”라는 글이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안녕을 비는 곳은 그리스정교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리스는 정교회의 나라처럼 마을을 바라보는 추모공원의 정상에는 그리스기와 대형 십자가가 설치돼 있다. 간간이 추모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평화로운 곳이 학살터였나 할 정도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유채꽃이 피어난 제주 북촌리를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 저항과 학살의 땅, 칼라브리타1943년 가을 이후 저항활동이 강화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군은 병사 1명이 죽으면 50~100명의 그리스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독일군은 칼라브리타와 그 주변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저항활동을 저지하고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작전을 전개했다.

1943년 10월16~18일 케르피니전투에서 민족인민해방군 빨치산들은 독일군 병사 83명을 포로로 잡고 부상병 3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독일군 병사들을 칼라브리타로 데려가 초등학교에 구금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독일군과 포로 석방 관련 협상을 여러날 계속했지만, 타협은 이뤄지지 않았다.

검은 뭉게구름이 칼라브리타의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칼라브리타를 잿더미로 만들기로 했다. 11월25일 제117보병사단 사령관 카를 폰 르 수이레(Karl von Le Suire) 소장은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칼라브리타 작전’을 명령하고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작전에 나섰다. 12월7일 저녁, 빨치산들은 독일군 포로 83명을 헬모스산에서 처형했다. 12월 8일, 독일군은 케르피니, 로기, 자흘로루, 수바르도, 브라니 마을과 메가 스필레오 사원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명령했다. 이들은 칼라브리타로 진군하면서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12월13일 월요일 새벽, 독일군이 친 교회의 종소리가 이른 새벽의 침묵을 깨뜨렸다. 주민들은 종소리에 공포를 느꼈다. ‘검은 월요일’의 서리 낀 겨울 새벽, 칼라브리타는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던 주민들의 심정처럼.

독일군은 주민들을 초등학교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12살 이상 남자들은 오른쪽 2개 방으로 들어갔고,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은 왼쪽 2개 방으로 격리됐다. 자신에게 놓인 운명을 감지한 남자들은 부인과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영원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이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독일군은 칼라브리타의 남자들을 카피언덕으로 행진토록 했다. 마을은 약탈되고 파괴됐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녹색 섬광이 하늘을 뒤덮었다. 처형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독일군의 기관총은 불을 뿜었다. 사격이 끝난 시간은 2시34분을 가리켰다. 498명이 학살됐다. 13명만이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카피언덕에 있는 추모공원. 방문객들이 위패봉안소와 비슷한 장소로 들어가고 있다.

■ 기억과 북촌리 대학살1967년 카피언덕에 ‘희생자의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 티시아스’ 기념물이 세워졌다. 위패봉안소에서 그리스정교회 신부와 함께 방문한 그리스인은 “해마다 12월13일 추모식을 거행한다. 생존자와 그 가족들이 이 추모공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12월13일. 그날은 또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 난징대학살 추모식이 열리는 날이다. 어떻게 같은 날 학살이 일어났을까. 그리스와 중국은 같은 날 추모식을 연다. 한 곳에서는 독일군에게, 또다른 곳에선 일본군에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린다.

카피언덕에서 제주 북촌리를 떠올렸다. 1949년 1월 북촌리에서도 주민들을 모두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도록 명령하고 집들을 방화했다. 운동장에서는 학살할 대상자들을 분리해냈고, 인근 밭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추모공원을 나와 기념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칼라브리타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애초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당시 독일군에 의해 여자와 어린이들, 노인들이 갇혔던 학교 건물은 1986년 정부가 사적지로 지정했고 2005년 1월9일 ‘칼라브리타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문을 열어 학살의 역사를 후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기념관 정문은 노천카페, 식당과 연결돼 있다. 점심을 먹는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학교 건물 사진과 독일군의 명령서 등이 전시돼 있다. 학교 앞에서 찍은 학생들의 사진 설명에는 ‘당시 독일군에 학살됐다’고 적혀 있다. 불에 탄 칼라브리타 마을 사진, 독일군 기관총과 철모도 있다. 모니터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계속 흘러나온다. 기념관에는 희생자들의 얼굴 사진이 벽면 가득하게 전시돼 있다. 가만히 서서 그들의 얼굴 사진을 쳐다본다. 해맑게 웃는 얼굴들.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을까. ‘전쟁 반대’, ‘평화’라고 외치고 있을까.

박물관 뜰에 있는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어머니는 죽은 남편을 끌며 울부짖는 모습이다. 마음을 아리게 하는 동상의 모습은 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비탄에 빠진 모습으로 서 있는 동상들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군의 칼라브리타 주민들에 대한 보복학살과 국군의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이 자꾸만 겹쳐진다. 칼라브리타는 독일군에 의해 한꺼번에 마을의 남자들이 집단학살된 ‘무남촌’이다. 마치 제주 4·3 당시 토산리와 북촌리가 ‘무남촌’이 됐듯이. 게릴라들의 활동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칼라브리타의 어린 소년들을 포함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나, 무장대의 습격에 따른 보복으로 국군이 북촌리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나 무엇이 다를까. 6년의 시차만 있을 뿐, 시기와 희생자수도 비슷하다. 갔던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 칼라브리타와 북촌리가 또다시 포개지고 겹쳐졌다. 칼라브리타(그리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