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30 18:50수정 : 2013.10.01 18:30

 
재일 작가 김석범씨는 장편 대하소설 <화산도>로 <마이니치신문>과 <아사히신문>에서 매년 그해 수준 높은 저작에 수여하는 상(마이니치 예술상, 오사라기 지로 상)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일본 문단에서는 1971년 <만덕유령기담>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리는 게 고작일 정도로 문학적 평가에서 인색했다. 김씨는 “일본어문학의 최고봉이 있다면 내가 거기 들어갈 것”이라고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김도형 경제국제 에디터

[한겨레가 만난 사람]
재일 조선인작가 김석범

“희생자를 앞에 두고 유가족 등 사람들이 슬픔을 슬픔이라고 하는 자유, 슬픔에 땅을 치고 통곡하는 자유의 장이고 그것은 또 슬픔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기쁨이었다.”

2008년 4월3일 제주도 평화공원에서 열린 4·3사건 60주년 위령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재일 작가 김석범(88)씨는 2주 뒤 <아사히신문> ‘제주도 4·3사건 슬픔을 나타낼 자유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감상문을 기고했다. 4·3사건의 참상을 다룬 대하소설 <화산도>(전7권·1997년 문예춘추사 완간)를 통해 당시 ‘갇힌 섬’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세상에 처음 널리 알린 팔순의 노작가가 4·3사건 60돌을 맞는 감회는 그만큼 각별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권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주)도민 자신에 의한 기억의 자살” 때문에 반세기 넘게 지하에 묻혀 있던 4·3사건이 지상으로 부활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보수파 일각에서는 4·3사건 평가를 역주행시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4·3사건에 대해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기관을 습격했다. 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했다. 수습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됐다”며 민간인 학살은 진압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이고 부차적인 문제인 듯 서술했다. 그러나 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1월 제정된 4·3특별법에 따른 진상조사기획단의 3년간의 진상조사 결과 희생자(잠정수치) 2만~3만명 중 토벌대의 민간인 희생자가 86.1%에 달했다는 사실과도 배치된다.

인터뷰/김도형 경제국제 에디터 aip209@hani.co.kr

1976년 소설 <화산도> 집필 착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만2000장(200자 일본어 원고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4·3사건 소설을 쓴 노작가가 오늘의 한국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그는 1957년 처녀작 <까마귀의 죽음> 이후 반세기 넘게 4·3사건과 분단문제, 정치와 인간의 관계에 천착하며 작품활동에 매진해왔다.

그는 남도 북도 국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국적인 ‘조선적’을 택해 양쪽에서 ‘불편한 인물’로 낙인찍히면서도 통일조국의 국적 회복을 버리지 않고 있다.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져 냉전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 재일동포 사회에서 분단의 모순을 재일조선인 작가 누구보다 온몸으로 체현하고 그것을 옛 식민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이중의 모순적 삶을 살아온 작가는 2일 미수(88살)를 맞이한다. 지난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을 다룬 <과거로부터의 행진>을 출간하는 등 여전히 활발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작가를 도쿄도 외곽 고다이라시의 동포 음식점에서 지난달 14일 저녁 만났다. 북한 억양이 섞인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 김씨와의 4시간에 걸친 인터뷰 시간은 구순을 바라보는 노작가의 문학세계와 파란 많은 인생을 듣고 묻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추가로 질문지를 보내 내용을 보충했다.

-건강은 어떠세요?

“제가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지만 요즘 술을 잘 안 먹습니다. 이상한 병에 걸려 3월부터 8월까지 술을 안 마셨어요. 의사가 9월부터 술 먹어도 괜찮다고 해서 밤에 밥 먹으면서 조금 마셔요. 예전에는 밖에서 2~3차 하더라도 집에 들어가서 혼자서 한잔 마셔요. 반년 동안 술 안 마시는 것은 40~50년 만이에요. 40대 때 위암 판정 받고 수술받아 1년간 술을 끊었지만…. 70대 때 술 마시고 역에서 계단에 떨어져 구급차로 실려간 적도 있어요. 난 한이 많은 사람이야. 글로 풀지 못한 것은 술로 풀었는데 이제 조금씩 먹어야지. 하하.”

-최근 교학사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 4·3사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술이 역주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적어도 4·3 진상규명 작업이 실현된 마당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역사의 역주행이라고 봅니다. 그래서야 정의가 아닌 불의의 사상으로 후대들에게 역사교육을 바로 시킬 수 있겠어요? 해방 직후의 역사를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역사를 미청산한 것이 이런 역행을 초래했습니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법을 파기해 이매망량(온갖 도깨비나 귀신)이 대낮에 활보하게 만든 이승만을 국부로 모셔서 건국의 아버지로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3월 이후 한반도는 한때 전쟁위기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개성공단도 폐쇄된 뒤 우여곡절 끝에 지난 16일 재개됐고요. 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남달랐을 텐데요.

“(한참 말이 없다가) 내가 보기엔 북이 딱해요. 우리가 바라는 나라는 그런 북이 아니었어요. 우리 조국이. 남도 이제 민주화되어서 달라졌지만 광주학살사건을 일으킨 권력자가 인간이에요? 내가 만으로 19살 때 해방을 맞이했는데 차마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해방 전부터 반일 사상이 강했던 그는 해방 이후 교토대학 미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공산당과 북한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다 1955년 출범한 북한 계열인 재일조선인총연맹(총련)에서 <조선신보>, 조선문화예술가동맹 등 총련조직 일꾼으로 일했다.

-총련 활동 하다가 1968년 조직에서 벗어났는데요.

“뜻이 안 맞았으니까 그랬죠. 그때 처녀작 <까마귀의 죽음>을 단행본 책으로 낼 때인데 총련의 비준이 필요했어요. 비준이 안 나왔어요. 사상이 좋지 못하다고. <조선신보>에 있을 때도 그랬는데 나는 말을 안 들어요. 또 그때 일본인 처를 가진 조직원을 이혼시키라는 방침이 나왔어요. 새장가 든다고 좋다는 친구도 있었는데 나한테는 절대 그런 말을 안 해요. 말해봤자 안 통하니까 그런 말 안 하는 거죠.”

재일조선인 문학가 누구보다 정치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소설에 담아온 김씨는 그러나 정치의 소설 개입에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반골 체질이다.

“옛 식민지배자의 언어로
분단·조국의 아픔을 쓰는 괴로움
사소설이 강한 일본 문단도
내 작품세계와는 맞지 않았다

20년 걸려 쓴 장편 ‘화산도’로
제주 4·3사건의 참상 널리 알려
최근 교학사 교과서 역주행은
해방 이후 역사를 청산 못한 탓”

“공화국은 비평의 선도성이라고 해서 정치의 우위성을 내세우는데 난 철을 녹이는 불가사리처럼 정치를 녹여먹는 문학자입니다. 정치를 자기 것으로 삼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이 있으니까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난 문학작품을 통해서 정치를 말합니다.”

그는 표면적으론 총련으로부터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혔지만 내부적으로 친지나 지인을 통해 다시 들어오라는 회유를 여러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에 갔다 오면 기행문을 써야 하는데 ‘있는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직의 논리를 무작정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사상에 투철한 삶과 문학인생을 보낸 그는 그 때문에 힘들거나 외롭지 않았냐고 묻자 “난 원래 외로운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회고했다.

한때 수십만명의 동포가 가입했던 총련이 현재 수만명 수준으로 위축된 까닭에 대해서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구체화와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공화국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총련 일꾼들도 관료주의적으로 동포들을 대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총련을 탈퇴했으나 한국적은 가지지 않은 채 무국적인 조선적을 유지한 이유가 있나요?

“일본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공화국 사람도 아니면서 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느냐고. 그럼 내가 그래요. 왜 바꾸냐고. 빌어먹을 세상이지…. 나는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 라고 그랬어요.”

-한국에서는 무국적이라면 북한 국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인데….

“공화국을 지지해서 조선적을 유지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속에 자기 조국이 있죠. 말하자면 저는 디아스포라죠. 내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니라 통일조국입니다. 일본은 그냥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무국적자 소수파들이 통일조국을 위해 필요합니다. 통일조국을 준비하기 위한 제2국적, 즉 2차 국적을 허용해서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자고 몇년 전부터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세기 넘는 작가생활 동안 4·3 문제를 주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요.

“우선 제 고향이 제주도라는 점이 큽니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맹점인 동시에 그 맹점 자체가 바로 현대사의 핵심적 부분이며, 분단조국의 집중적 모순의 표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4·3 문제는 저의 평생 작업이 되었습니다.”

4·3사건을 처음으로 소재로 삼은 <까마귀의 죽음>을 두고 “이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니힐리스트(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는 이)인 나는 자살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자신의 문학세계를 일러 일본문학이 아니라 일본어문학이라고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학이 아니고, 일본어문학이라고 독자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게 1970년대 초부터입니다. 재일조선인 작가들도 일본문학의 일부분으로 생각했고, 일본 문단도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학의 하위 문학, 즉 부속물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죠. 사소설 전통이 강한 일본 문단과 맞지 않았던 것이죠. 개인적으로도 일본어로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조선문제를 일본어로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과 옛 식민지배자의 언어로 소설을 쓴다는 윤리적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언어론에 관한 책을 쓴 것도 그런 결과입니다.”

일본문학 사상 최대 장편에 속하는 그의 소설이 완간된 이후 이단시했던 일본 문단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사카 등지에서 학생들과 문단을 중심으로 ‘화산도를 읽는 모임’이 오랫동안 지속됐고, 지금은 ‘김석범 작품을 읽는 모임’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다카자와 슈지는 문예춘추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문학지 <문학계>에 ‘김석범론-‘재일’ 디아스포라의 일본어문학론’이란 제목으로 51쪽짜리 본격적인 논문을 게재해서 그의 문학세계를 평가했다.

“비사소설 계열의 작품세계가 재일 일본어작가 김석범이 개척한 신지평이라고 해도 좋다. (…) 스스로 ‘체험’하지 않은 1948년의 제주도 4·3봉기 사건을, 더구나 체험자가 전후 오랫동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무장봉기 뒤 반공정책에 의한 무차별 도민학살을 그는 비순문학, 비사소설적인 픽션으로써 처음으로 역사화한 작가였다.”

<화산도>는 한국에서 1988년 4권까지만 번역돼 있으나 동국대 김환기 교수(일어일문학)를 중심으로 2015년 완역 출간을 목표로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