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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2015-08-27 18:30수정 :2015-08-28 15:11
영화 ‘베테랑’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베테랑’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베테랑>은 ‘거의 다큐(멘터리)’였다. 절대다수의 한국인 관객들은 영화 속 재벌 3세의 악행에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을 게다. ‘다큐’가 아니라 ‘거의 다큐’인 이유는 영화의 결말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재벌이 일선 형사에게 통쾌하게 단죄되는 그런 결말, 현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다.


영화의 흥행에 마음이 영 편치 않은 분도 보인다. 이를테면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주간. 그는 칼럼을 통해 “영화 속에서 신진그룹과 조태오는 정말 영화적 상상력으로나 가능한 괴물”이라며 영화와 현실이 다름을 살뜰히 못박아둔다. 핵심은 다음이다. “규제 완화와 노동개혁 등 한국 경제를 위한 과제가 많지만 반재벌 정서가 걸림돌이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상위 10%의 고임금에 60세 정년까지 보장받는 민노총의 철밥통 기득권이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온상이다. 영화적 재미에 빠져들어 <베테랑>의 단순 논리에 설득당하면 600만 비정규직의 눈물과 취업절벽을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놓치기 쉽다.”


종합일간지 논설주간답게 참으로 중요한 대목을 짚어주셨다. 보라, 영화 한 편을 봐도 그저 영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규제완화” “노동개혁” “비정규직” 등 지금 벌어지는 사회문제로 논의를 확장해가고 있지 않는가. 그의 주옥같은 문장을 하나 더 옮겨둔다. “재벌을 악으로, 민노총을 선으로 단순화하는 공식으론 복잡한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영화 <베테랑>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짚어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심전심인 듯싶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우리 대중은 결코, ‘재벌은 악이요 민노총은 선’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믿지 않는다. 재벌을 ‘악’으로 생각하고 민노총도 ‘악’이라 생각한다. 당장 네이버의 민주노총, 한국노총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시라. “철밥통 노동귀족”에 대한 성토가 하늘을 찌른다. 대중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모두가 각자의 밥그릇을 위해 타인을 무참히 짓밟는 복마전이다.


황 주간은 “상위 10%의 고임금에 60세 정년까지 보장받는 민노총의 철밥통 기득권이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온상”이라 주장한다. 이는 박근혜 정권, 새누리당, 친재벌 경제단체가 공유하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 명제가 참이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민주노총은 기업 인사권을 독점하는 시장 초월적 헤드헌터다.’ 둘째, ‘민주노총은 각종 노동 법안을 직접 입안·공포할 뿐 아니라 기존 법안을 무효화할 수 있는 초헌법적 입법기관이다.’


황 주간의 생각과 달리, 한국 경제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규제완화나 노동개혁이 아니다. 재벌개혁이다. 이미 재벌을 위한 규제완화는 할 만큼 했고, 46.1%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에서 보듯 노동유연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0만개가 넘는 전체 일자리 중 500인 이상 대기업, 금융기관, 공공기관 일자리는 130만개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대다수 일자리는 중소기업이 만들어내는데 그 중소기업을 말려 죽이거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둔 채 착취하는 주체가 재벌이다. 그렇게 재벌은 중소기업의 밥줄을 끊어가며 돈을 죄다 빨아들인 다음, 투자는 하지 않고 현금을 잔뜩 쌓아두고 있다. 질문 나간다. “600만 비정규직의 눈물과 취업절벽을 만드는 진정한 원인”은 뭘까?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재벌 3세 조태오의 망나니짓은 개인의 일탈로 환원될 수 없다. “3세”라는 말부터가 이미 세습경영이라는 체제의 썩은 환부를 표상한다. 이는 곧,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통제받지 않을 경우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지를 가리키는 바로미터다. <베테랑>은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재벌개혁의 필요를 보여준 셈이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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