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 2016.03.07 09:52:55


                     

서어리 기자           
 
· 해체 앞둔 진실화해위…"산적한 과거사 문제는 어쩌고"                            
 

"사랑니까지 다 나면 몇 살이죠?"
"아마 스물네 살 정도?"
"젊은 양반이셨네. 아이고"

흙을 털어내니 흰색 빼곡한 치아가 드러난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른 뼈들은 산산이 조각나고 부스러졌지만, 치아만은 아직 성하다.

누구의 치아일까. 젊은 나이에 눈 감은 이름 모를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잠시 눈을 감는다.

▲충남 홍성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 현장. ⓒ프레시안(서어리)


이것은 '학살'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 이곳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뼈들이 묻혀 있다. 65년 전, 뼈와 함께 진실도 땅속 깊이 묻혔다. 이 뼈들의 주인은 각각 누구인지, 왜 이 차디찬 땅속에 휴짓조각처럼 버려졌는지, 그리고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뒤엉키듯 한데 묻힌 뼈들은 제 주인의 죽음이 명백한 '학살'임을 증명하고 있다. 

1950년 이 땅 위에 일어난 전쟁은 비극이었다.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서 정신이 멀쩡한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이성은 마비되고 광기는 독처럼 퍼져 살의를 자극했다. 빨갱이라는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비참하게 죽어 나갔다. 그렇게 학살이 자행됐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대표적이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한다는 취지에서 보도연맹을 조직했다. 가입하면 취업 혜택 등을 준다는 얘기에 좌익 활동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너도나도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이들을 처단했다. 지장을 찍은 이라면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총질을 해댔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 수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은 20만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유족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등은 지난 2014년 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을 조직했다. 지금까지 방치되어 온 유해를 직접 발굴하고, 원혼을 기리기 위함이다. 조사단은 출범 첫해 진주 지역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대전 형무소 사건의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을 마쳤다. 두 차례 작업으로 진주에서 39구, 대전에서 20구 총 60여 구의 유해를 찾았다. 

조사단이 세 번째로 지목한 곳은 충남 홍성이었다. 홍성 또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충청남도 홍성에서는 정부 지시를 받은 군인과 경찰이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보도연맹 가입과 부역 혐의를 이유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고, 희생자는 최소 63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단은 지난달 25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유해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25일 오후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야산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에서 공동조사단 관계자와 유족들이 제례를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뒤엉킨 유해들…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모종삽으로 흙을 파내자 유골들이 튀어나온다. 그 부근을 좀 더 살살 긁어내자 굵직한 척추뼈가 여럿 나온다. 

"다른 데서 죽이고 한꺼번에 시신을 데려와서 매장한 것 같아요.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 흙을 덮으면 보통 일렬로 누워있거든. 근데 여기 뼈들은 뒤섞여 있잖아. 머리뼈가 아래 있고, 허리도 꺾여 있는 걸 보면 시신을 한꺼번에 위에서 아래로 던진 거지."

수십 년째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발굴해온 발굴단장인 박선주 충북대학교 교수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박 교수가 뼛조각을 건네면 발굴단원은 그것을 받아 부드러운 붓을 이용해 표면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붓질이 끝나면, 확실한 이물질 제거를 위해 아세톤에 넣고 세척한다.


▲충남 홍성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해 발굴 현장. ⓒ프레시안(서어리)


"아이고. 여긴 세 분이 포개져 계셨네. 세 사람 머리가 나란히 있어."
"5번, 6번 두 분 섞이지 않게 잘 해주세요. 나중에 합장하면 '너랑 나랑 왜 바뀌었니?' 이럴 거 아녜요." 

흙투성이가 된 뼈들은 언뜻 보면 돌 같다. 흩어진 뼈들을 모아 사람 체형으로 배치하지 않는 이상은 이것이 사람의 것이라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바스러진 뼛조각 하나에도 '이분', '저분'이라 말하며 예를 갖춘다. 

흙을 걷어내는 손길에 또다시 유골이 쏟아져 나온다. 

"이 좁은 데서 또 나와? 얼마나 답답했을꼬. 하긴 2제곱미터 사이에도 열대여섯 명이 눌려있기도 했으니." 

박 교수 말에 눈에 띄게 착잡한 표정을 짓는 이가 있다. 최홍이(74) 씨다. 최 씨의 아버지는 1950년 '충남지역 부역 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이곳에 묻혀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은 건 최근 일이다. 아버지의 누이이기도 한 고모가 60년 넘도록 입을 다문 탓이다.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다 아니까 지금까지 숨겨왔던 걸 이해를 하면서도 어찌나 야속하던지…. 평생토록 아버지 영전을 뵐 낯이 없었단 말입니다."

최 씨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뼛조각 하나라도 찾을까 싶어 하루도 쉬지 않고 현장을 지켰다. 


▲'5번' 희생자의 유골. ⓒ프레시안(서어리)

 
 

"억울하게 죽였으면, 유골이라도 찾아주는 게 예의 아닌가"

발굴 작업 나흘째인 28일, 오전 내 공기에 물기가 가득하더니, 점심이 지나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유해가 모여 있는 폐금광 입구 위에 쳐 놓은 천막이 무거운 눈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자, 최 씨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몇 구 안 나왔는데 혹시라도 작업이 눈 때문에 중단돼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자원봉사 온 대학생들이 수시로 긴 장대를 가져와 천막 위를 툭툭 쳐 눈을 떨어뜨렸다. 깊게 땅굴을 파 놓은 탓에 오르내리는 길이 위험했지만, 작업을 멈출 순 없었다. 발굴 작업에 시간은 금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은 지난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 활동 당시 시작됐다. 3년간의 대대적인 작업을 통해 1617구의 유해와 5600여 점의 유품이 발견되는 등 큰 성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 지원이 뚝 끊겼다. 위원회는 진상규명 과제의 10%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 했고, 유해 발굴 사업 또한 멈춰 섰다. 

지금은 상당 부분이 민간 후원과 자원봉사에 의해 작업이 이뤄지는 만큼, 하루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최 씨는 정부에 분통을 터뜨렸다. 

"국가가 억울하게 사람을 죽였으면, 적어도 유골이라도 찾아주는 게 망자와 유족에 대한 예의 아닙니까. 대통령이 유족들한테 일일이 찾아와서 직접 유감을 표명해도 모자랄 판에 발굴 사업을 못 하게 막고 있으니 원통할 노릇이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