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ressEngine ver.2

글 수 1,139
  등록 :2015-12-24 18:43
놀라운 판결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한갓 나약한 개인으로 쪼그라뜨렸으니 말이다.

<산케이신문>가토 기자와 박성수씨 재판에 공통으로 던져진 질문은 ‘대통령을 허위사실이나 저속한 표현으로 비난하면 명예훼손이 성립되느냐’였다(다른 쟁점은 제쳐두자). 가장 명쾌한 답은 ‘공적인 사안과 관련됐다면 거의 100%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사법부의 확고한 견해다. 민주사회에서는 공직자를 향해 “격렬하고 신랄하고 때론 불쾌할 정도로 날 선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혹 허위사실이 포함됐다고 해서 처벌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위축돼 숨구멍조차 막히게 된다.” 또 ‘저속한 표현’이 처벌의 기준이 된다면 “판단자의 취향에 따라” 처벌이 좌우된다. 그건 법치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공직자는 “불굴의 용기와 인내를 가진 강인한 사람”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만큼 그에 따른 비판과 감시를 감내해야 한다. 그런 근기가 없다면 애초 공직을 맡을 깜냥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다른 견해를 취했다. 공직자는 공적인 존재(공인)인 동시에 사적인 존재(사인)다. 공인으로서는 비방을 감내해야 하지만, 사인으로서는 명예를 보호받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 제기가 ‘대통령 박근혜’의 명예는 훼손하지 않았지만 ‘사인 박근혜’의 명예는 훼손했다.

언뜻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결론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정반대다. 대통령이란 존재가 ‘명예를 초탈하는 강인한 공직자’에서 ‘명예라는 보호막으로 숨어드는 나약한 개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판결문에 표상된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근거 없는 공격에 눈 하나 깜짝 않고 국정에 매진할 뿐인 철의 여인’이 아니라 ‘허위 소문에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소심한 여성’이다. 이야말로 대통령 비하다.

그나마 가토 기자를 재판한 서울중앙지법은 박 대통령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줬다. ‘개인 박근혜’가 명예훼손을 당했을지라도 가토 기자가 애초 겨냥한 것은 ‘대통령 박근혜’였으므로 ‘개인 박근혜’를 비방할 의도는 없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대목에서 박 대통령은 공적인 존재로 돌아와 위엄을 되찾는다. 하지만 박성수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대구지법은 끝까지 박 대통령을 ‘개인 박근혜’로 취급했다.

결국 한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을 뿐인 박성수씨는, 그 개인이 고소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집요한 수사와 구속과 구속 연장과 추가 구속까지 당하며 8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토 기자에 대한 검찰의 항소 포기에 힌트가 있다. 검찰은 “박 대통령(개인 박근혜)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함이 명백히 규명되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혔다. 사실 규명이 됐다고 처벌을 포기한다? 이는 ‘개인 박근혜’를 위해 국가의 형벌권을 동원했다는 놀라운 고백이나 다름없다. 수사기관은 심부름센터처럼 개인을 위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수사와 기소는 공익을 위해 처벌이 꼭 필요할 때만 최후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공권력이다. 굳이 처벌할 일도 아닌데 수사와 재판을 벌인다면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의 인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박용현 논설위원
박용현 논설위원

두 사건 수사와 재판으로 표현의 자유와 함께 대통령의 위신도 큰 상처를 받았다. 국가적 퇴행이다. 과거 한나라당 의원들이 연극을 핑계로 대통령에게 온갖 쌍욕을 퍼부은 적이 있다. 당 대표 박근혜는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아무도 처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이게 민주공화국의 풍경이다. 그때는 명예를 초탈하는 강인한 존재인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던 시대였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번호
제목
글쓴이
1059 ‘하야 눈’이 내린 날, 160만 촛불이 켜졌다
[관리자]
10370   2016-11-26
등록 :2016-11-26 19:17수정 :2016-11-26 20:33 궂은 날씨에도 서울 130만명 등 운집...지난주 인원 넘어 시민들, 청와대 200m 앞까지 ‘인간띠 잇기’ 대규모 행진 “박 대통령 물러날 때까지 계속 나올 것” 첫 눈도, 추위도...  
1058 래퍼 산이, 현 시국 풍자한 신곡 ‘나쁜 년(Bad Year)’ 화제
[관리자]
11069   2016-11-24
등록 :2016-11-24 09:35수정 :2016-11-24 10:08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71748.html?_fr=mt3#csidx27b06c90f1b11249927b0d6ef276ed4 24일 자정 기해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 배포 래퍼 산이 래퍼 산이가 현 ...  
1057 진격의 트랙터 “지금 박근혜 퍼내러 간다”
[관리자]
11148   2016-11-24
등록 :2016-11-24 19:03수정 :2016-11-24 20:47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71875.html?_fr=mt2#csidxc966ef5b5fde658b8fb898aca59e10d 전농 중심 ‘전봉준 투쟁단’ 15일부터 해남·진주서 서울 향해 트랙터 질주...  
1056 박대통령 지지율 4% ‘최저’ 경신…대구·경북 3%
[관리자]
10520   2016-11-25
등록 :2016-11-25 10:15수정 :2016-11-25 11:58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71934.html?_fr=mt1#csidx2640ceebf90cba9b66448e93668451a 3주연속 5%서 또 추락…부정평가 3%p 올라 93% TK, 의사표시...  
1055 #1111 세월호 추모문자를 아시나요
[관리자]
11130   2016-11-23
등록 :2016-11-22 15:05수정 :2016-11-22 15:21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1434.html?_fr=mt3#csidx7fcb42e8ddf0600b87725d574121d4c 지난 2014년 5월 경기 안산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찾은 추모객...  
1054 [단독] ‘한-일 군사협정’ 맺으려 독도방어훈련 미뤘다
[관리자]
10709   2016-11-23
등록 :2016-11-22 16:40수정 :2016-11-22 20:53 30년간 매년 두차례 해군·해병대·해경 참여 정부관계자 “상부 지시로 지난주 갑자기 미뤄” “대일 저자세 굴욕협정” 그러나 2013년 10월25일 실시한 독도방어훈련에서 해군 특전...  
1053 정부, 국무회의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의결
[관리자]
10834   2016-11-22
등록 :2016-11-22 09:08 정부는 22일 유일호 경제부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의결했다.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일본과 GSOMIA에 서명할 계획이다. 서명은23일 국방부에서 ...  
1052 [단독] 외교장관 “추가협상” 묵살…박대통령 ‘위안부 합의’ 강행
[관리자]
10399   2016-11-22
등록 :2016-11-22 05:01수정 :2016-11-22 08:42 정부 핵심 관계자 증언 나와 주무장관 판단 찍어누르는 ‘보이지 않는 손’ 작동 의혹 외교부 당국자 “금시초문” 부인 지난해 12월28일 발표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  
1051 노무현과 박근혜의 탄핵은 다르다. 박근혜는 사상 최초로 쫓겨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리자]
10786   2016-11-21
허핑턴포스트코리아 | 작성자 김수빈 게시됨: 2016년 11월 21일 12시 20분 KST 업데이트됨: 1시간 전 People chant slogans during a protest calling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to step down...  
1050 [새책]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전면 개정 완역판과 옮긴이의 해설서 『전쟁론 강의』 출간되었습니다!
도서출판 갈무리
16497   2016-11-09
▶ 『전쟁론』, 『전쟁론 강의』 서평 한눈에 보기 연합뉴스 난해하기로 유명한 고전 '전쟁론'을 읽고 싶다면 / 구정모 기자 (2016.10.18)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0/18/0200000000AKR20161018164300005.HTML 경향...  
1049 안희정 "민간인 희생 사건, 지도자가 나서 풀어야"
[관리자]
10115   2016-09-17
16.09.03 20:22l최종 업데이트 16.09.04 08:32l 글: 심규상(djsim) 3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추모제 열려... 김지철 충남도교육감도 참석 ▲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3일 오후 2시 충남도청 문예회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  
1048 김제동 "사드보다 더 나은 북핵 대책 달란 국민들이 경솔한 건가요?"
[관리자]
10052   2016-08-28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23시간 전 © 제공: CBSi Co., Ltd. 북한이 24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를 벌인 것을 두고, 방송인 김제동이 불완전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강행에만 매달리는 정부...  
1047 [편집국에서] 우병우, 전두환을 닮았다 / 김의겸
[관리자]
5851   2016-08-26
등록 :2016-08-24 17:44수정 :2016-08-25 17:39 김의겸 선임기자 우병우 민정수석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는 모양이다. 그걸 보여주는 일화 하나. 서울대 법대 4학년 때다. 자신처럼 사법시험에 일찌감치 합격한 동기생들을 불...  
1046 “민중을 위해 쓴다” 네루다의 라틴아메리카 서사시
[관리자]
5673   2016-08-26
등록 :2016-08-25 19:24수정 :2016-08-25 23:26 ‘모두의 노래’ 국내 첫 완역 출간 중남미 자연과 역사, 투쟁 그려 유럽풍 예술지상주의 비판도 파블로 네루다. 모두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문학과지성사·2...  
1045 원로 애국지사, 박 대통령 앞에서 “건국절 안돼” 직격탄
[관리자]
5394   2016-08-13
등록 :2016-08-12 18:47수정 :2016-08-12 20:48 독립유공자 오찬서 “건국절은 헌법 위반이자 역사 왜곡” 건국절 힘 실었던 박 대통령, 별도 답변 없이 사드 공세 광복군 출신 원로 독립유공자인 김영관(92) 애국지사가 박근혜 ...  
1044 성주 주민의 마음을 울린 표창원의 연설
[관리자]
5631   2016-08-05
등록 :2016-08-04 13:19수정 :2016-08-04 19:35 3일 더민주 의원들과 함께 촛불집회 참석해 ‘프랜시스 스테이트호 좌초 사건’사드 배치와 비유해 이야기 페이스북에 성주 군민 응원글도 남겨…주민들 “가슴뭉클하다” 표창원 더...  
1043 [새책] 『가상과 사건 ―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정유경 옮김) 출간되었습니다!
도서출판 갈무리
9808   2016-08-01
▶ 갈무리 도서를 구입하시려면? 인터넷 서점> 알라딘 교보 YES24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인터넷영풍문고 전국대형 서점>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북스리브로 서울지역 서점> 고려대구내서점 그날이오면 풀무질 더북소사이...  
1042 하루 속히 특별법 제정을........
노치수
5811   2016-07-12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창원유족회 합동추모제 행사에 참석해 주신 유족은 물론 특별히 함께 동참해 주신 내빈 여러분!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참석해 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  
1041 학살의 역사와 분단의 능선을 비장하게 넘다-『거대한 트리』 임백령 시인 첫 시집 file
은천
5624   2016-07-09
학살의 역사와 분단의 능선을 비장하게 넘다 -『거대한 트리』 임백령 시인 첫 시집 임백령(본명 임영섭) 시인이 시집 『거대한 트리』(전북대학교출판문화원, 건지시인선02)를 출간했다. 남원에서 태어나 현재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1040 10/7 개강! 노자 철학,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강좌가 곧 개강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18524   2016-10-04
[철학] 노자, 사랑과 무위의 철학자 강사 이임찬 개강 2016년 10월 11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8강, 140,000원) 강좌취지 노자(老子)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떠받치는 세 개의 큰 기둥[儒彿道] 중 하나인 도가 철학의 기...  

자유게시판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