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1 19:10 수정 : 2013.07.01 19:10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971년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직속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비밀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간첩 잡는 안보기관의 수장이 직접 ‘적의 수괴’와 만났다. 미국 정보국장이 소련의 스탈린과 만난 셈이다. 당시 그는 북한과의 밀약하에 남북대화에 비판적인 남한 극우세력을 제거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은 곧바로 남북대화를 중단하고 유신을 선포하였다. 박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간첩 대신 국내의 비판세력을 잡아서 고문한 다음 ‘인혁당’이라는 조직을 조작하였고, 관련자들을 곧바로 처형하였다. 드러난 활동으로만 보면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의 ‘적’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야당, 재야, 학생운동이었다.

 

검찰 조사에 의하면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은 댓글 부대를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21세기 새로운 유형의 관권선거요, 박근혜 대통령의 정당성을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자기 조직이 위기에 빠지자 엉뚱하게도 국가의 기밀인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대화 기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도대체 죽은 대통령의 6년 전 엔엘엘(NLL) 관련 남북대화 기록과 현재의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자료를 공개했다고 밝혔다. 그들의 주장 어느 한구석에도 ‘국가 안보’는 없었다. 과거나 현재나 국정원의 적은 바로 야당과 비판세력이고, 그 조직의 존재 이유는 집권세력의 권력 유지와 조직의 이익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국정원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등 자신을 공격하는 개인에게 고소·고발장을 날려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정보기관이 불법 사찰이나 감청을 통해 국민의 일상을 통제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선진국의 정보기관이 한국의 국정원처럼 선거에 개입하여 국민주권의 원리를 비웃고, 전후좌우를 고려하지 않고서 국가기밀을 공개하고, 비판적인 국민에게 고소를 남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김영삼 정부는 물론이고 김대중 정부하에서도 국정원의 불법 사찰이나 감청은 계속되었다. 두 민주정부하에서 국정원의 인적 청산이나 제도적 청산도 지지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군사정권과 같은 불법 정치개입의 시도는 없었고, 요원들의 기관·단체 출입도 제한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약간의 진전은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가 위의 국가로서 국정원의 과거와 오늘은 대한민국의 맨얼굴이다. 국가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은 ‘대공’ 업무의 명분하에 불법·패륜·거짓말을 수없이 저질러온 부끄러운 이력이 있고, 고문·협박·조작을 통해 무고한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짓밟았다. 나는 국정원이 ‘적’의 기밀을 제대로 탐지하고, 귀중한 국외정보를 수집해서 안보를 지키고 국민에게 이익을 안겨준 일이 얼마나 있었는지 정말 알고 싶다. ‘적’이 없다면 ‘적’을 만들어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려 한 것이 그들의 생리가 아닐까? 짓밟힌 것은 국정원의 명예가 아니라 국민주권이다.

 

이런 국정원이 존재하는 마당에 과연 민주주의, 삼권분립, 책임정치, 국민주권, 시민의 자유 등 헌법의 원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언컨대 이번 국정원의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정당·선거·언론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국가기관이 국가기밀을 마구 공개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며, 대통령 자신이 임명한 직속 부하가 이런 일을 혼자 저질렀다면 이 정부는 정말 정부라고 할 수도 없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