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학살, 유족들 힘이 약해 정부가 무관심"

[인터뷰] 정재원 산청·함양사건 유족회장 "명예회복 특별법, 조속한 국회 통과를..."

12.11.03 14:28l최종 업데이트 12.11.03 14:58                                       장영철(hawkin)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의 1·4 후퇴가 시작된 즈음인 2월 7일, 지리산 자락 두메산골 경남 산청군 금서면 가현·방곡·점촌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서주마을 등 네 마을에서 양민 705명이 국군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방곡리에서 태어난 당시 7살의 정재원(68)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 회장은 그때 총탄 3발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는 89년 유족들과 함께 '(사)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특별법 제정에 노력하는 등 본격적인 명예회복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배상관련 법 제정은 지지부진해 최근에야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하는 성과를 거두는 데 그치고 있다.

배상법 제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는 ▲국회가 통과한 특별법을 정부가 거부하고, ▲이 때문에 특별 법안을 발의했으나 이 안에는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되지 않아 보류됐으며 ▲이 특별법안의 수정안이 발의되고 ▲또 다시 정부가 거부한 특별 법안을 전부 개정하는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는 등 법안만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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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동위령제 3일 열린 산청함양사건 합동위령제.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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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학살의 현장인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제61주년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제25회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을 앞두고 정재원 회장을 만나 61년 전 양민학살과 국회 관련 법안 처리 등 미완의 과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산청·함양 학살 부대, 뒤이어 거창서 학살극

- 산청·함양사건의 개요를 설명하신다면.
"이 사건은 설날 다음날인 7일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제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보병11사단 작전명령5호'란 명령아래 일으킨 학살사건이다. 아침부터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 등 네 개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이후 이 부대는 9일부터 11일 사이 거창군 신원면에서 양민 719명을 또 학살했다."

- 가족들의 피해는.
"그때 할머니와 어머니, 남동생과 여동생을 잃었다. 아버지는 육군 소위로 참전해 전사하셨고 졸지에 고아가 됐다."

-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53년부터 방곡마을 유족 몇몇이 '동심계'를 결성해 곡우 때 숨어 제사를 지내오다 4·19 뒤 잠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있었지만 5·16으로 사그라졌다. 89년 유족회가 결성되고 신원운동이 시작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 거창사건과는 다른 점이 있나.
"한 부대 한 작전으로 이뤄진 동일 사건이다. 다만 거창사건은 사건 직후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의 폭로로 국회 차원의 조사발의를 했지만 산청은 발의 단계에서 빠졌다. 또 생존자와 유족들이 소수인데다 진상을 거론할 분위기도 못돼 90년대까지 드러나지 못했다."

국회통과 개별보상법, 정부가 거부권 행사 폐기

- 현재까지 진행된 정부차원의 명예회복은.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96년 1월, 15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 특별조치법에 따라 2004년 거창군 신원면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들어섰고, 2008년 산청군 금서면에 산청·함양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이와는 별개로 2004년 개별보상법인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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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 유족회장
ⓒ 장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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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법이 폐기되면 보상에 대한 근거가 없다.
"이 때문에 폐기된 법안을 부활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폐기 4년만인 지난 2008년 우윤근(민주. 전남 광양·구례) 의원이 '거창사건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법안에서 산청·함양사건이 빠지고 거창사건 배상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이 부분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어떻게 같은 군대에 의해 같은 시간대에 저질러진 사건인데 거창사건만 배상하고 산청·함양사건은 배제할 수 있느냐.

호소를 들은 김충조(민주. 전남 여수) 의원 등 37명의 의원이 곧바로 2008년 말 이 법안에 산청·함양사건을 포함하는 수정안을 제출해 거창사건만 다루는 '특별조치법안'의 국회 처리를 미뤘다."

김재경 의원, 개별보상법 개정안 발의...부활 기대

- 배상관련 국회 법안은 어떻게 처리되나.
"지난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산청·함양사건은 거창사건과 동일군대·동일인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분리하여 처리할 사항이 아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96년에 재정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2008년 우윤근 의원이 발의한 '거창사건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 ▲신성범(새누리. 거창·함양·산청)의원이 발의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전부 개정 법률안' 등을 병합하여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법안 난립이 법 제정을 늦추는 것 아니냐.
"다행스럽게 올해 8월 김재경(새누리. 경남 진주을) 의원이 산청·함양사건을 포함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전부 개정 법률안을 새롭게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사실상 2004년 정부가 폐기한 개별보상법이 부활해 거창과, 산청·함양사건 유족들의 명예회복이 가능해진다."

4개 법안 병합처리 건의‥조속처리는 불투명

- 거창과 산청·함양사건 관련 법안은 몇 개인가.
"96년에 재정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있다. 국회에 상정된 법안은 ▲우윤근 의원 발의의 '거창사건 관련 법안', ▲김충조 의원 등이 발의한 '수정안'과 ▲신성범 의원이 발의한 '특별조치법' 개정 법안, ▲김재경 의원이 발의한 '특별조치법' 개정 법안 등 4개 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유족회에서는 이를 병합처리해 줄 것을 건의해 놓고 있다. 하지만 언제 처리될지는 모른다. 아마도 이번 대선이 끝나야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 정부나 정치권에 섭섭한 마음은 없는지.
"일단은 2004년 정부가 거부해 폐기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전부 개정 법률안이 상정돼 이 법의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조속하게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시켜 주었으면 한다. 유족들 힘이 약해서인지 정부가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책임 있는 분이 사과하고 과거 일을 청산했으면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지금까지 유족들의 명예회복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너무 많다. 국회의원들과 심지어 고향 동네 분들까지 고마운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사재를 틀어넣어 명예회복 작업에 나서는데 힘이 될 수 있었다."

정재원 회장, 지리산평화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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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 회장(오른쪽)이 평화대상을 수상하고 있다. 왼쪽은 이재근 산청군수.
ⓒ 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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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 (사)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장이 지난달 12일 산청군 지리산평화제위원회(대회장 이재근 산청군수)가 시상하는 제39회 지리산평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산청군 지리산평화제위원회는 평소 공사생활에 귀감이 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인사를 발굴,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해마다 열리는 산청군 제전인 지리산평화제 개막식에서 시상한다.

평화대상에 선정된 정재원 회장은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되도록 노력하였으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위령제를 위해 유족회에 매회 2000만원을 기부하는 등 다양한 사회 공헌활동을 펼쳐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또 올해부터 산청․함양사건 등 시대의 아픔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가들을 찾아 시상하는 '산청․함양 인권문학상'을 제정, 창작지원금 1000만원 및 부대경비를 모두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