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4 19:27수정 : 2013.03.04 19:27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소설가였다.” 이제는 저 뉘로 간 선배작가가 한 말이었지요. 소설가로 이름자를 얻고 보면 어느 발에 채이는지도 모른 채 깨져버릴 수밖에 없는 얼띤 죽음만큼은 면할 수 있겠다는 슬픈 깨달음에서 한 말이겠는데, 이 중생 또한 똑같은 말씀을 할 수 있겠군요. 다음은 현대사 전공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쓴 <대한민국사1>에 나오는 대문입니다.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책에까지 나왔으므로, 하마 꿈속에서라도 누가 엿들을까봐 목구멍 안으로 삼키고 있던 제 집안 이야기를 머리글 삼아 대통령님께 글월 드리게 된 까닭이기도 합니다.

“빨갱이를 아버지로 둔 작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빨갱이 새끼…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 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 뱉는 빨갱이가 되어 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풀기 빠진 핫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김성동 <엄마와 개구리>)

김성동뿐 아니라 작가들 중에는 이문구, 김원일, 김원우, 이문열 등 빨갱이 아버지를 둔 사람들이 많다. 어디 변변한 직장 잡을 길이 없었기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김성동, 이문구, 김원일 등이 작품 활동을 통해 그 원망스러운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감싸 안으려 했다면 이문열은 그들과 날카로운 대척점에 섰다. 그래도 작가들이야 글 쓰는 재주라도 있어 자신들의 아픈 사연을 작품으로라도 승화시켰지만, 이도 저도 없는 힘없는 사람들은 속으로 피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속으로 피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없고 슬픈 사람들 손을 잡아주어야 할 의무와 역사적 필연성이 대통령님께는 있다고 보아 붓을 들게 된 것이지요. <해방일보> 1950년 7월28일치에 실려 있는 기사입니다.(신문에 실렸던 대로임)

“피에 주린 악귀들의 만행을 계속/대전에서 七천여명 살륙/재감중의 애국자 전부가 희생

七월四일경부터 ×들은 대덕군 살(산)내면 랑월리 뒷산을 비롯한 수개소에 기리七,八메터 넓이 二메터가량의 깊은 구뎅이를 다수 파놓은 뒤 우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중인 애국투사들을 전부 실어내다 쏘아죽이고는 구뎅이 속에 차넣다는 것이다. 하루에 다섯 튜럭씩 혹은 열다섯 튜럭씩 실어내다 죽였는데 인민군대들이 대전 가까히 진격해 온다는 것을 알자 ×들은 튜럭으로 하루 최고 八백여회를 날러다 죽이였다는 것이다. 형무소에 있는 애국투사들을 학살함과 아울러 소위 보도련맹 가맹자와 일반 무고한 로소남녀와 학생들을 「예비검속」이라는 허위 밑에 체포하여다 역시 학살하였다.

송인성 농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들은 애국투사들을 총살장으로 실어갈 때에는 부근에 일반사람들의 통행을 일체 금지시키고 목목이 총을 멘 헌병들을 지키게 하였지요. ×들은 애국자들의 손목들을 고랑으로 채우고 고개들을 무릎팍에 꽉 끼운 채 옴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한번은 젊은 사람 한분이 튜럭이 자기 집 부근에 다달으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하고 소리높이 웨치며 뛰여나렸습니다. 그러자 헌병사형리들은 차를 멈추고 여럿이서 달려들어 총대의 고굉이로 까서 즉살시켰습니다.… 七천여명가량 죽었을 거라구들 하지만 나는 一만여명은 학살하였으리라구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전연 모르는 곳에 끌어내다 죽인 것도 있으니까요. 지금도 구뎅이에만 가면 시체를 묻은 뒤 흙을 엷게 한가풀 덮었을 뿐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의 팔, 다리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은 노도와 같이 진격 또 진격하는 영웅적 인민군대의 준엄한 소탕전에 의하여 비참한 주검과 패주만이 자기들의 유일한 운명으로 되자 이와 같이 단말마적인 인민학살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님! 이들의 눈을 감겨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죽음에 대한 어떤 역사적 꼲아 매김을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단이 해소되지 않은 이상 그럴 수도 없겠지요. 다만, 시방도 백골이 튀어나오는 그곳을 정부에서 안 된다면 사비로라도 사들여 평화공원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마구 죽여 버린 것은 미군 조종을 받던 이승만 정권인데, 왜 박근혜 정권에서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승만 정권의 법통을 받은 것이 박정희 정권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법통을 받은 것이 박근혜 정권입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님의 부친이기도 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정권을 잡게 된 까닭을 줄 밑 걷어 보면 산내 뼈잿골에서 학살당한 이들과 역사적 이음고리를 맺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권을 차지하는데 뼈잿골에서 학살당한 이들한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을 저지르며 기층 민중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2년 반 동안 군사독재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민중들 열기로 봐서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1963년 10월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박정희 470만2640표, 윤보선 454만6614표였습니다. 윤보선씨는 그 뒤 ‘정신적인 대통령’이라는 유명한 말을 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현실은 박정희 당선이었지요. 도덕적 근거가 없으니 정권의 정통성도 전혀 없던 박정희 육군소장을 정점으로 한 일부 정치군인들에게 합법적인 정권 옷을 입혀준 것이지요.

그러면 군사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씨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에 당선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합헌적인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그 합헌성을 부정한 군사 쿠데타를 인정했다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그 합헌성을 부정하는 등 윤보선씨의 일관성 없는 행동과 부정선거 탓도 어느 정도 있겠으나, 윤씨가 낙선한 데에는 ‘사상논쟁’을 벌였던 데 있다고 봅니다. 윤보선씨가 일으킨 이른바 ‘사상논쟁’이라는 것은 ‘박정희씨가 제1군 참모장으로 재직 중이던 육군소령 시절 남조선노동당 군사부장으로 복무했으며 1948년 북조선 정부를 지지한 여순반란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우인 장교들에 의한 감형 도움을 받아 군에 다시 복무하게 됐다’는 전력을 들추어 박정희 후보를 ‘공산당’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을 말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상대방 후보를 ‘공산당’이라고 매도하고 나서는 윤보선 후보에게 민중들은 염증과 함께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또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956년 5월15일에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공천으로 입후보한 죽산 조봉암씨가 얻은 216만3808표 가운데 상당수가 박정희 후보에게 갔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는데, 찍어 말하면 살인적 반공체제 아래 숨죽이며 살고 있던 남로당 유가족들의 표가 전 남로당 군사부장이었던 박정희한테로 갔던 것이지요.

바로 이 대목입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8천명(학살사건 소문을 듣고 뼈잿골을 찾았던 할아버지가 근처 사람들에게 들었다는 말임) 이상이 비명횡사한 충남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곧 뼈잿골 현장에 평화공원을 세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중음신들 눈을 감겨드려야 할 역사적 당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도 대견스러운 딸따니의 ‘지도력’에 빙그레 웃음 지으시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른바 전략적 노느매기에 지나지 않는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전 인류의 이름으로 씌워주는 평화의 꽃다발을 받게 되겠지요. 아울러 이 땅에 평화공원이 들어서야 할 곳은 뼈잿골 말고도 많겠고요.

박근혜 대통령님! 뼈잿골을 평화공원으로 만드십시오. 그랬을 때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라며, 두서없는 붓을 놓겠습니다.

김성동 소설가·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