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2400만원 지급 조정 결정... "영문책자 번역 오류 발견 안돼"

지난 2009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진실화해위) 위원장 시절 '번역오류'를 이유로 영문책자 배포를 중단시켰던 이영조 전 위원장이 영문책자 번역·감수자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조서'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정연택)은 이영조 전 위원장이 번역자인 김성수씨 등 3명에게 각 8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조정의견을 결정했다.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조서'는 재판 당사자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재판부가 신청취지에 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결정한 조정내용이 담겨 있는 문서다. 이 결정조서를 송달받은 날로부터 2주일 안에 이의를 신청하지 않으면, 이 결정내용은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총선 당시 강남을 새누리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지만 진실화해위원장 시절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a popular revolt)' 등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켰다가 후보를 사퇴했다.

"번역오류가 발생된 부분을 지금까지 명확히 밝히지 않아"

이영조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 연합뉴스
이영조

이영조 전 위원장은 지난 2009년 12월 진실화해위 위원장에 취임한 직후 추가로 제작한 영문홍보책자 <진실과 화해>(Truth and Reconciliation)의(1000부)의 배포를 중단시켰다.

이 전 위원장은 "문법, 구문상의 오류,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며 배포중단의 핵심 이유로 '번역상의 오류'를 들었다. 하지만 뉴라이트 성향의 이 전 위원장이 '좌파정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영문책자 배포를 중단시켰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에 영문홍보책자 번역·감수자인 김성수씨와 박은욱씨, 마이클 윌리엄 허트 등 3명은 지난 2010년 5월 이 전 위원장을 상대로 각 2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 3월 12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좌파정권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영문책자를 중단시킨 것이 아니다"라며 "번역상 오류가 책자 배포를 중단시킨 이유 중 하나"라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러한 이 전 위원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전 위원장이 상임위원 시절에 문제의 영문책자가 발간되었음을 들어 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법원은 "영문책자의 발간 당시 원고들은 영문번역을 한 후 영어가 모국어인 원어민 등에게 감수를 의뢰해 영문책자상의 번역 오류 발생 여부를 재확인받은 바 있고, 피고가 진실화해위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영문번역상의 오류 및 검토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발간해 배포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은 "피고는 상임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2008년 11월부터 2009년 2월까지 3개월간의 영문원고 검토 기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문책자의 영어오역에 대하여 어떠한 지적도 밝힌 적이 없다가 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번역오류를 이유로 배포중단을 지시했다"고 갑작스런 배포 중단 조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법원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부분에서 번역상의 오류가 발생되었는지 명백히 지적한 바가 없다"며 "뒤늦게 번역오류를 해명하기 위해 감수를 마친 영문책자의 재감수를 의뢰하였으나 번역오류가 발생된 부분을 지금까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지난해 이화여대 통역번역연구소(소장 이유희)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이 전 위원장이 배포를 중단시킨 영문홍보책자에는 '번역상 오류'가 거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바 있다.

"주관적 판단으로 정신적,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이영조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배포 중단을 지시했던 영문홍보책자 <진실과 화해> 표지.
ⓒ 진실과화해
진실위

또한 법원은 "원고들은 피고가 번역오류를 이유로 배포를 중단함에 있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각 언론사들을 통해 영문책자의 영문번역 오류로 인한 배포 중단이라고 보도되는 등 허위사실이 유포됨에 따라 원고들이 지금까지 해온 영문 통·번역업무에 손실을 입힐 정도로 원고들의 명예에 크나큰 훼손을 입었다"고 밝혔다.

법원은 "피고가 영문책자내에 영문번역 오류가 발생했다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책자 발부, 배포 중단이 생기면서 책자 발간에 참여한 전문가들인 원고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정신적인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 영문 통·번역업을 함에 있어 큰 손실이 발생될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원고쪽의 '손해'를 인정했다.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법원은 이영조 전 위원장이 김성수씨 등 3명에게 각 800만 원을 오는 31일까지 지급하라는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