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나를 소개할 때, 항상 “나와 피를 나눈 형제이기 전에 내 오랜 정치적 동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로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은 과분한 말이지요. 나는 공직에 한 번도 나가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형님은 군수, 행정자치부장관, 당 최고위원, 경남도지사까지 진출한 사람이니 ‘정치적 동지’는 수사(修辭)에 가깝지요. 어쨌든 과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두형제가 이제 같은 당의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민주통합당으로 신설 합당하는 과정에서 창당을 주도했으니, 이미 입당한 것이고, 형님은 이제야 입당하니, 당에서는 제가 오히려 선배가 되겠군요. “형님의 민주통합당 입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고향 남해를 떠나, 23살 대학생과 28살 늙은 제대군인으로 서울에서 만난 1985년, 우리는 피가 뜨거웠던 젊은 형제였죠. 안암동, 중랑천, 쌍문동으로 자취방을 옮겨 다니며, 나는 학생운동, 형은 낮에는 신동아 외판원으로, 밤에는 ‘민통련 민족학교’ 학생으로 사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동지’라고 부른다면, 이때 형성된 ‘초심’일겁니다.

나는 노동운동으로 인천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형은 민통련에서 ‘86년 100만 개헌청원운동’을 하였죠. 그때는 서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어딘가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 사람의 신문을 훔쳐보다가 그만 ‘아!’ 소리가 나오더군요. 형님이 구속되어 감옥을 갔다는 기사를 그렇게 신문으로 알았습니다. 저도 수배중이라 면회도 못가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뒤, 출소하여 저를 만나 첫 질문이 “서울에서 중앙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고향에 가서 지역운동을 하는 게 좋겠는가?” 하고 물어보았죠. 저는 아주 원론적 답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이미 형님은 답을 정리하고 나왔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경남 남해 고향으로 내려갔죠. 형과 내가 다시 만난 것은 87년 대선이 끝나고, 88년 ‘민중의 당’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했고, 내가 뒤늦게 군대를 가게 되면서 소위 ‘방위’생활을 남해에서 하면서 1년6개월을 지역 청소년문화운동, 남해신문사, 남해농민회 활동으로 함께 보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정치적으로 더 ‘동지’가 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인천에서 크레인기사, 지게차기사로 노동운동판으로 돌아가고, 형은 남해신문을 최고의 지역신문으로 키웠습니다. 7년의 노력으로 95년 지방자치단체장선거에서 37살의 나이로 남해군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선거기획단장이었던 것은 기억하시죠? 그런데 형이 2002년 경남도지사 선거에 도전하면서 저의 앞길(?)을 망쳐놓았어요. 마침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노무현 캠프) 국민경선팀장을 맡았는데, 1개월 만에 국민경선팀장을 그만두고, 형님 선거 때문에 경남 창원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도 더 깊어지지 못하고, 청와대도 갈 수 없었고, 새천년민주당을 개혁하는 일을 맡았고, 그래서 탄생한 당이 ‘열린우리당’입니다. 당헌 구절에는 저의 손때와 정신이 묻어 있습니다. 제가 열린우리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형님이 참여정부의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뻤습니다. 그

  6590_2892_3218.jpg  
런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합심해서 한총련 대학생이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장관해임권고안을 통과시키는 만행을 져 질렸죠. 저는 2003년 9월에 일어난 이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 예비탄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2004년 총선에 나는 일산(을)지역에, 형은 경남 남해하동에 각각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형은 장관을 하고 있고, 나만 출마하면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둘 다 출마하는 바람에 역량이 분산되어 ‘형제는 용감했다’는 영화(?)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형은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했고, 나는 김영선 후보와 2%차이로 낙선했습니다. 이때만큼 우리 두 형제에게 어려운 시절이 없었을 겁니다. 저는 직함이 없는 중앙위원으로 당의 개혁문제로 당권파들과 밤낮을 싸웠고, 형은 당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도전에 실패했죠.

그 와중에 2007년 대선에 형은 도전했고, 나는 형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열린우리당 해산’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도로 민주당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서 형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죠. 정말 정치적 동지라고 생각한 형과의 이별이 미안했고, 정치적 가능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기득권 당권파들에게 소리 없이 밀려버리는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런 시련이 약이 될 것일까요? 밑바닥 현장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항상 현장에서 답을 찾았던 형님은 3년 만에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저도 형님을 돕겠다고 경남 창원에 간 덕분에 나의 새로운 정치적 동지 ‘문성근’을 2010년 6월 1일 8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날 우리는 통했습니다. 야권통합운동만에 정권교체를 이루는 첩경이라는 것을. 그래서 3개월 준비하고 시작한 것이 ‘유쾌한 백만민란 국민의 명령’인 것입니다. 형님 덕분에 새로운 의형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또한 민주통합당 초대 사무총장이 되었고, 야권통합까지 덤으로 얻었습니다.

저는 요즘 일산서구 유권자를 만나면서 두형님을 모시고 “기득권 정치, MB정치, 민주통합당을 함께 바꾸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한분은 친형님이고 다른 한분은 의형님인데, 피를 나눈 형님보다 뜻을 나눈 형님과 더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아주 기분 좋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나이의 자존심 때문에 2004년 선거 때는 형님의 동생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알아보는 분들도 많고, 형님에 대한 호감도가 워낙 좋아서 자존심을 굽히고 제가 형님을 팔기로 했습니다. 못난 동생을 용서해 주리라 믿습니다.

김두관 형님!
아무튼 우리가 돌고 돌아서 다시 같은 민주통합당의 당원이 되었습니다. 입당의 선배(?)로서 덕담을 한다면, 형님의 현장성, 진정성, 추진력이 민주통합당이라는 조직을 만나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여는 계기가 되고, 경남에서 새누리당을 이기는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2012년 형님의 정치적 결단에 행운이 가득하고, 형님을 믿고 따르는 동지들의 앞길에도 행운이 함께하길 빕니다. 문성근 형님과 함께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외치겠습니다.

“우린 이깁니다. 가자! 가자! 가자!”

2012. 2. 16

못난 동생 김두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