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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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 등을 내란음모죄로 수사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유신 시절과 광주 5·18을 겪은 나는 우선 움찔했다. 공포감을 추스르고 나니 ‘어이없음’과 짜증, 그리고 서글픔의 감정이 묘하게 겹쳐졌다. 나는 80년 김대중 내란음모보다는 71년 11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 떠올랐다. 대학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하숙집’에서 내란을 음모하다니… 정말 소도 웃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 무시무시한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멀쩡한 사람을 하루아침에 송장으로 만들던 시대니, 모두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가를 뒤집을 정도의 음모라면 적어도 그들이 만들었다는 아르오(RO·일명 산악회)가 내란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나 조직체계, 실행계획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고, 정말 권총 한 자루나 사제 폭탄 여러 개라도 준비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상식적 질문을 던진다.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보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이들이 그런 준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들과 같은 근본주의 민족해방론자들이 제도 정치권에 들어간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들이 자기들끼리 모임에서 그런 ‘납득 안 되는’ 이야기도 했을 수 있다고 추측은 하지만, 그들이 무슨 내란을 모의할 힘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에 내란음모죄를 들고나온 국정원이나 이들의 먹잇감이 된 80년대식 ‘애국세력’을 보고 참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의 내란죄 소동이 천둥소리로 시작해서 모기 소리로 끝난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의 내란음모 사건이 야당과 온 저항세력, 그리고 온 국민을 움츠러뜨려 감히 정권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효과를 톡톡히 거둔 것도 너무 잘 보았기 때문에, 이번 국정원의 칼춤을 보고서 두려움보다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식민지 초기 일제의 이른바 105인 사건 내란죄 조작에서 80년대 김대중 내란죄까지 지난 세기, 권력이 만들어낸 내란죄에서 확인된 사실은 표적이 된 집단의 ‘내란음모’가 아니라 사실 권력자들의 위기였다. 형법에 의한 처벌이 횡행하는 나라는 아직 미개국가라는 사회학자 뒤르켐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내란음모’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국가와 사회는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며, 그 나라의 권력자들은 얼마나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못난 존재’들인가?

 

생각의 시계가 1970년대에 멈춰 있는 사람들이 이 정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갈 때 이런 일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는 했다. 국정원은 이런 사건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우리는 국정원이 개혁되어야 할 더 강한 이유만 발견하게 되었다. 진보당 사람들이 수년 동안 그렇게 사찰당하고 발언이 녹취되었다면, 민주당은 물론이고 여당이나 국민 모두가 불법 사찰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자신들이 위기에 빠지면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칼을 빼들어 모든 다급한 국가적 의제, 특히 경제·사회적 의제는 완전히 묻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건은 확실히 박정희 스타일, 아니 박정희가 전범으로 삼았던 조선총독부 스타일이다. ‘내란’, ‘국가안보’, ‘방공’, ‘방첩’의 20세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가 정말 짜증스럽고 또 슬프다. 이 수사는 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는 그들의 대선 불법 개입 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종북사냥'의 뿌리, 이렇게 깊고 넓습니다

[책수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13.09.06 09:33l최종 업데이트 13.09.06 18:29l
새로운 형식의 서평을 쓰고 싶었다. 생각 끝에 여러 명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수다를 떨어보기로 했다.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의견이 가지를 치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내용의 새로움까지 담기는 기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책수다'를 시작한다. 김경훈, 박현진, 이규정 시민기자가 함께 쓰는 이 기사는 2주에 하나씩 연재된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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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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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
(김) :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할 책은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사계절)입니다.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이 책을 선정했습니다.

저자 김동춘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과 국가폭력 문제에 천착해온 학자인데요. 연구자, 활동가, 정부 관료로서의 경험을 정리해 민간인 학살이 어떤 의미인지, 과거 청산이 왜 필요한지 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들 어떻게 보셨나요?

박현진(박) : 전반적으로 이 책은 기억의 위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전쟁의 공식 기억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남한을 침공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고통을 겪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모든 게 북한과 공산주의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공식기억에 반(反)하는 기억, 한국의 군경과 미군이 좌익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죽였던 기억은 억압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살의 가해자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하고, 학살을 이야기할 때도 '전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줍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을, 우리가 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책 제목도 한국전쟁의 공식기억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다소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그런 당위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습니다.

유족만의 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으로

이규정(이) : 저는 국정원 국정조사를 보면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 논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친북과 종북을 굉장히 포괄적으로, 광범위하게 정의하면서 은연중에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게 과거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하던 논리의 연장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기억과의 전쟁'이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되고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 그 공포심이 2차 피해를 만들고 있다고 봐요. 학살의 피해자인 유족들조차 '우리 아버지는 좌익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좌익이면 죽어도 된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족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학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것보다 '아버지가 좌익이 아니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이 만들었던 공포심이 여전히 유지되는 거죠. 또 지금도 종북좌파라는 단어가 손쉬운 공격수단으로 쓰이고,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동춘이 말하는 '기억과의 전쟁'은 여전히 유효하죠.

: 저도 동의합니다. 저는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공식기억에 맞서는 일이 유족들만의 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를테면,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 사건인 거창사건은 사실 거창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11사단 9연대가 산청·함양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며칠 후 거창에서 또 민간인을 학살했거든요. 이건 하나의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거창 유족들은 산청·함양 사건과 묶으면 거창사건의 비중이 작아지고, 그러면 거창특별법의 지위도 흔들린다면서 산청·함양 유족들과 대립합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온다는 식으로 말이죠. 유족들이 자기 고통만을 절대화함으로써 오히려 유사한 고통을 겪은 다른 유족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모습이 안타깝더군요. 유족들의 한을 풀고 명예회복과 피해배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족들만의 운동이 될 때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 거창 사건의 합동묘역이 생길 때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고 하죠. 학살 현장에 합동묘역을 세우는 것은 좋은데, 거창군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이라 사람들이 이 사건을 기억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창 명예회복 사업의 최대 수혜자는 지방 건설업자들이었다는 말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유족을 넘어 오늘날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관심한 사회, 청산되지 않는 과거

: 또 하나 느낀 것은 과거 청산이 정말 어렵다는 건데요. 학살 이후 50여 년이 지나서 정말 어렵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만들어졌는데도 과거 청산이 제대로 안 됐거든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학계를 비롯해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너무 무관심했던 거죠. 미군의 폭격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에게 대단한 공포였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의 조사를 놓고도 미군의 폭격 정책 전반을 검토하지 못하고, 책임 주체 규명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학계의 연구 부족이 결국 미군 관련 사건은 거의 반 이상 해결하지 못하는 걸로 이어졌죠.

: 학계뿐만 아니라 언론의 문제도 있죠. 초기에 민간인 학살을 주요하게 보도한 언론은 이른바 비주류 매체인 월간<말>과 <부산일보><경남도민일보> 뿐이었다고 하잖아요. 주류언론 중에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정도였고. 주류 매체가 취재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언론이 무관심했던 게 많이 안타깝더군요.

: 결국 우리 사회 전반이 무관심했던 거죠. 문경 유족 채의진은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보다도 이 문제를 외면한 국회의원, 학자, 언론인들이 더 밉다는 말도 했다니까요.

: 일부 주류 언론은 무관심을 넘어 진실화해위를 격렬히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과거사위원회의 아까운 예산 낭비'란 사설에서 진실화해위 활동을 "한마디로 농담이다" "동호인들끼리 모금해서 하라"며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그것 말고도 아주 많은 장애물이 있죠. 위원회라는 기구의 애매한 위상, 제한된 시간 안에 한정된 인원으로 수많은 사건을 조사해야 하는 한계, 유능한 조사관을 구하는 어려움 등등.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 이제 아쉬운 점을 이야기해보죠. 아까 민간인 학살을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로 따지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했는데요. 책에서 그 부분은 좀 약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그런 설명이 없지는 않습니다. 김동춘은 오늘날 공안기관의 권력 남용, 노동현장의 구사대 폭력 등의 원형이 한국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한국전쟁과 오늘날 한국사회의 국가폭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 연결고리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민주정부의 국가폭력에 침묵하다

: 저는 그게 민주정부 10년의 국가폭력을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군사독재 정권 이후로 계속된 국가폭력이 갑자기 단절되다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나타난 것처럼 서술되니까 연결고리가 약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국가폭력은 있었거든요. 대추리나 부안에서 국가정책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공권력을 행사했죠. 그런데 그 부분이 빠지니까 한국전쟁부터 이어진 국가폭력이라는 주제가 다소 힘이 떨어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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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청원군 만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위치한 보도연맹사건 학살지
ⓒ 진실위 조사관 백서준비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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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부분이 빠진 건 분명히 이 책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의미는 분명히 있어요. 어차피 과거 청산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할 일인데, 이 책은 그 일에 도움을 줄 겁니다. 그만큼 실제로 저자가 부딪힌 문제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진실화해위 활동을 이렇게 정리한 책이 아마 없을 텐데, 과거 청산 문제에 일종의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연구자, 활동가, 정부 관료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담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김동춘이 진실화해위에 들어가고 난 후에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을 절감하잖아요. 과거 청산을 위한 최선의 법을 만든다고 했지만, 막상 진실화해위를 운영하다 보니 여러 결점이 드러나고, 법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는 걸 통감하는 모습도 나오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회운동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꼈습니다. 김동춘이 시민운동만 했다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다루지 못했겠죠.

: 저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폭력의 기원을 찾는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이전의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이 없었던 탓에, 용산이나 제주 강정마을 등에서 국가폭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라고 봐요. 이 문제는 과거가 아닌 현실의 문제입니다. 김동춘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 생환하고 있으며, 현재 속에 녹아들어와 펄떡이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과거의 국가폭력을 돌아보는 게 필요하고, 이런 작업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그래서 우리가 60년 전에 일어난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을 읽는 거겠죠.(웃음)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국가폭력의 원형이라면, 우리는 '기억과의 전쟁'을 통해서 한국전쟁의 부정적 유산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억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교본일 수도 있겠지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책으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