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 입력 2015.05.06 09:56 | 수정 2015.05.06 10:39


187명 집단성명 '위안부 강제동원·국가개입' 명확히 규정

'두루뭉술한' 입장표명땐 또다시 국제사회 비판 직면할 듯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역사는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며 책임을 회피해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체면을 구기게 됐다.

아베 총리의 '과거사 역주'에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역사학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지난 2월5일 미국 역사학자 20명의 집단성명으로 불붙은 역사학계의 '궐기'가 전 세계로 확산된 모양새다.

↑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연설 무대에 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 세계 역사학자 187명 집단성명 "아베 '위안부' 과거사 왜곡말라"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장재순 김세진 특파원 =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미국 빙엄턴대학), 디어도어 쿡·하루코 다야 쿡(미국 윌리엄 패터슨 대학), 존 다우어(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를 비롯해 에즈라 보겔(하버드대),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피터 두스(스탠포드대)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6일(현지시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정면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외교경로를 통해 아베 총리에게도 직접 전달됐다. 사진은 공개서한 일부 캡쳐.

↑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는 단순히 역사학계를 넘어 아베 총리가 모처럼 주변국에 고개를 숙일 기회였던 지난달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조차 과거사를 외면한 데 대해 국제사회 전반의 기류가 비판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번에 성명에 참여한 학자들의 규모와 면면으로 인해 그 상징성과 중량감이 커보인다.

우선 참여한 숫자가 무려 187명인데다가, 모두 일본학과 일본문제를 연구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 시기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정통한 인물들이다.

특히 이 중에는 세계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두(巨頭) 다수가 참여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허버트 빅스(미국 빙엄턴대학), 디어도어 쿡·하루코 다야 쿡(미국 윌리엄 패터슨 대학), 존 다우어(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가 우선 눈에 띈다.

빅스 교수는 2001년 태평양전쟁 전후의 일본 현대사를 다룬 '히로히토와 근대일본의 형성'이라는 저서로, 쿡 부부 교수는 1992년 위안부와 관련된 구술이 담겨 있는 '전쟁중인 일본'이라는 저서로, 다우어 교수는 전후 일본의 변화와 성장을 규명한 2000년 '패배를 껴안고'라는 저서로 각각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여기에 하버드와 프린스턴, 시카고, 스탠퍼드 등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를 비롯해 에즈라 보겔(하버드대), 피터 두스(스탠포드대), 데츠오 나지타 시카고대 교수와 아키라 이리에 하버드대학 교수 등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동아시아 전문가들이다.

이번 성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1차 성명 때와 수미일관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만행이 이미 검증이 끝난 역사적 사실(史實)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아베 총리가 이를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집단성명을 주도한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이번 성명의 의미를 "과거 고노 담화 때처럼 아베 정권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역사왜곡이나 정치쟁점화를 하지 말라는 직접적 호소"라고 정리했다.

성명은 특히 위안부 문제의 본질인 국가개입과 강제동원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군이 여성들의 이송이나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이미 역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발굴됐다는 것이다.

성명은 "일부 역사가들이 일본군이 얼마나 관여했는지, 여성이 '위안부' 노릇을 하도록 강요받았는지에 대해 다른 주장을 내놓기도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붙잡혔고 끔찍한 야만행위의 제물이 됐다는 증거는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적이 없다"는 아베 총리와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더이상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세계 역사학계의 확립된 컨센서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국제 역사사학계의 집단행동은 오는 8·15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기념하는 이른바 '아베 담화'를 준비 중인 아베 총리에게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설 가능성이 커보인다.

방미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질을 교묘히 회피하고 '두루뭉술한' 사과를 하려는 것으로는 아시아 주변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게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국제 역사학계의 이 같은 움직임은 현재 진행 중인 한·일 간의 국장급 위안부 협상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아베 정권이 이같은 국제사학계의 지적을 수용해 국장급 협의에 전향적으로 임한다면 새로운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오는 6월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양국관계 개선의 향방을 점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r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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