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 입력 2015.03.30 18:10 | 수정 2015.03.30 21:50


[한겨레][한겨레21] 총리실 산하 심의위 31일 첫회의


소득없는 학생들, 일실수입을 최저기준으로 산정


지급신청 기한 고작 6개월…조사 없이 배·보상 끝날판

정부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게 지급할 위자료를 8000만원으로 제시한 것으로 <한겨레21>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이는 법원의 교통·산재 손해배상 위자료 산정 기준을 따른 것이다. 정부가 국가적 재난인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셈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국회가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특별법)을 1월28일 제정함에 따라, 정부는 27일 특별법 시행령을 만들어 29일부터 세월호 피해자의 피해 배상과 보상, 생활지원금 등을 신청받고 있다. 구체적인 배상·보상 기준은 국무총리실 산하 '4·16 세월호 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가 31일 첫 회의를 열어 의결한다.

정부 관계자와 세월호 유가족의 말을 종합해보면, 배상·보상 심의위를 지원·관리하는 해양수산부는 배·보상 기준으로 서울중앙지법의 교통·산재 손해배상액 산정 기준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 손해배상액 기준을 적용하면 안산 단원고 학생 희생자에 대한 일실수입이 3억3500만원이 최대치다. 배·보상금은 △적극적 손해(치료비나 구입비 등 실제 지출한 비용) △소극적 손해(일을 못해 잃은 수입) △정신적 손해(위자료)로 나뉜다. 일실수입(일을 못해 잃은 수입)을 정할 때 학생은 소득이 없어 최저수입인 도시 일용근로자 일당(8만4166원)을 기준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마련했던 김희수 변호사는 "희생 학생들의 경우 미래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만큼 피해·생활 정도에 따라 배상액을 조정하고 별도의 위자료도 지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사망 위자료도 일률적으로 8000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8000만원은 2008년에 책정돼 교통·산재 사망사고에 적용할 때도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서울중앙지법도 지난 2월 위자료 기준을 기존 8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김 변호사는 "어이가 없다"고 했다. "교통사고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선박 도입과 운행, 구조 과정에서 국가의 잘못이 명백하다. 교통사고와 단순 비교할 수 있는 문제다."

세월호 피해자들은 배·보상금, 위자료와 별도로 '위로 지원금'을 받는다. 위로지원금은 국민 모금 1200여억원으로 지급되며, 부족하면 국고로 지원하기로 했다. 지급 기준은 희생자와의 관계, 피해 정도, 실제 양육한 사정, 부양의무 이행 여부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국무총리실 산하 배·보상 심의위(심의위)는 31일 제1차 회의를 열어 세월호 사고 배상 및 보상 추진계획을 보고받은 뒤 인적·화물·유류오염 피해 배상기준(안), 어업인 손실보상 기준(안) 등 주요 안건을 심의, 의결한다. 배·보상 심의위는 민간이 참여한 세월호 특별조사위와 달리 공무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안영길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가 위원장을 맡고 법원행정처 판사 3명, 대한변협 변호사 3명, 해수부 등 관계부처 공위공무원 6명, 수산과 손해사정 관련 분야 전문가 2명 등 14명이 참여한다.

배·보상 지급 신청을 9월28일까지만 받기로 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심의위는 신청을 받은 날로부터 120일 이내에 희생자나 부상자들의 일실수입, 위자료, 부상자 치료비 등의 지급 여부와 금액을 결정한다. 사실조사 등을 위해 필요하면 한 차례에 한해 30일 범위로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배·보상 신청기간(6개월)이 민법과 국가배상법이 정한 소멸시효(3년)보다 훨씬 짧아 진상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데 배·보상만 끝날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을 조사할 특별조사위는 해수부가 조사위의 정원·조직 등을 대폭 축소한 특벌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해 출항도 못하고 있다.

특히 철저한 진상 규명 없이 배·보상금이 최저 수준으로 지급되면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은 면죄부를 받는 꼴이 된다. 일실수입은 계산 공식이 정해져 있지만 위자료는 가해자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 퇴선 유도를 하지 않는 등 부실구조했다는 혐의로 목포해경 123정 정장만 형사처벌(징역 4년) 받았지만 정부는 민사재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가 인정돼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할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특별법은 정부가 청해진해운 임직원과 세월호 선장·선원을 대신해 손해배상금을 우선 지급하고, 나중에 이를 받아내도록 했다. 정부의 손해배상 지급액이 적어지면 세월호 선장·선원 등이 부담하는 금액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4·16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를 지원하는 황필규 변호사는 "정부가 세월호 참사가 교통사고에 불과했다고 공언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사망 위자료로 8000만원을 일괄 제시한 것은 두 가지 의미다. 첫째, 과거 재해·재난 사건보다 훨씬 적은 위자료를 내놓고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심산이다. 둘째, 사실 관계를 따지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2014년 2월 138명의 사상자를 낸 경주 마우나 오션리조트 사고에서 코오롱은 유족들에게 보상금 5억9000만원을 지급했다. 1993년 10월 292명이 숨진 서해훼리호 사건에서 정부는 9900만원을 일괄 지급했다. 희생자 10명의 유족 45명은 이를 거부하고 국가와 한국해운조합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5년 만에 4억4000만원을 받아냈다. 당시 대법원은 희생자뿐 아니라 그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도 각각 위자료 4500~5900만원과 3000~39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은주 <한겨레21> 기자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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