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창간 19돌 기념 이벤트  이래도 대화가 굴복인가  [2013.04.29 제958호]

 

[김연철의 협상의 추억] “상대방에게 뿔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시작된 1989년의 남아공 국민당-ANC 회담… 고비마다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은 것은 상대방을 동반자로 인정했기 때문

 

 

대화를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다. 인종차별 정책이 남긴 증오 위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타협이 이루어졌다. 앙드레 말로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성숙한 인간’이라고 불렀던 넬슨 만델라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한 명 더 있다. 권력을 잃을 줄 알면서도 협상에 나섰던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다. 20세기 정치 변화에서 가장 예외적인 이 사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만델라와 함께 기억할 이름, 클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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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르트헤이트의 시대를 마감하고 처음으로 실시된 1994년 4월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압승이 확정된 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지지자들 앞에서 협상 파트너였던 프레데리크 빌렘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과 맞잡은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대화를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인가? ‘증오의 세월’ 동안 누적된 적대감이 있기에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국민당, 그리고 무장투쟁으로 저항해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모두 대화를 ‘나약함의 표시’로 인식했다.

 

드라마의 시작은 넬슨 만델라의 용기였다. 만델라가 죄수의 신분으로 비밀 협상을 시작했을 때, 그는 동료들과 상의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갖고 자신의 동지들을 설득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마침내 협상을 시작했다고 알렸을 때, 그의 오랜 정치범 동지조차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회담을 시작하길 바랐는데…”라고 말했다.

 

대화는 탐색의 과정을 거친다. 만델라는 클레르크가 집권하기 전에 이미 피터르 빌럼 보타 정부와 4년 넘게 대화를 진행했다. 무장투쟁에 관한 입장, 공산당과의 관계, 그리고 산업 국유화 등 쟁점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충분히 교환했다. 만델라는 대화 초기에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보타 정부의 핵심들이 ANC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ANC도 마찬가지였다. 만델라가 석방되고 공식 협상이 시작됐을 때, 당시 ANC 협상팀에 참여했던 타보 음베키(만델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는 첫 번째 만남 뒤 “상대 쪽 백인들이 머리에 뿔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국민당은 만델라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ANC가 대화가 가능한 상대임을 알게 됐다. 만델라도 마찬가지다. 1989년 10월과 12월 만델라는 죄수의 신분으로 클레르크를 만났다. 서로의 입장 차이는 컸다. 그러나 클레르크의 경청하는 자세를 만델라는 높이 평가했다. 만남이 끝난 뒤, 그는 동료들에게 클레르크를 “우리와 같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 표현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대화가 그렇게 쉬운가? 클레르크가 민주화 조치를 발표한 1990년 2월부터 역사적인 선거가 이루어진 1994년 4월까지, 협상은 중단되고 재개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고비를 겪으면서도 협상이 깨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언제나 상대가 동반자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1991년 12월 ‘민주 남아프리카를 위한 회의’(CODESA)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정치권을 대표해서 18개 단체와 정당이 모두 모여 헌법과 선거 방식을 논의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클레르크는 마지막 연설 순서를 활용해서 ANC를 비난했다. 여전히 무장투쟁을 버리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회의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만델라가 두고 볼 수 없는 술수였다. 그는 단상으로 올라가 “정부가 몰래 뒤에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모르면 정부 수반의 자격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모욕적인 상호 비판이었다. 협상이 깨졌을까? 아니다. 그들은 다음날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다시 악수를 했다. 시대적 과제가 중요했기에, 개인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의 수혜자’가 폐지를 결심한 이유

 

만델라는 협상 과정에서 클레르크의 평판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1993년 두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을 때, 만델라는 수상 연설에서 공로를 클레르크에게 돌렸다. 왜 그랬을까? 협상 상대가 약해지면 협상 동력도 떨어진다. 협상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클레르크는 어떻게 전환을 결심했을까? 그 자신이 인종차별 정책의 수혜자였다. 교육부 장관 시절에는 흑인 학생이 백인 대학에 다니는 것을 반대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1989년 그가 보타에 이어 대통령이 됐을 때, ANC 지도부가 당황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고, ANC를 합법화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전환기의 지도자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부여한 역사적 책임에 복무할 줄 알아야 한다. 클레르크의 결심에는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1975년에서 1991년 사이 남아공의 연간 성장률은 3% 이하로 떨어졌으며, 1인당 실질소득은 25%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국내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지속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 도래했다는 점이다. 인구구성에서 백인의 비중은 낮아지고 흑인의 도시 유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1988년 백인 다수의 종교인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할 것을 촉구하면서, 인종주의가 죄악이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하고 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ANC에 대한 ‘색깔론’의 명분도 사라졌다.

 

클레르크는 다수 흑인에게 권력을 넘겨주면서, 그 과정에서 국민당의 권력 유지 방안을 고민했다. 그가 준비한 카드는 권력 분점이었다. 3~4개 정당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맡고, 의회도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운영하되 상원은 모든 정당의 동수로 구성하자는 제안이다. 흑인들은 하원을 차지하지만, 백인들이 상원과 순환 대통령제를 통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협상 결과는 국민당이 주장한 권력 분점이 아니라, ANC가 고수한 다수의 지배로 귀결됐다. 권력은 흑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국민당도 총선 득표율에 따른 의석 배분과 내각 구성을 얻어냈다. 결국 국민당은 다수의 지배를 양보했지만, 소수가 존중받을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ANC 역시 양보는 불가피했다. 협상 초기 쟁점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였다. 금광을 비롯한 광물산업은 1990년대 초 남아공 국내총생산(GDP)의 14%, 총수출의 45%를 차지할 정도였다. 전통적 좌파와 노조, 그리고 공산당은 광산에 대한 국유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이 문제가 재산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남아공의 모든 자본가가 이 협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국유화를 한다면 자본의 해외 유출은 피하기 어려웠다. 결국 만델라는 강경파들을 설득해서 광산에 대한 정부 지분을 20% 정도 확보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반발 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벼랑 끝 전술

 

더 중요한 것은 화해의 정치다. 만델라는 언제나 “백인은 우리의 친구고, 그들이 이 나라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평가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오랜 세월 공권력을 백인이 잡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는 증오를 재생산하는 복수가 아니라, 흑백이 공존하는 화해를 요구했다. 만델라는 공무원의 지위 보장을 약속했다. 인종차별 정책에 앞장섰던 경찰에 대해서는 고백하면 사면해줄 것을 약속했다. 상부 명령으로 한 행동이라도 그것이 반인륜적 범죄라면 처벌할 수 있다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사례를 따르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만델라는 취임 이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해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얻기 위해 양보했다.

 

만델라와 클레르크 둘 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내부 협상이었다. 클레르크의 개혁 조치에 백인들은 공공연하게 저항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리고, 만델라와 클레르크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흑인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가 중단되지 않았고, 백인 우익단체와 흑인 기득권 단체의 민간인 학살도 지속됐다.

 

클레르크는 반발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벼랑 끝 전술을 선택했다. 1992년 초 국민당 지지 기반인 지역의 보궐선거에서 노골적으로 협상에 반대하는 보수당이 당선됐다. 클레르크는 3월에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치고 나왔다.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해 1990년 2월 대통령이 시작한 개혁 과정이 계속되기를 지지합니까?” 백인을 대상으로 한 이 투표에서 만약 ‘아니요’라는 답이 많으면 공직을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결과는 69%의 찬성이었다. 클레르크는 결단으로 협상력을 회복했다.

 

만델라도 마찬가지다. 그는 27년간 감옥에 있었다. ANC는 규모가 크고 조직되지 않았으며 혁명적 연대로 구성됐기 때문에 내부 조율이 쉽지 않았다. 협상이 시작됐을 때, 만델라가 오랫동안 갇혀 있던 로벤섬에는 여전히 정부의 사면을 반대하는 정치범 25명이 석방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협상이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만델라는 로벤섬을 찾아 이들을 설득했다. 협상은 투쟁의 연속이라고.

 

1992년 6월 협상에 반대하는 백인과 흑인 무장단체가 민간인 46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으며, 경찰은 조사도 하지 않았다. ANC 내부에서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거리로 나온 시위대는 ‘만델라, 우리에게 총을’ 그리고 ‘대화가 아닌 전투를 통한 승리’라는 구호를 외쳤다.

 

만델라의 말처럼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일시적인 협상 중단은 불가피했다. 그렇다고 다시 무장투쟁을 재개할 수도 없었다. 만델라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생각한 것은 바로 대중집회였다. 8월 정부청사 앞에서 10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옥외집회가 열렸다. 만델라는 대중집회를 강경파들의 분노를 분출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이후에도 암살과 폭력으로 위기의 순간이 적지 않았다. 만델라는 내부 강경파들에게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전쟁보다 어려운 대화

 

1994년 선거에서 ANC는 승리했다. 그리고 만델라가 대통령이 됐다. 그는 취임사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한 힐링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클레르크는 부통령직을 맡았다.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해의 다리가 돼달라는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자유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은 만델라의 용기와 더불어 클레르크와 같은 ‘전환기의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보다 어려운 대화였다. 그렇게 남아공은 폭력의 시대에서 힐링의 시대로, 백인의 국가에서 무지개 국가로 전환했다. 이래도 대화가 굴복인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